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브드나도를 아십니까

성령충만땅에천국 2015. 7. 5. 13:31

브드나도를 아십니까|성경 말씀 묵상

은혜 | 조회 15 |추천 0 |2015.07.02. 11:21 http://cafe.daum.net/seungjaeoh/J75F/125 

7월의 말씀 산책

나는 성경을 오랫동안 보아왔지만 브드나도(Fortunatus, 행운)라는 이름을 알지 못했다. 얼마 전 목사님이 설교할 때 그 이름을 들었지만 외우기도 힘들고 또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을 인물로 생각되지도 않았다. 또 실제로 신약성경에 그의 이름은 꼭 한번(고전 16:17) 나왔을 뿐이다. 그런데 바울은 에배소에서 고린도전서를 쓰기 전(혹은 도중에) 그들(스데바나,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을 만난 뒤 이 사람들을 꼭 알아주십시오.”라고 책의 말미에 그들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당부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6:17의 한 줄이 아니었으면 선교역사에 빠질 번한 귀한 분이 브드나도이다.

 

우리 주변에도 이렇게 선교사역에 이름이 묻힌 사람들이 많다. 나는 이번에 미국에서 빛내리교회를 개척한 뒤 고인이 된 송 목사의 사모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분의 고향 김제의 대창교회를 함께 방문한 일이 있다. 이 교회가 있는 김제시 죽산면 대창리는 한국의 곡창지대라고 알려져서 번드리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마을의 논에 물이 꽉 차면 멀리서 볼 때 번들번들하게 보였다 해서 생겨난 이름이라고 한다. 송 사모의 부친, 홍규일 장로는 내가 평소에 존경하는 분이어서 내가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교회였다. 그분은 대창교회의 바로 옆에 집을 가지고 있어 교회를 세우는데 그 부친 때부터 정성을 다 하였다 한다. 슬하에 딸 넷과 아들 셋을 두고 계셨는데 향학열이 높아서 딸도 가르쳐야 한다고 네 딸을 다 대학에 보냈다. 6·25 전란으로 피폐해진 농촌에서, 농지도 많지 않은 분이 여자를 대학까지 보낸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첫 딸을 고등학교 교육을 마치게 했을 뿐 아니라 1954년 총회 신학교(현 장로회 신학대학)까지 입학시켰다. 그래서 그 교회 출신인 안경운 목사(1982년 제 62회 총회장)와 그해 1221일 결혼을 시켜 목사 사모로 교회를 섬기게 했다. 둘째 딸은 이화여대 약대에 입학시켰다. 학자금을 위해 딸을 앞장세우고 농가의 살림 밑천인 소를 김제 장에 내다 팔기 위해 아버지는 그 뒤를 따라 가고 있었다. 당시 농민들은 이를 보고 혀를 찼다고 한다. 어린 아들들을 생각해야지 웬 여자를 대학까지 교육 시키려 소까지 파는가? 하고 한심스러운 표정들이었다. 그러나 그분은 아들을 잘못 가르치면 내 집만 망하지만 딸을 잘못 가르치면 내 집뿐 아니라 남의 집까지 망하게 한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 딸이 대학 2학년 때 고등학교의 교장이었던 여 선교사가 자기 고향의 플로라 맥도날드대학(Flora MacDonald College, NC)에 입학하도록 주선하였다. 이 대학은 신학교로 출발하여 남부 장로교대학으로 음악학교를 겸한 곳이 1915년 이름이 바뀐 곳이다. 그 아버지는 얼마 안 되는 논을 모를 심어 놓은 채 몽땅 학비를 위해 내 놓았다. 그러나 그해는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어 팔리지를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서울의 감리교 선교사가 기꺼이 등록금과 여비를 대 주어서 미국 유학이 시작 되었다. 이 때도 홍 장로는 자기 딸을 김활란 박사처럼 키우겠다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딸이 오하이오 주립대학 음악 전공으로 옮겨 음악학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 중에 있다가 같이 알고 지내던 감리교 신학교 신학생과 필라델피아의 한 콘퍼런스에 참석하고 귀가하던 도중 차 사고로 소천하여 고향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오하이오 대학 옆 묘지에 묻히고 말았다. 셋 째, 넷 째 딸들도 숭실대 종교학과와 이화여대 음대로 진학 시켜 그 두 딸들은 다 목사 사모가 되어 있다. 세 아들들도 대학을 마치고 두 아들은 교회 장로로 또 막내아들은 목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다.

 

나는 대창교회에서 내가 존경하는 홍규일 장로의 흔적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집터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목사님은 출타 중이었는데 전화로 연락하여 홍 장로님을 존경하여 찾아온 사람이라고 말하며 혹 아시느냐고 물었더니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럼 교회 백년사를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13년 전에 출판된 것이어서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나는 교회 옆에 자그맣게 만들어 놓은 종탑 앞에 앉았다. 새벽마다 종을 치면 막히는 곳이 없이 광활한 번드리에서 김제 읍까지 소리가 들렸다는 그 종이었다. 홍 장로가 몸담아 섬기던 그 고장에서는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후에 인터넷 검색을 하였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아무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떤 분이 자기 블로그에 당회록에서 찾은 것이라고 1대부터 7대까지(1908-1942)의 장로 명단을 올렸는데 1959년 홍재순이라는 이름으로 장로가 된 그분의 이름이 물론 나와 있을 리 없었다. 이름이 있고 없고가 무슨 상관인가? 일자무식이었지만 말씀대로 살고,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근동 사람들이 그의 행실을 보고 모두 죽산면 일대에 사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었으며 교회를 지을 때는 믿지 않은 분도 쌀가마를 내놓았다고 한다. 홍 장로는 엄격하게 성수주일을 하신 분이데 일제의 학대가 심할 때는 주일에도 농사를 지어 수확을 늘려야 일본에 유익한데 농민들 중 홍 장로를 닮아 일을 쉬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그 주동자로 일경에 붙들려가 경을 치기도 했다고 한다.

예수를 믿고 구원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또 해외 선교사로 나가고 거리에서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나는 대창교회 누구든 붙들고 <홍규일 장로를 아십니까?>라고 묻고 싶었다. 또 이시대의 교인들을 향해 또 그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이 사람들은 나(바울)의 마음과 여러분(고린도 교인)의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사람들을 알아주십시오

 

교회창립 1903년 4월 10일, 신축정초 1963년 3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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