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장막 집

성령충만땅에천국 2015. 7. 11. 13:47

장막 집|성경 말씀 묵상

은혜 | 조회 25 |추천 0 |2015.07.11. 09:18 http://cafe.daum.net/seungjaeoh/J75F/127 

7월의 말씀 산책

나는 오랫동안 땅이나 집을 부동산으로 가져 본 적이 없다. 그것을 부러워해 본 적도 없다. 그런데 내가 대학 전임강사로 취직이 되어 대전의 대사동에서 셋방살이를 하고 있을 때였다. 친구가 자기가 미국 선교사로부터 학교 부지를 불하받아 대지로 전환해 정지를 해 놓았는데 그곳에 집을 짓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땅 값은 되는대로 갚으면 되고 위치는 내가 처음이니 어느 곳이든 마음대로 고르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내 친구는 집을 지으라는 것이었다. 자기의 친구가 주택은행 대리로 대전에 와 있으니 융자를 알선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떠밀리는 느낌으로 얼결에 집을 짓게 되었다. 그 때 나는 우리 대학의 건축을 주로 맡아 짓고 있던 건축 기사를 알고 있었다. 그가 아주 튼튼한 집 설계를 해 주었는데 나는 경험이 없어 설계대금도 낸 것 같지 않다.

어떻든 집을 짓고 나니 흐뭇하였다. 처음으로 내 집이 생긴 것이다. 나는 경사진 서향 땅의 맨 윗자리에 집을 지었는데 그곳은 교회 바로 앞이었으며 그 이웃에는 돈이 많은 분이 소나무 숲이 욱어진 곳에 별장처럼 집을 지어 놓고 한가롭게 살고 있었다. 내 집을 짓고 처음으로 하고 싶었던 일은 내 집 현관에 내 이름이 들어간 문패를 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리석으로 내 이름과 아내 이름을 나란히 새겨서 달아 놓았다. 부친도 교장으로 관사를 전전해 살아서 우리 가정에서 문패를 달아보기는 내가 처음이었다. 그 뒤로 우리 집을 찾는 사람은 , 그 두 사람 이름을 문패로 달아 놓은 집?”하고 안내하기도 했다. 그것이 19709, 내가 처음으로 가진 부동산이다. 6년 뒤 내가 미국으로 공부를 하러 떠난 뒤는 은퇴한 부모님이 와 계셨는데 아내는 막내를 데리고 미국으로 오고 부모님이 남은 애들을 돌보며 계셨다. 내가 1983년에 돌아와 보니 그 때는 아파트 붐이 일고 있어서 연탄을 때고 있는 이 집은 너무 불편하다고 시내로 나가 보자고 아내는 말했다. 그러나 섣불리 나서지 못한 것은 당시에는 아파트 청약예금을 한 사람에게만 당첨된 가격으로 입주가 허락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미분양 된 집이 있을지 모르니 아파트 섭렵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시내 한 복판 시끄러운 마을을 갔었는데 사람들이 소음을 걱정하여 들어오지 않았다고 2층 집이 미분양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198711월에 옮긴 곳이 시내 삼성아파트였다. 그곳에서 21년을 지냈다. 파이프에 구멍이 나 물이 세기도 하고 여기저기 고칠 곳이 많은 아파트에서 왜 계속 사느냐고 좀 좋은 곳으로 옮기면 집값도 올라 좋다는 대도 나는 옮기지 않았다. 미국에서 셋집 삶에 익숙했던 나는 아파트는 장막 집에 지나지 않았다. 집을 옮겨가며 재테크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러는 동안 아내는 친구 따라 아파트 모델하우스를 보고 다니더니 안 옮겨도 되니 한 번 모델하우스 구경이라도 가자고 채근하는 것이었다.

그 때 따라나섰다가 아파트 하나를 계약하고 돌아 왔다. 아내는 그럴 줄 몰랐다고 깜짝 놀랐다. 그렇게 해서 200712월에 옮긴 곳이 대전 시에서 떨어진 외곽에 있는 계룡 시의 e-편한 세상아파트다. 어떤 사람은 이 편한 아파트가 왜 이리 불편해.”하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이곳을 좋아한다. 인구는 4만 명밖에 되지 않은 곳에 13면이 있는데 어느 면사무소에 가도 그렇게 한가할 수가 없다. 또 시내에 편이시설은 다 갖추고 있다. 시 보건소에 가면 한 번도 줄 서는 일이 없이 예방접종을 할 수가 있다. 내 아파트 앞에는 <사계 솔바람 길>이라는 3km의 산책길이 있다. 율곡 선생의 제자 사계 김장생의 고택에서 시작하여 완만한 왕대산 언덕길을, 사계가 제자들과 함께 걸으며 사색 담소했다는 산책로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 아파트에 큰 애정을 가지면 안 될 것 같아 한 때는 주택 연금을 신청해 받으면 이 집은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장막처럼 생각되지 않을까 했는데 아내의 반대로 그만 두었다. 어떻든 우리는 유월절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음식을 먹는 기분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다리며 이곳에서 살 것이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질 때에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집,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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