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교회를 향한 바울의 감사 (롬 1:8-12)
▶독일의 재무장관을 지낸 ‘마르틴 바덴’이 젊은 시절 지방 여행을 갔을 때 싸구려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의 구두가 없어졌습니다.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당장 구두를 살 돈도 살만한 가계도 없었기 때문에 여간 낭패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마침 그 날이 주일이었습니다. 여관 주인은 미안해하며 창고에서 헌신 한 켤레를 빌려 주며 교회에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그는 마지못해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투정이 섞인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구두를 훔쳐간 사람을 막아주지 않았습니까?’ 기도를 하고 나서 마르틴은 예배당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눈물을 흘리며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며 말씀을 듣는 한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비록 그는 옷은 남루했지만 얼굴에는 기쁨과 감격이 넘쳐흘렀습니다. 마르틴은 남루한 옷차림의 그를 보면서 더욱 감격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두 다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신발 한 켤레를 잃었지만 저 사람은 신발 신을 두 다리를 잃었으면서도 저렇게 기쁨과 감격이 있다니...!’라는 생각이 들어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습니다.
마르틴은 후에 ‘내 생애 가운데 가장 감격적인 예배는 그때 시골 교회에서 드린 예배였습니다. 나는 그 이후로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할/ 그 후 그의 삶이 달라져 그는 전후 독일의 국가부흥을 일으킨 재무장관까지 되는 영광을 안게 되었습니다. /아멘!/ ◀제목 소개!▶
지난 시간엔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배웠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 복된 소식!'입니다. /할/ 여러분! 산모가 한 밤중에 난산을 하면서 죽어가고 있을 때 산부인가 의사가 온다는 전갈은 낭보 중의 낭보요, 기쁜 소식 중에 기쁜 소식인 것처럼, 죄와 죽음의 노예가 된 우리에게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은 가장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은 복음에 대한 자신의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16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예수)은 누구든지 믿는 자에게 구원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할/
▶구원의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당신은 구원을 받으셨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대부분 받았다고 대답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구원이 뭐죠?" 재차 물으면 "죽어서 천당 가는 것을 말합니다." 보통 이렇게 대답합니다. 맞습니다. 틀린 대답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이란 죽어서 천당 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의로운 자로 인정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 더욱 귀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라고 인정받는 사람은 축복입니다. 이렇게 인정을 받기만 하면 건짐을 받습니다. 실패에서, 좌절에서, 병마에서 건짐을 받게 됩니다. 17절에 보면 구원이란 말과 똑같은 뜻으로 사용된 단어가 나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서 '하나님의'가 '구원'과 같은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의 선한 행위를 가지고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과는 대조되는 말입니다.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인정받는 특별한 의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내어놓으신 새로운 의입니다.
믿음만 가지면 의로운 것이 아무것도 없는 자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니 사람의 지혜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예수님을 믿어서 그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인으로 인정받는 것을 말합니다.' 신학적으로는 이신 칭의, 이신 득의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얻은 이 의 때문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되었고, 죄와 죽음, 그리고 사탄의 세력에서 자유 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 있는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고후5: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 생명을 얻은 우리는 영원한 나라 저 천국에 주인공들이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복음이란 곧 능력을 말합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름이 곧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사실을 믿어질 때 역사는 일어납니다. /할/
초대교회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3:6)고 명하자, 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합니다. /할/ 이것이 바로 예수 그 이름의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 이름 하나가 굉장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 그 이름 앞에서 귀신이 떠나가고 마귀가 쫓겨납니다. 그 이름 앞에 병마가 도망가고 그 이름 앞에 죄가 달아나고 실패가 무너집니다.
또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십자가의 능력에 대하여 너무 많은 체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전1:18절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당당히 외쳤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 했다고 고전2:2절에서 다짐했습니다. 또 십자가는 부활로 이어지기 때문에 바로 능력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 십자가의 능력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사방 천지에 십자가 뿐, 심지어 믿는 사람, 안 믿는 사람 할 것 없이 목에, 귀에 십자가를 메 달고 다닙니다.
우리나라처럼 건물 옥상에 십자가를 마음대로 세우고 있는 나라가 없답니다. 미국은 건축법상 옥상에 십자가를 절대 못 달게 되어있답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교회의 벽에다 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달았다하면 제일 높은 꼭대기만 골라서 답니다. 밤만 되면 울긋불긋 얼마나 대단합니까? 이 나라가 금새 복음화 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입니다.
십자가가 많은 만큼, 높이 달린 것만큼 거기에 걸 맞는 능력이 나타나야 하는데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는 게 우리의 고민이요, 수치입니다.
한국교회 안에 일치가 없고, 연합이 없고, 용서가 없고, 참다운 회개가 없고, 희생이 없다는 게 뜻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를 믿는데 예수가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교계 어르신 몇 분이 한국 교회 앞에 참회문을 올려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드리고 있습니다.
▶바울의 위대한 신앙고백을 한번 음미해 봅시다! 갈2: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 안에 예수가 살아야 합니다. 내 안에 예수가 있어야 능력이 나옵니다. 예수가 있는 사람은 감사가 나오고, 찬양이 나옵니다.
극작가 '버나드 쇼'는 어느 날 기자로부터 "선생은 성경 66권 중 꼭 하나만 선택한다면 어느 책을 선택하시겠습니까?"는 질문을 받고 욥기 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곤욕과 질고를 당하면서도 하나님께 감사를 잃지 않고 산다는 것이 너무 위대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욥은 예수가 그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의 바울은 로마교회를 향하여 감사하고 있습니다.
▶8절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사도 바울이 지금 로마에 편지를 쓰고 있을 때는 아직 로마교회에 가 본적이 없고 바울이 세운 교회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로마 교인들이 그렇게 잘 믿는다는 소식이 들어와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감사합니다. 은혜를 아는 자가 감사합니다. 예수가 내 안에 계실 때 감사가 나옵니다.
⑴바울은 누구에게 감사하고 있습니까?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첫째는 해 놓고 다음 보니까 둘째, 셋째가 안 나옵니다. 어떻게 보면 문장을 무시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장을 무시한 것이 아니고 모든 것 중에 첫째가 될 만한 중요한 것이란 뜻이며, 무엇보다도 먼저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감사의 대상은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사도 바울의 진정한 감사의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⑵먼저 누구로 말미암아 감사를 드린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를 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름만 들어도 눈에 눈물이 핑 도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5절 말씀을 보세요!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로 말미암아',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런저런 귀한 직분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를 위하여 높고 높은 보좌를 내놓으시고 낮고 낮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피 흘리시며 고통 당하시고 죽으신 예수님, 내게 새로운 생명의 감격과 환희를 허락해주시기 위하여 사망의 권세를 깨치고 부활하신 예수님,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나를 위하여 기도해주시는 예수님, 나를 위하여 반드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그 예수님을 생각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 드리지 아니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 드릴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⑶그 다음 누구 때문에 감사했습니까?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남이 잘 된 일에 대하여 감사했습니다. 자신의 덕 본 일에 대한 감사가 아니요, 자신의 명예가 올라가서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남의 잘된 일에 감사했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고, 사촌이 자가용 사면 자기는 교통순경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이 잘 되는 것 때문에 감사하는 것은 차원 높은 감사입니다.
당시 로마는 세계의 중심지요, 정치, 문화, 경제와 권력과 향락의 도시로 기독교 핍박의 본거지였습니다. 그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성도가 생겨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그 은혜를 생각하며 더욱 큰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어디서나 택한 백성들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제일 먼저 하나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바울은 마귀의 종노릇 하다가 영원히 멸망 받아야 할 그들이 예수를 믿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이 소식을 듣고 감사했습니다.
감사도 덕을 세워야 합니다. 고전14:17절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내 감사가 다른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어서는 아니 됩니다. 네 사업이 잘 되어 성공을 감사하는 것을 좋으나 실패자 앞에서는 삼가야 합니다. 대학 합격은 감사할 일이나 떨어진 학생 앞에선 자제해야 합니다.
감사를 하되 남이 잘된 일에는 큰 소리로 감사하거나 또 자신에 대해서는 은밀히, 겸손히 해야 합니다. 누굴 통하여 감사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내려오기 때문에 감사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축복의 통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님의 축복은 예수님을 통해 내려오고 감사 또한 중보자 예수님을 통해 올라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없이는 감사도, 예배도 헛것입니다.
골3:17절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할/
⑷무엇 때문에 감사했습니까?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감사의 원인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의 종의 기쁨은 뭐니뭐니 해도 성도들이 믿음이 자라나서 오직 믿음으로 사는 것을 볼 때입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이 믿음으로 산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요한3서 4절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바울은 오직 믿음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최고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있는 것과, 없는 것에 있습니다. '돈이 있다. 없다. 배경이 있다. 없다, 학벌이 있다. 없다. 권력이 있다. 없다'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 없어도, 배경이 없어도, 건강이 없어도 여러분 믿음을 꼭 붙잡으세요. 믿음은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아멘!/
그런데 참된 믿음이란 단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차여행을 할 때 전화로 서울역에 기차시간과 요금을 물어봅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대답해 주는 그 말을 믿고 여행준비를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늘 일상생활에서 믿고 행동하는 생활을 접하면서도 막상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믿음으로 행동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이 시간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꼭 붙드시기 바랍니다. /할/ 저는 오늘 8절의 마지막 부분을 이렇게 바꾸어서 전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할/ 이 믿음의 역사가 우리 모든 행복한 성도들에게 반드시 임하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9절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본문에서 우리는 바울의 생애를 배울 수 있습니다.
⑴그는 복음(예수) 안에서 살았습니다. ⑵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⑶증인된 삶을 살았습니다. ⑷항상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①왜 우리가 복음 안에서 살아야 합니까?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행4:12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오직 우리의 구원자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복음의 반대는 율법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율법에 메여 살았습니다. 율법은 고소와 정죄와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사랑과 용서와 생명을 말합니다.
바울이 복음 안에서 산다는 것은 사랑과 용서와 생명 속에서 산다는 것이요, 그 복음을 전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삶의 자랑은 오직 예수요 그분이 지신 십자가 뿐 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복음 안에서 사랑과 용서와 영생의 기쁨을 누리는 잡니다. 이 기쁨을 우리는 이웃에게 증거 해야 합니다. 롬10:14절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여자가 남자를 통해서 잉태케 하시고 또한 벌과 나비를 통해서 꽃가루를 운반케 하는 것처럼 주님은 십자가에서 피 흘린 복된 복음을 전도자의 발과 입을 통해서 전달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사명을 위탁받았습니다. 전도하는 신앙은 성숙한 신앙이요 어떤 역경이 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②바울은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합니다.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우리가 인간에 대해 연구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연구가 곧 하나님에 대한 연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이해할 때 사람을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장로교에서는 영, 육으로 이분 설을 믿습니다. 그런데 창2:7, 히7:12에서는 인간을 육, 혼, 영으로 구분된다고 말합니다.
▶육은 '살로크(바디)'로, 세계의식을 말합니다. 즉 오관을 통해 주위의 모든 것을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혼은 '프쉬케'로 자아의식을 말합니다. 즉 자기의 개성을 통해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영은 '프뉴마'로 신 의식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을 섬기고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로 이 영이 파괴되었습니다. 이 영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회복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심령으로 예수님을 섬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은 바로 섬기는 생활입니다. 섬긴다는 말은 헬라어의 '라트레이아'로 섬긴다는 말도 되고, 예배라는 말도 됩니다.
롬12: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예배가 바로 섬긴다는 뜻입니다. 요4:24절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한마디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섬기는 봉사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배 없는 봉사는 봉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봉사를 아무리 잘한다 할지라도 주일 날 빼먹고 낚시하고 여행가면서 봉사 많이 했다고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는 봉사는 하나님께 나와 예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봉사(섬김)가 시작되고, 여기서부터 봉사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봉사 중에 가장 큰 봉사는 하나님께 나와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예배가 가장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일입니다. 바울은 지금 우리에게 예배 중심의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③"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바울은 세상에서 하나님 보다 나은 증인이 없다고 말합니다. 오직 내 증인은 하나님 한 분으로만 족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생활, 하나님이 인정하는 봉사, 이것이 축복입니다. 이 증인된 삶을 누가 살았습니까? 요셉이 살았습니다. 보디발 부인의 유혹에서도 신전의식으로 이겼습니다.
여러분! 누가 인정 안 해 준다고 시험 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면 그만입니다. 주님이 보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최고입니다. 사람 비위 맞추려고 하지 마십시오.
④항상 기도하는 삶이었습니다.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여러분! 이 세상에서 사도 바울 만큼 바쁜 사람이 또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힘들고 고달픈 삶으로 말한다면 사도 바울 만한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바쁘고 힘든 삶에서도 날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그리워하면서 계속해서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누가 바울의 그 심정, 그 눈물, 그 기도를 알아주겠습니까? 비록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몰라준다 해도 단 한 분 알아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누구십니까?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내 증인이 되시거니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만은 알아주신다는 것입니다. /할/
▶그 다음 바울은 어떤 원리로 기도했습니까?
행20:35절에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원리를 비추어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큰 은혜가 됩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귀합니다. 그러나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더 높은 차원의 신앙입니다.
목사님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권사님, 구역장님, 집사님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 구역장은 각 구역식구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또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 멀리 출장 가 있는 남편을 위해 기도하는 아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입니까?
"내가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라는 말은 가장 진실하고 가장 거룩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식 방식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늘 기도만 하라는 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루에 세 번씩 꼭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합니다. 짧게 기도하느냐 오래 기도하느냐는 그 사람의 마음대로 입니다.
그러나 정해 놓은 기도시간 세 번만은(3시, 6시, 9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사를 제쳐놓고 기도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여기서 항상 기도하라는 말과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은 정해 놓은 그 시간을 빠지지 말라는 말입니다. 다니엘은 그 위기 상황에서도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했고, 사무엘 선지자는 기도를 쉬는 것은 죄라고 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목사를 위해 기도하는 것, 목사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연한 것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기에 문제입니다. /할/
▶10절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지금 하나님 뜻 안에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로마로 갈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해 주셔서 어떠하든지 로마를 한 번 찾아가 보기를 원하는 바울의 소원입니다.
여러분!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해 달라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분별하는 것 귀한 것입니다.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바울은 자신이 가진 간절한 열심히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자신은 지금 당장이라도 로마에 가서 형제들을 만나 믿음의 교제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되기를 바랐습니다.
"어떠하든지" 이 말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어떠하든지 이 말을 알았기에 감옥에 들어가면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것이구나' 감사하고 찬송했습니다. "좋은 것 얻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대로 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하나님 앞서 뛰지 말고 또 뒤떨어지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 가야 합니다. 오늘날 대게 신앙에 실패한 사람들을 보면, 주님의 뜻과 섭리를 기다리지 못해 성급하게 뛰거나, 하나님이 이미 시작하셨다고 하셨는데 의심하고 뒤쳐져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11-12절에는 왜 바울이 로마에 가기를 원하는가에 대하여 대답하고 있습니다.
▶11-12절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①11절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사도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을 심히 보기를 원하는 것은 무엇을 받아오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얻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맡은 신령한 은사를 지금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나누어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줄 것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행3;6절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여러분! 가장 큰 것이 예수의 이름입니다! 예수의 이름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의 이름을 나누어주고 싶은 뜨거운 열망이 언제나 가득 차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은혜와 은사에 대한 이해입니다.
은혜란 구원을 위해서 받은 것으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같은 은혜를 받습니다. 은혜가 다를 수는 없습니다. 누구든지 말씀으로 성령으로 은혜를 받아야 하고 또 받습니다.
성령의 은혜! 신령한 은혜! 똑 같은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마음에 주시는 하나님의 자녀 된 자아의식과 성령의 교통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과 평강은 우리 모두 은혜 앞에 똑같이 받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은사는 다릅니다. 은사는 기능적이며, 다원적입니다. 사람에 따라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부지런한 은사, 섬기는 은사, 전도의 은사, 병 고치는 은사, 위로하는 은사, 권면하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 등등 다양합니다.
한 사람에게 많은 은사가 있을 수도 있고, 한 가지 은사만 있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더 소중히 여기며 그 은사를 사용해야 합니다. 은사는 오직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또 은사는 사용하지 않으면 소멸됩니다. 돈 버는 은사를 받았으면 열심히 벌어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돈 버는 재주를 가진 사람이 목사직을 맡겠다고 나선다면 목사도 못하고 돈도 못 법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에게 주신 은사를 시시하게 생각하고 남의 은사만 부러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필요에 따라 주시기 때문에 감사하며 사용해야 합니다.
인간의 지식이 환난과 시련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령한 은사를 체험하여 영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뿌리를 내린 사람은 환경이 칠 흙같이 어둡고 캄캄하다 할지라도 흑암 중에도 빛을 바라보는 영안의 눈을 갖게 됩니다. /믿으시면 아멘/
②신앙의 견고함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은사를 받으면 우리의 신앙이 견고해집니다. 사도 바울은 어리고 연약한 성도들과 병든 성도들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어서 믿음을 견고하게 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의사가 병든 자를 고쳐서 건강하게 해 주고자 하는 심리와 같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사도 바울은 당대 최고의 학자요 철학과 율법에 박식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을 견고케 한 것은 그의 학식이 아니요 신령한 은사를 체험했기 때문에 그렇게 훌륭한 하나님의 사도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은사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신령한 은사를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이 있어야 개인이 살고,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삽니다. /믿/
여기서 다시 한번 사도 바울의 뜻이 무엇인가? 모든 성도들을 견고하게 세워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더욱더 든든하게 세워나가고자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목적이었습니다. /할/
③12절 "믿음으로 피차 위로 받기를 원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겸손한 모습을 우리가 여기서 본받을 수 있습니다. '나는 주는 사람이고, 너희는 받는 사람이다. 나는 가르쳐주는 사람이고, 너희는 배우는 사람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주장을 한다든지 권위적인 자세를 취하지 아니했습니다.
'너희가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뭐 그리 대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건너가서 너희의 믿음을 내가 더욱더 견고케 해주리라. 내가 누구냐? 이방인의 대사도 바울이 아니냐?' 이런 식으로 접근하지 아니했습니다. '여러분! 나도 역시 부족한 사람입니다. 연약한 사람입니다. 우리 서로 믿음의 교제를 통해서 피차에 서로 세워주고 위로함을 받는 귀한 역사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의미의 이야깁니다. 이 얼마나 겸손한 사람입니까?
저는 어떤 '개그맨'이 자기를 소개하면서 '알부남'이라고 하는 말을 들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 뜻을 말하는데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겉으로 보기에는 차갑게 보이지만 그 속은 너무나도 따뜻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들에게 편지를 할 때마다 ‘여러분, 부족한 저를 잊지 마시고 기억하시면서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라며 꼭 부탁을 잊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겸손한 신앙의 사람입니까?
'그토록 깊은 신앙을 가진 바울은 나 혼자 만의 신앙은 안 된다. 나도 로마에 가서 너희와 신앙의 교제를 원한다. 내가 가는 것은 너희에게 나누어주고 너희 것을 내가 받아서 피차 신앙의 교통을 인하여 안위함을 얻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은 독불장군이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이웃과의 관계, 성도와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이 교제입니다.
교회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또 교회는 믿음의 소리를 들으려 나오는 곳이요, 믿음의 대화가 통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의도가 '내가 너희들의 믿음의 소리를 듣고, 나도 너희에게 믿음의 소리를 들려주어 서로 서로 위로를 얻고, 힘을 얻자는 뜻'입니다.
믿음은 공동체입니다. 한 사람이 천을 좇고, 두 사람이 만을 좇습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우리 주님이 계십니다. 오늘 이 자리는 서로 믿음 안에서 위로해 주고, 격려해주어 피차 안위함을 받고, 피차 세워주는 아름다운 분위기가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겸손한 심정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겨주신 그 귀한 은사를 나누어줌으로써 서로 견고케 해주고 믿음의 교제를 통해서 서로 위로를 받고 안위함을 받는 귀한 역사가 날마다 계속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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