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사 9:1-7)
교회력에 따르면, 오늘은 강림절 마지막주일입니다. 강림절은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4주간 동안의 절기입니다. 그래서 강림절을 대강절, 혹은 대림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강림절은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2천 년 전 성탄절에 예수님이 오신 것과, 오늘 구원받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신다는 것과, 마지막 때에 재림 주로 예수님이 오실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영접할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탄절을 예비하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과연 우리는 아기 예수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아기 예수를 영접하기 위해서 정말로 정성을 다해 준비하고 있습니까? 성탄절에 빛나야 할 것은 이런 트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아기 예수의 영광인줄 믿습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세계적인 명절인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번 주 수요일이 성탄절입니다. 한사람의 생일을 두고 온 세계가 기뻐하며 축하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성탄절뿐입니다.
성탄절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그 당시 서기관들처럼 지식으로만 아는 성탄절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처럼 메시야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지켜서도 안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시민들처럼 무관심 속에서 성탄절을 지켜도 안될 것이고, 우리는 동방박사들처럼 성탄절을 지켜야 합니다. /할/
▶그러면 동방박사들은 어떻게 성탄절을 지켰습니까?
⑴성경말씀대로 믿고 지켰습니다. 저들은 이상한 별을 보았을 때 그별이 메시야 탄생을 가리키는 성경의 예언(민24:17)의 성취라고 믿고 성탄을 지켰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가 되심을 믿고 성탄을 지켜야 합니다. /아멘!/
⑵깨달은 대로 실천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탄생한 줄을 깨닫고 그 메시야에게 경배하기 위하여 먼길을 떠나 베들레헴에 도착하여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신앙은 깨닫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깨달아지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⑶귀한 예물을 바쳤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 귀한 예물을 기꺼이 아낌없이 바쳤습니다. 마2:11절하 '보배 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여기 황금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으로 보배로 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귀한 분이십니다. 금이 보배이듯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가장 귀한 보배가 되십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께 나오면서 빈손으로 오지 않고 아주 값비싼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예물은 오늘날 헌금이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주님은 물질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물질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헌금하는 마음을 받으십니다. 억지로 인색함으로 마지못해 생색내기 위해서 헌금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희생이 너무 감사, 감격하여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행20:35절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그러니까 주는 자가 복되다고 했습니다.
갈6:7절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또 눅6: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할/
⑷아기 예수를 만난 후에도 천사의 지시에 순종했습니다. 천사가 그들에게 지시하기를 '헤롯왕을 만나지 말고 다른 길로 고국으로 돌아가라'고 지시를 할 때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할/ 신앙은 순종입니다. 순종은 축복의 통로입니다. /아멘!/ ◀제목 소개!▶
크리스마스가 뭔지 아십니까? 이사야서 말씀대로 이 세상이 너무 차가워서, 이 세상이 너무나 어둡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 헤매는 백성에게 메시아가 빛으로 오시는 것,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온 땅에 사는 백성들에게 메시아가 생명의 빛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오심은 어둠 속의 빛, 죽음의 그림자에 가운데 사는 땅의 사람들에게 생명의 빛입니다. 그 빛은 반드시 비치게 되어 있고, 빛이 비치면 어둠은 밝음으로 변하게 되어 있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은 생명의 하늘로 바뀌게 됩니다.
성탄이란 하늘의 오심입니다. 빛의 오심입니다. 인간의 사랑도 사람을 바꿔 놓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사랑의 사랑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아기 예수가 탄생하십니까? 이사야서가 다시 설명합니다. 메시아가 탄생하시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곡식을 거둘 때 기뻐하듯이, 주님 앞에서 기뻐하게 만듭니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군인들이 전리품을 나눠 가질 때 즐거워하듯이,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합니다. 침략자의 군화와 피 묻은 군복이 모두 땔감이 되어서 불에 타 없어지는 평화의 시대가 도래합니다. 이게 이사야가 꿈꾸던 메시아 비전입니다. /할/
그 꿈이 어떻게 실현됩니까? 이사야서가 오늘 본문 7절에서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났고'로 시작됩니다.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났고' 이 말씀은 구약성경이 줄기차게 예언한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메시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캐논 헤이그'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500년 전에 셰익스피어가 태어날 것을 예언했는가? 누가 300년 전에 나폴레옹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는가? 그러나 구약성경은 에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실 것을 예언했다'고 했습니다.
㈀창3:15절에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가장 먼저 선포된 예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탄생은 모든 예언의 근거가 되고, 모든 예언의 성취가 됩니다. /할/
㈁사7:14절에서 '임마누엘'로 예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1:23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그렇다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기 위함입니다.
첫 아담의 후예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에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질 수 있으셨습니다.
동정녀 탄생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은총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놀라운 사랑을 삶 속에 가득히 체험합시다. 그리고 받은 사랑만큼 거룩하고 순결한 삶 가운데서 성탄절을 맞이합시다. /아멘!/
㈂미5:2절에서는 베들레헴으로 오신다고 예언하셨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예수님은 이처럼 유다 지역에서 가장 낮은 곳에 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강포에 싸여 마구간의 말구유에 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낮아지고, 또 낮아지셨습니다. 이는 낮은 우리를 높여서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시고, 우리를 부유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또한 미가의 예언이 성취된 것은 인류역사가 예수님을 중심으로 움직임을 보여줍니다.
역사라는 뜻의 '히스토리'는 'his'와 'story'가 합쳐진 말로, '그분의 이야기', 즉, '예수님의 이야기'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세계 역사를 주관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멘!/
㈃시132:11절에서는 다윗의 가문으로 오신다고 예언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성실히 맹세하셨으니 변치 아니하실지라 이르시기를 네 몸의 소생을 네 위에 둘지라'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것입니다. 다윗은 성전을 건축하기 원했지만,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다윗에게 놀라운 언약을 주셨습니다. 삼하7:12절에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이 예언은 본질적으로 예수님을 지칭하고 있습니다(시132:11).
그러므로 예수님은 약속된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왕 중 왕이십니다. 세상에서 위대하다고 존경받았던 다윗 왕조차도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우리 역시 만 왕의 왕이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믿/
㈄사7:14절에서도 예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53:5-6절에서는 그 분의 죽으심을 예언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에 대해서 생생하게 묘사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할/
㈆그리고 오늘 본문 6-7절입니다. 이사야는 6절에서 그 분의 모습을 세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그 분의 이름을 7절에서 다섯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①먼저 그 분이 어떤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까?
⑴'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메시야의 모습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 분은 장성한 모습으로 오시지 않고, 아기의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 사람입니다. 사람이라야 죽지, 하나님은 죽으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인성을 말씀해 주는 구절입니다. /할/
⑵'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 아기는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자기 아들을 세상에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요3:16).
⑶'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여기서 '정사'라는 말은 곧 정부, 정권이라는 뜻이며, 통치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어깨에 정권을 담당하신 분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통치자요. 만 왕의 왕으로 이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만 왕의 왕이십니다.
이 세 가지가 이 땅에 오신 메시야의 모습입니다. 그는 참 사람이십니다. 참 하나님이십니다. 만 왕의 왕이십니다. /아멘!/
②예수님의 이름과 속성을 다섯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⑴'기묘자'입니다.
'기이하고 묘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은 이것을 'Wonderful'이라는 단어로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메시야가 이 땅에서 하는 일이 모두 '신기하고 놀랍다'는 것입니다.
'원더풀'이라고 하니까 옛날에 유행하던 노래가 떠오릅니다. '원더풀, 원더풀 아빠의 청춘, 브라보, 브라보 아빠에 일생' '원더풀'!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입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장차 이 땅에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원더풀'이라고 한 것은 '신비하고 또 신비한 분'이라는 예언입니다. /할/
어떤 면에서 신비합니까? 예언대로 오셨으니 신비합니다. 탄생에 있어서도 신비합니다. 처녀가 남자 없이 성령으로 잉태하다니 가능한 일입니까? 또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으니 얼마나 신비합니까? 또 죽으심으로 구원하셨으니 구원의 방법도 신비합니다.
그리고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사심도 신비하고, 자기 대신 성령을 보내심도 신비하고, 그 악한 사단을 잡으시는 방법도 신비하고, 다시 영광 중에 성도들을 거느리고 재림하심도 신비하고 예수님은 온통 신비로 가득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살후1:10절에 '그 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할/
그런데 또 놀라운 것은 이 기묘자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시면 또 다른 기묘한 일이 시작됩니다. 우리 죽은 영혼이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됩니다. 거룩하게 됩니다. 변화되게 됩니다. 영적인 사람으로 변합니다. 하늘의 사람으로 변합니다. 하늘 영광의 사람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고후5: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할/ 이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아멘!/
⑵'모사'입니다.
여러분, '모사'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영어에서는 'Counsellor'라고 번역했습니다. '상담자'라는 뜻입니다. '보혜사'라는 뜻도 됩니다.
'모사'의 사전적인 의미는 '지혜를 내어 일이 잘 이루어지게 하는 사람, 남을 도와 그를 위해 지혜를 내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의미로 본다면, 일반적인 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감히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계획을 세우시고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모사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지혜는 땅의 지혜가 아니라 하늘의 지혜입니다. 또한 그 지혜대로 이루시는 것이 사람의 힘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사란 어떠한 것입니까?
실패를 성공으로 바뀌게 하는 것입니다. 눅5장에 실패자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모사입니다.
베드로는 고기잡이에 대한 자신의 경험, 바다에 대한 상식, 모두 다 버리고 예수님이 말씀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내 모든 경험 다 버리고 모사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겠다는 순종의 믿음입니다.
모사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베드로는 만선의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할/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영원한 생명의 모사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성공의 모사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풍요로움의 모사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보람된 삶과 행복의 모사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아멘!/
⑶'전능하신 하나님이라'
그 분의 능력은 무한하십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실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실 수도 있습니다. 바람과 풍랑을 잠잠케 하실 수도 있습니다. 중풍병자도 고치시고, 눈먼 자, 귀가 먼 자도 고치십니다. 어떠한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는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아멘!/
⑷'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영원히 살아 계시는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의 보호자요, 사랑으로 양육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사랑으로 언제나 우리를 감싸주십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실족합니다. 믿노라 하면서도 그 분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우리를 버리는 법이 없습니다.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그 분을 멀리 떠났더라도 탕자가 두 손들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올 때처럼 우리도 뉘우치는 심정으로 그 분께 돌아오면, 그 분은 무한하신 아버지의 사랑으로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십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출입을 지켜주시는 분이십니다.
시121:7-8절에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영존하시는 아버지시기에 가능한 축복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그 분은 영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영존하신 하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은 영원히 사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요11:25-2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60살 환갑이 되어서 저승에서 죽음의 사자가 오거든'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60세 환갑에 저승사자가 오거든 '지금 부재중'이라고 일러라.
70세 고희가 되어 찾아오거든 '아직은 좀 이르다'고 일러라.
77세 희수가 되어 오거든 '이제야 비로소 인생을 즐기기 시작했다'고 일러라.
80세 신수가 되어 오거든 '이래봬도 아직은 쓸모가 있다'고 일러주어라.
88세 미수가 되어 오거든 '쌀 좀 더 축내고 가겠다'고 일러라.
90세 졸수가 되어 오거든 '너무 그리 조급하게 굴지 말라'고 일러라.
99세 백수가 되어 오면 '때가 되면 내가 자진해서 간다'고 일러라.
이 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살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살고 싶으면 저승사자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영원히 사는 자가 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⑸'평강의 왕'입니다.
그 분은 우리의 모든 짐을 대신 져주시고, 우리의 마음속에 평강을 허락하십니다.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그 어느 누구도 줄 수 없는 참된 평강, 곧 'Shalom'을 우리 마음에 심어주십니다. /할/
▶사람들 말 중에 세상 살아가는 방법이 네 가지 있다고 합니다.
첫째 방법은 '너 죽고 나 죽자'는 것입니다. 무섭습니다. 이건 최악입니다. 그보다 조금 나은 것은 '너는 죽고 나는 살자'는 것입니다. 좀 얌체 같지만 한쪽은 삽니다. 더욱 나은 방법은 '나 죽고 너 살라'는 것입니다. 불길 속에 뛰어드는 어머니의 심정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너도, 나도 함께 살자'는 것입니다. 왜 이런 상황이 우리 인간사에 들어왔습니까? 삶에 평안히 깨어 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이 땅에 '평강에 왕'으로 오셨습니다.
여기 평화라는 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팍스(pax)와 살롬(shalom)입니다. 팍스는 로마인들이 추구하는 평화였는데 물질적인 만족감이나 법, 힘으로 세상을 평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쟁취하여 얻는 평화입니다.
살롬은 이미 우리 주님께서 이루어 놓은 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쟁취하여 얻는 평화는 영원히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의 마음 속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져 있는데, 그 구멍은 세상의 쾌락이나 물질 욕으로 채울 수 없고, 아무리 노력해도 불만족과 실망으로 끝납니다. 그 구멍 뚫린 빈자리에 하나님을 모실 때에만 채울 수 있고, 참 평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이미 주님께서 이루어 놓은 평화를 받아 들여 누려야 합니다. 7절에는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평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의사인 누가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평강은 얻은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 시키셨습니다. 인간과 인간을 화해 시켰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 버린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어 하나님과 평화를 주었습니다.
롬5:10절에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지금도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평강을 허락하십니다. 요14: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이 평강을 붙들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빌4:6-7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여러분!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났습니다. 그 아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그 분은 만 왕의 왕으로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기묘자로 오셨습니다. 우리의 모사로 오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오셨습니다. 영존하시는 아버지로 오셨습니다. 평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지금도 그 분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할/
우리의 모든 짐을 메시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 다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이번 성탄주일을 맞이해서 저와 여러분을 괴롭히는 고통과 흑암의 권세와 멸시 천대 저주 질병 실패 그 모든 것을 깨끗하게 벗어버리고 마음의 천국을 이루시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③예수님의 왕국의 특징이 무엇입니까?(7)
⑴'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그 정사는, 그 분의 다스림은(통치), 그 분의 나라는 영원무궁합니다. 아울러 평강의 더함도 무궁하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분은 평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우리를 다스리시되 무력으로 다스리지 않으시고, 평강으로 다스리십니다. 그 분의 나라에는 언제나 평화가 넘쳐흐릅니다. /아멘!/
⑵'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우리 예수님께서 누구의 자손으로 오셨습니까?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습니다. 약속대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다윗의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⑶'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세상 나라는 쇠약했지만, 그 분의 나라는 영원무궁합니다.
⑷'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여기서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고 하는 부분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각 나라마다 통치 이념이 있기 마련입니다. 건국 이념이 있습니다. 메시야의 나라는 공평과 정의로 통치하신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불공평한 일이 많습니다. 이 세상에는 불의한 일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는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보존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7절의 끝 부분을 보십시다.
⑸'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열심,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거룩하신 집념이 모든 것을 반드시 이루시고야 마신다는 것입니다. 과연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은 이것을 이루셨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이 말씀을 기록한지 약 700년 후에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나셨습니다. 유대 땅 베들레헴 말구유에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기의 몸으로 탄생하신 것입니다.
그 분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사탄의 왕국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죄의 권세에 얽매여 고통 당하던 우리들에게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을 주셨습니다.
사탄에 매여서 종노릇하면서 멸시 당하던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영화롭게 만드셨습니다. 천국의 백성으로 영화롭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열심', 이 구절이 제 가슴에 깊이 와 닿았습니다. 인간의 열심 가지고는 안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열심만이 인간을 구원하실 수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열심에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④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1-5)
오늘 성경은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신 일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죄와 절망과 죽음의 흑암에 빠져 신음하고 살던 사람들에게 빛을 비춰 살길을 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할/
여기 '고통, 흑암, 사망, 멍에, 채찍, 압제, 피' 이런 인간을 괴롭히는 것들로부터 제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화, 큰 빛, 창성, 즐거움, 평강, 공평, 정의'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세상이 어둡고 인생길이 캄캄해도 빛 되신 주님이 빛을 비추시면 길이 환하게 밝아지고 인생은 열리게 됩니다. 이 예언은 십자가를 통해서 다 이루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사망을 물리쳤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어두움을 물리쳤습니다. 이미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루어 놓은 것을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빛 가운데 사는 자들입니다. /아멘!/
▶그러면 빛 속에 사는 우리가 가장 먼저 누려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자유입니다.
자유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쟁취로 얻어지는 자유와 이미 주어진 자유를 누리는 자유입니다. 쟁취하여 얻는 자유는 정치적 자유, 경제적, 정신적, 종교적, 심리적 자유 등 갖가지가 있습니다.
일제 시대 때, 우리 선열들은 이런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제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 노력하지 않습니다. 이미 이루어진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어 놓은 자유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해서 돌아가심으로 죽음으로부터 자유, 죄로부터 자유를 이미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죽음으로부터 자유, 죄로부터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 안에 있는 자만 누리는 자유입니다.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요8:32절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또 36절에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아멘!/ 또 롬8:1-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제 그 자유를 지키며 누리며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⑴주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제하여 주셨습니다(1).
'전에 고통 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참으로 은혜로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이 말씀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올해 성탄의 메시지가 이 말씀 속에 다 담겨져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고통을 당하셨든지, 예컨대 육체의 질고를 당하셨든지, 마음의 고통을 당하셨든지, 혹은 경제적인 고통을 당하셨든지, 또 여러분이 어떠한 흑암에 처하셨든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여러분 모두가 그 모든 고통과 흑암에서 벗어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이 과거에 지나간 일들로 기억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백성이 고통과 흑암 가운데 머물러 있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반드시 구원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이것을 이루고야 마십니다. 뜻깊은 성탄의 계절을 맞이해서 이 놀라운 역사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게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할/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저들이 범죄한 연고로 하나님은 저들을 징계하셨습니다. 스불론과 납달리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 가운데 두 지파입니다. 지리적으로 저들은 갈릴리 지방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갈릴리 지방이 어디입니까? 왼쪽에는 지중해를 따라서 해변의 길이 나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요단강과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갈릴리 지방입니다.
스불론과 납달리 두 지파는 갈릴리 지방에 정착했습니다. 다른 지파에 비해서 북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두 지파는 전쟁이 일어나면 항상 이방인들의 침입을 제일 먼저 받는 곳이었습니다.
또 이사야 선지자가 본문의 말씀을 기록할 당시에는 이미 북방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당했을 때입니다. 앗수르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가고, 그 대신 자기들이 갈릴리 지방에 와서 정착해 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끝 부분에 보면 갈릴리를 가리켜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이방의 갈릴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갈릴리 지방은 지금까지 이방인에 의해서 짓밟혀 왔습니다. 멸시를 당해 왔습니다. 고통을 당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그 멸시받던 갈릴리가 어떻게 되었다고 했습니까?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할/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에게 무슨 힘이 있어서, 자기들의 노력으로 영화롭게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런 은혜가 있기를 절대 소원합니다. 고통이 사라지고 흑암의 권세가 사라지고, 멸시와 천대가 바뀌어서 영화롭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이것이 바로 대강절에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아멘!/
⑵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어떻게 영화롭게 하셨습니까? 2-3절의 말씀이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2절에서는 흑암의 문제가 해결되었고, 3절에서는 고통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2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까지 흑암 속에 살았고, 사망의 땅에 거했습니다.
온 천지가 캄캄했습니다. 여기서 '흑암'은 당시 참혹하던 고난의 참상을 표현한 말씀입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은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70년의 흑암의 세월을 살았습니다. 그 삶의 내용이 사망입니다. 인권도, 자유도, 아무것도 없는 죽음의 삶이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큰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의의 태양이신 메시야를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빛으로 이 땅에 오실 것을 약속한 것입니다. /할/
우리 모두 뜻깊은 성탄의 계절을 맞이해서 '큰 빛, 구원의 빛, 생명의 빛'이 강하고 찬란하게 여러분의 영혼 속에 비춰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삶을 어둡게 만드는 그 모든 흑암의 세력이 말끔히 소멸되어 물러가는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하나님은 고통 당하던 자기 백성을 어떤 식으로 영화롭게 하셨습니까?(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로 다 할 수 없이 쇠약해졌습니다. 이방인들에 의해서 무참히 짓밟혔습니다. 멸시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사 어떻게 하셨습니까?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셨다'고 했습니다. 자기의 백성을 강대하게 하셨습니다. 그 백성의 수요를 많게 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이 나라 이 민족에게도 성탄의 계절을 맞이해서 일어나게 되기를 저는 소원합니다. 이 나라가 창성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창성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이 나라의 경제도 창성해서 회복되기를 소원합니다. IMF때보다 더 경제가 곤두박질했습니다. 쇠약해진 경제가 다시금 회복되는 놀라운 역사가 이번 성탄주일을 맞이하여 일어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주께서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어떤 즐거움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추수하는 즐거움'입니다. 여러분 농사짓는 농부에게 있어서 가장 즐거운 때는 언제이겠습니까? 추수할 때입니다. 농사가 잘 되었습니다. 창고에 곡식이 가득 가득 쌓여 있습니다. 그리고 즙틀에는 새 포도주가 넘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즐거움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또 하나는 '탈취 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 같이'입니다. 군인에게 있어서 가장 즐거울 때는 언제입니까? 탈취 물을 나눌 때일 것입니다.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전리품을 나눌 때의 그 기쁨, 그 즐거움이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여러분! 성탄주일을 맞이해서 추수할 때의 즐거움과 탈취 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이 바로 여러분의 즐거움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즐거움의 근원은 하나님이심을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추수의 즐거움을 거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잘 싸웠기 때문에 탈취 물을 나누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즐거움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즐거움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 할 수밖에 없습니다.
⑶그들이 그토록 즐거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4-5).
㈀첫째 이유는 4절입니다.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압제자에 손에 의해서 종처럼, 짐승처럼 아주 심한 학대를 받아 왔습니다. 목에는 무거운 멍에를 메어야 했습니다. 어깨에는 채찍이 가해졌습니다. 압제자는 그들의 등을 막대기로 내리쳤습니다. 그들은 짐승 취급을 받았고, 종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 모든 학대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멘 멍에를 부수셨고, 압제자의 채찍을 찢으셨습니다.
그리고 막대기도 꺾어 버리셨습니다. 그리고는 학대당하던 자기 백성을 하나님께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해방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즐거워하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되 어느 때와 같이 하셨다고 했습니까?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삿7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기드온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을 때 미디안인들이 침입해 들어 왔습니다. 13만 5천명이라는 엄청난 대군이었습니다. 그 때 그들과 대항해서 싸우기 위해서 동원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는 3만2천명이였습니다. 미디안 군대에 비하면 적은 숫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과하고 하나님은 많다고 하시면서, 기드온으로 하여금 다 되돌아가게 하시고 불과 삼백 명만 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적은 숫자로 미디안 대군을 물리치고 큰 승리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할/
전쟁의 승패는 인간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압제자의 멍에와 채찍과 막대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들 자신에게 무슨 힘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죄의 권세에서,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자유함을 누리는 것도 우리가 잘 나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무슨 공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장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이미 승리하셨기에, 우리는 죄의 권세에서 놓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서 자유 함을 얻기 위해 몸부림쳐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신 자유 함을 즐겁게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안에서의 삶입니다. 우리 모두 구원의 즐거움이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이스라엘 백성들이 즐거워하는 둘째 이유는 5절입니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묻은 복장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군인이 무엇을 입고 싸웁니까? 갑옷을 입습니다. 그리고 적과 어지럽게 싸웁니다. 정신 없이 싸움을 하다 보면 그 복장에 무엇이 묻는다고 했습니까? 피가 묻기 마련입니다. 자기의 상처에서 난 피도 묻을 것이고, 적이 흘린 피도 묻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 것이 필요 없습니다. 모든 전쟁 장비를 '불의 섶 같이 살라지리니'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더 이상 전쟁이 없고, 평화가 왔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살롬, 곧 하늘의 평화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케 하셨습니다. 나와 너 사이에 막힌 담도 허물어 드리셨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본문의 상황처럼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상황에 처한 분들이 계십니까?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혹 원치 않는 것에 얽매여(포로) 있는 분이 있습니까?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새로운 삶을 열어 주시고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2013년 12월 22일 대강절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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