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에베소서 5:18~20)
엡 5:18-20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어떤 미국 사람이 불란서에 관광을 갔습니다. 그는 잠시 짬을 내서 불란서의 수도 파리에 있는 어느 골동품 가게에 들렀습니다. 이것저것 구경하는 가운데 진열장에 전시되어 있는 진주 목걸이 하나가 그의 눈에 띄었습니다. 오래되고 낡은 것이라서 이미 색깔은 다 바래었지만, 진주 목걸이에 장식되어 있는 장식품이 그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래서 얼마냐고 물어보았더니 500달러를 내라고 했습니다. 그는 좀 비싼 듯 했지만 장식품이 마음에 들어서 그것을 샀습니다. 그는 그것을 가지고 미국으로 왔습니다. 그리고는 한동안 자기의 보석상자에 넣어서 그대로 방치해 두었습니다.
그러다 한 번은 현찰이 좀 필요해서 그것을 보석상에 가서 팔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래된 것이라서 과연 얼마나 값을 쳐줄지 호기심도 생겼습니다. 그래서 집 근처에 있는 보석상에 가지고 갔더니, 보석상 주인은 그 진주 목걸이를 손위에 올려놓고 두꺼운 돋보기를 가지고 한참동안 감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상기된 표정으로 뜻밖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제가 20,000달러를 주겠습니다. 제게 파십시오."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500달러를 주고 샀는데 20,000달러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을 좀 가다듬기 위해서 일단 그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날 그는 그것을 가지고 꽤 알려진 골동품 가게를 찾아갔습니다. 골동품 가게의 주인도 역시 그것을 두꺼운 돋보기로 한참동안 감정을 했습니다. 손에서 놓지를 않았습니다. 자기들끼리 모여서 수군수군 거렸습니다. 드디어 결정이 끝났는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50,000달러를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이 진주 목걸이를 제게 파십시오."
그는 더 놀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솔직하게 골동품 가게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색깔이 다 바랜 진주 목걸이인데 왜 그렇게 값이 많이 나갑니까?"
그러자 골동품 가게 주인은 의외라는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아직도 모르고 계셨습니까?"
그러면서 가지고 있던 돋보기를 진주 목걸이에 들이대면서 자세히 쳐다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거기에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조세핀에게. 황제 나폴레옹으로부터."
그리고 오른편에는 나폴레옹 황제의 친필사인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가게 주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진주 목걸이의 자체만으로는 불과 몇 십 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적혀 있는 글씨와 친필사인 때문에 그렇게 값이 많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석 값보다는 거기에 적힌 글 값이 훨씬 더 비쌌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후3:3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를 가리켜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필로 쓰신 편지입니다. 그리고 엡1:13에서 바울은 우리를 가리켜서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인이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요,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자입니다. 값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소중하고 귀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렇게나 살 수가 없습니다. 값진 삶을 살아야합니다. 아무 곳에나 갈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합니다. 아무리 진주 목걸이에 황제 나폴레옹의 사인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고물상에 있으면 불과 500불짜리 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니까 엄청난 진가를 발휘하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그리스도의 편지되고,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우리가 술자리에서 술이나 마시면 되겠습니까? 우리가 흔히 쓰는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십니다. 그러나 한 잔 두 잔 마시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술이 술을 마시고, 마지막에는 술이 사람을 마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술에 취해서 술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신을 좇아서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방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편지요,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좇아서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진가가 비로소 바르게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하면서, 성령 충만한 삶의 특징이 무엇인지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서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성령 충만한 삶이 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봅니다.
1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여러분, 성령 충만한 삶의 첫번째 특징이 무엇입니까?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아닙니다. 예언하는 능력도 아닙니다. 천사의 말과 같은 방언도 아닙니다. 단순합니다. 마음 속에 새 노래, 신령한 노래, 찬송으로 충만한 마음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술 취한 사람을 보면 어떻습니까? 노래방에 가서 세상적인 노래, 방탕한 노래를 한 곡조 부르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령 충만한 사람은 그런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새 노래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신령한 노래를 부릅니다. 성령 충만한 마음 속에는 언제나 하나님을 찬미하는 노래 소리로 가득차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약 40년 전에 척 스미스(Chuck Smith)라는 젊은 목사님이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렌지카운티에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는 천막을 치고서 한20명 남짓 사람들을 모아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는 교회 이름을 갈보리 채플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표어를 정했습니다.
"성경대로 삽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살자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지식과 경험은 모두 무시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무엇을 가르쳐주는지 연구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는 매시간 이렇게 담대히 외쳤습니다.
"Welcome, everybody to the Word of God(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오십시오)!"
"Please, listen to the Word of God(하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십시오)!"
"알코올 중독자도 좋습니다. 마약 중독자라도 괜찮습니다. 부모님의 속을 썩인 자녀들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남의 지갑을 훔친 소매치기라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오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는 목사인 자기에게로 나오라고 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교회로 나오라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와서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라고 외쳤습니다. 교회가 부흥되기 시작했습니다.
1960년대 미국에는 히피족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로 극도로 자유주의를 표방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머리를 깎지 않고 덥수룩하게 길렀습니다. 슬리퍼를 신고 맨발로 다녔습니다. 통기타를 치면서 세속적이고 방탕한 노래를 불렀습니다. 또 마리화나를 피웠습니다. 아무데서나 노숙했습니다.
척 스미스 목사님과 갈보리채플의 교우들은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들은 정성을 다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긍휼과 사랑을 그들에게 베풀면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 두 사람씩 감화를 받고 교회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히피족들이 떼거리로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기존 교인들이 예배를 드리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히피족들의 몸에서는 역겨운 냄새가 났습니다. 또 맨발로 다니니까 카펫이 더러워졌습니다. 더러운 몸으로 앉았다가 일어나면 의자가 더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결정을 내려야 되었습니다.
"그들을 계속해서 받아들일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못오도록 막을 것인가?"
기도하는 가운데 교회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그들을 향해서 교회 문을 활짝 열기로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그들의 문화와 그들의 언어로 노래를 부르면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그래서 그 때 그들이 교회에 나와서 부르기 시작한 노래가 바로 가스펠송입니다.
그 때 히피족들이 많이 불렀던 가스펠송 가운데 "작은 촛불 하나가"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습니다. 그 곡의 3절에 보면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친구여 당신께 이 기쁨을 전하고 싶소
내 주는 당신의 의지할 구세주라오
산 위에 올라가서 세상에 외치니
내게 임한 주의 사랑 외치기 원하네."
그들은 본시 술 취해서 방탕한 노래를 부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감화를 받고,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 속을 지배하고 다스리며 인도할 때 그들은 변화했습니다.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령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우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는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 충만한 삶의 첫번째 특징은 새 노래, 신령한 노래, 찬양으로 마음이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성령 충만한 삶이 위로는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봅니다.
2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성령 충만한 사람은 감사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술 취한 사람은 그저 욕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서로 다투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압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범사에 감사합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모든 축복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떤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존경받는 분이셨습니다. 또 교회 장로님이셨습니다. 사회 여러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분이셨습니다. 연세가 드셔서 은퇴를 하셨습니다. 그 분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 제자는 큰 잡지사의 편집부장으로 근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스승이 살아온 길을 자기의 잡지에 싣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스승에게 자서전적인 글을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드디어 약속된 날이 이르렀습니다. 제자는 스승에게서 두둑한 원고 뭉치를 기대하면서 스승의 집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스승이 건네주는 것은 얇은 종이 한 장뿐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단 한 줄로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제자는 실망한 눈빛으로 스승을 쳐다보았습니다. 그 때 스승은 제자에게 이렇게 일러주었습니다.
"자네로부터 원고청탁을 받고 나서 내가 걸어온 길을 한 번 깊이 뒤돌아보았네. 물론 내가 교회 장로로서, 또 교수로서 여러 일을 했다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내가 마땅히 해야할 일들이었네. 그 모든 것이 깊이 생각해 보면 하나같이 하나님의 은혜였다네!"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라는 한 마디 말밖에 적을 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존경받아 마땅한 분이셨습니다. 천 마디, 만 마디, 굉장한 말로 잔뜩 늘어놓은 것보다도 더 값지고 진실한 고백을 남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그 한 분만의 고백이겠습니까? 우리의 지나간 날을 돌이켜보기를 원합니다. 내가 잘나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범사에 항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여 감사합니다」라는 제목의 작자 미상의 시가 있습니다. 제가 잠시 소개해 드립니다.
"나는 오늘 버스 안에서 금발머리의 아름다운 소녀를 보았습니다. 그 소녀는 매우 명랑해 보였으며, 내가 만일 그 소녀처럼 예뻐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보면서 나는 그 소녀를 부러워하였습니다.
소녀가 버스에서 내리려고 갑자기 일어나 섰을 때 나는 그녀가 통로로 다리를 심히 절면서 걸어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소녀는 한쪽 다리밖에 없어 목발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녀는 웃음을 잃지 않고 걸어갔습니다.
오 주여, 부질없는 생각을 했던 저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에게는 튼튼한 두 다리가 있사오니 주여 감사합니다.
그 후 나는 과자를 파는 소년을 보았습니다. 그 소년은 무척 귀여워 보였습니다. 나는 소년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소년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선생님은 무엇이든지 볼 수 있지요? 저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장님입니다."
오 주여, 부질없는 행동을 했던 저를 용서해 주옵소서. 저에게 볼 수 있는 두 눈이 있사오니 주여, 감사합니다.
또 나는 파란 눈동자의 어린 아이를 만났습니다. 그는 우두커니 혼자 서서 다른 아이들이 노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그는 마치 운동할 줄 모르는 아이처럼 보였습니다. 잠시 동안 지켜보았던 나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얘! 너는 왜 다른 아이들과 함께 놀지 않니?"
그러나 소년은 한 마디 말도 없이 그냥 앞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그 애가 귀머거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 주여, 부질없이 행동했던 저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에게는 들을 수 있는 두 귀가 있사오니 주여 감사합니다. 오 주여, 이 몸은 복받은 자이오니 주여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해 본 적이 있습니까? 두 다리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렇게 건강한 몸으로 앉아서 하나님께 예배 드릴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해 본 적이 있습니까?
술 취한 사람은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저 불평하고, 원망하고, 남을 탓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사람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범사에 감사합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드리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두번째 특징입니다.
셋째로, 성령 충만한 삶이 우리의 이웃을 향해서는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봅니다.
2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술 취한 사람은 괜히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지기 싫어하고 싸우기를 좋아합니다. 무조건 자기가 옳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간밤에 3차까지 술을 마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먼저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셨습니다. 그러다가 배가 고파서 중국집으로 가 고량주를 또 마셨습니다. 집에 가는 길에는 단란주점에 들러서 맥주를 마셨습니다. 소주는 25도, 고량주는 45도, 맥주는 7도입니다. 그러면 그가 마신 것이 도합 몇 도가 되는 것입니까? 복잡하게 계산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정답은 졸도입니다. 독한 술을 그렇듯 섞어서 마셨으니까 몸이 견뎌낼 수가 없습니다. 이성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지 못하고, 그저 고함을 지르면서 이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질 줄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습니다. 다른 사람을 인정할 줄 압니다. 이해할 줄 압니다. 남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세우기를 좋아합니다. 그것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높이는 것입니다.
16세기 폴란드의 유명한 천문학자였던 코페르니쿠스는 갈릴레오보다도 100년 앞서서 지동설을 주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지동설을 주장했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는 천재 과학자였습니다. 뿐만 아니고 믿음도 독실했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죽을 때 자기 묘비명을 스스로 기록해서 남겨 놓았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오, 주여! 저는 바울에게 주셨던 특권을 구하지 않습니다. 저는 베드로에게 주셨던 특별한 능력도 구하지 않습니다. 오, 주여! 저는 단지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옆에 있는 강도에게 베푸셨던 긍휼과 은혜만 구할 뿐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저에게 그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것이 그 한 사람만의 고백이겠습니까? 우리의 삶을 한 번 돌이켜 보기를 바랍니다. 강도와 같은 삶을 살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받은 사랑은 엄청나건만, 사랑을 베풀지 못했습니다. 사랑 받기만을 원했습니다. 주기보다는 빼앗기만을 원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나의 부족을 깨닫고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인도의 수녀 테레사는 늘 이런 말을 즐겨했습니다.
"I am nothing(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197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할 때, 그는 연설 가운데서도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I am nothing(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음을 비우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언제나 미소 띤 얼굴로 웃으면서 대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테레사에게도 도무지 그 앞에서는 웃을 수 없는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마다 테레사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 사람 앞에서도 제가 웃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주시기 바랍니다. 주여, 저를 도와주셔서 저 사람 앞에서도 제가 미소를 띄게 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나서 억지로라도 그 사람 앞에서 웃으면서 모든 일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다른 일들은 쉬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더 테레사는 자기를 돕는 조수를 뽑을 때도 언제나 세 가지 조건의 기준에서 뽑았다고 합니다. 첫째, 잘 웃는 사람입니다. 둘째, 잘 먹는 사람입니다. 셋째, 어디에서나 잠을 잘 자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만이 자기도 행복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도 편하게 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 어려운 시련이 있을 때 잘 견딜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잘 위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언제나 나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인정하며, 다른 사람을 기꺼이 존중할 줄 아는 우리들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 충만한 삶에 대해서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령 충만한 삶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첫째로, 내적으로는 찬송하는 마음으로 나타납니다. 둘째로, 위로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로 나타납니다. 셋째로, 이웃들 간에는 피차에 복종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늘 매순간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언제나 우리의 마음 속에 새 노래, 신령한 노래로 가득차고, 늘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로 충만하며, 우리 자신들도 행복하며, 우리가 대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우리의 삶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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