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 해소를 어떻게 하느냐?”라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스트레스 뒤에는 항상 숭고한 인생의 의미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 의미를 알고 하면 정말 싫고 힘든 스트레스도 우리는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결론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이 제일 싫은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신나는 일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살다 보면 싫은 일도 더러는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 의사인 저에게도 싫은 환자가 있어요. 안 왔으면 좋겠는데 자꾸 옵니다.
너무 까다롭거나 너무 잘 따진다든가, 내가 보기에는 많이 좋아졌는데도 만날 죽겠다고 엄살 부리는 환자는 사실 좋지가 않습니다.
언젠가 제가 원장을 할 때 어느 환자가 계산서를 갖고 왔습니다.
“원장님, 제가 링거를 반병밖에 안 맞았는데 왜 한 병 값이 계산됐습니까?” 해서,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즉각 간호실에 전화를 했습니다.
“이 환자분 퇴원하실 때 남은 링거 병, 마저 포장해 드리세요.”
그러고 나니까 잠시 속은 후련했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그냥 상거래가 아닙니다.
환자는 나에게 생명을 맡기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에게 제가 사약을 먹으라고 하도 먹지 않겠습니까? 그런 환자가 조금 까다롭게 한다고 “남은 링거 병 포장해 드려라.” 한 것은 나쁜 의사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참 많은 것을 뉘우쳤습니다.
그러니까 ‘의사의 의무가 무엇인가? 의사라는 의미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며 아무리 싫고 힘든 환자라도 최선을 다해서 봐야 하는 것이 의사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때로 귀찮은 환자도 성심성의껏 보게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부모로서, 상사로서, 선배로서 자식이나 부하 직원 또는 후배에게 이해시킬 때에도 ‘네가 왜 이렇게 싫은 일을 해야 하는지’ 그 의미를 분명히 알게 해 줄 의무가 있습니다.
공부라는 것도 참 싫은 것입니다. 공부가 취미인 사람이야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렇지만 공부라는 것도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그 의미를 알고 하면 별로 힘들지 않습니다.
저는 평생을 공부한 사람입니다. 의사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왜 제가 이렇게 평생을 공부해도 괜찮겠습니까?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여러분이나 저나 항상 어머니께 들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공부를 해야 착한 아이다. 공부를 해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 이 개구쟁이가 비록 싫어도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를 알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공부한다고 절대 병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마 여러분 중학교 동창 중에도 1~2년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불행히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사람도 더러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에요. 공부를 많이 해서 정신병원에 간 것이 아니고, 어쩌면 정신병이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한 것일 겁니다.
이것도 우리가 의미를 잘 새겨들어야겠습니다. 얼마 전 일입니다. 응급실에 갈비뼈가 부러진 여인이 찾아왔어요.
이 여자가 자꾸 웃다가 울다가, 웃다가 울다가 그래요.
“여보세요. 갈비뼈가 부러진 분이 왜 웃습니까?”
“사실은 남편이 출장을 갔다 오면서 얼마나 제가 그리웠던지 포옹을 하다가 부러졌습니다.”
얼마나 세게 포옹을 하다가 갈비뼈가 부러졌는지 몰라도, 여자는 비록 아프지만 ‘남편이 나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갈비뼈가 부러지도록 포옹을 했을까?’ 생각하니 기뻐서 웃음이 나온 거지요.
아프다는 것도 때로는 행복이 될 수 있습니다. 아프다는 것은 사랑이기도 하고 애정이기도 하지요.
만약 이 여자가 지나가는 건달에게 맞았다고 하면 평생에 한이 되었겠지요.
그래서 아프다는 의미를 우리가 제대로 이해를 하면 절대로 아프지가 않습니다.
여러분, ‘죽음의 수용소에서’란 책을 쓴 빅터 프랭클이라는 아주 유명한 정신과 의사가 나치 수용소에 있을 때 어느 노인이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제 아내가 죽고 나서 너무나 외롭고 괴로워서 못 살겠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당신이 먼저 죽고 부인이 살아 있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아이고! 선생님, 제가 아내를 너무나 잘 압니다. 도저히 그 어려운 일을 감당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당신이 그만큼 아내를 사랑하고, 또 당신이 그만큼 아내를 그리워하기 때문에 당신이 그렇게 괴로운 것이오.”
괴로움에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 노인이 한참 앉아 있다가 편안한 기분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마지막에 나옵니다.
그래서 이분은 ‘의미 치료’라는 것을 주창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싫고 힘든 일이지만 그 뒤에는 숭고한 인생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읽어 낼 수 있는 슬기가 있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