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내 이웃을 사랑하는 이들

성령충만땅에천국 2016. 1. 18. 11:59

내 이웃을 사랑하는 이들|성경 말씀 묵상

은혜 | 조회 16 |추천 0 |2016.01.18. 06:52 http://cafe.daum.net/seungjaeoh/J75F/157 

 1월의 말씀 산책

   세상에는 내 이웃을 사랑하는 이들이 많다. 지난 12월 크리스마스 계절에 구세군자선냄비에 걷힌 모금액은 71억으로 예상액 70억을 넘었다고 한다. 1970년대에는 자선냄비에서 돈을 훔쳐 가는 사람이 있어 잠복근무를 하는 일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래도 지금은 부요한 나라가 되어 이웃 사랑하는 마음이 이렇게 많이 확산 된 것은 기쁜 일이다. 이 때를 기다려 아껴서 모은 100만 원 권을 넣는 80대 할머니가 있다니 얼마나 훈훈한 이야기인가? 이들은 게으르고 안일한 삶을 역행해서 자기를 희생하여 남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다. 혹 길거리에 떨고 서서 종을 흔들고 있는 모금원을 보고 푼돈을 넣고 가는 거리의 행인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만을 사랑하지 않고 내 이웃을 사랑하는 이들이 있다는 증거다.


이런 조용한 종교적인 자비에 의존하는 이웃 사랑보다 조금 더 적극적인 이웃 사랑을 원하는 사람도 있다. 1001마리의 소 떼를 이끌고 이북에 넘어가 헐벗은 이북 동포를 사랑하겠다는 정주영 회장 같은 분이다. 그는 19986월에 500마리 10월에 501마리를 끌고 정주영 소떼 방북을 했다.

1895년 한국선교사로 와서 활동한 배유지 목사의 외손자 인세빈(Stephen Linton)1995년 평양에서 학교를 다닌 미국인 졸업생 124명에게 주제 연설을 하는 가운데 북한을 돕자고 배유지 내한 100주년 기념 재단을 제안 했는데 그것이 열매를 맺어 지금까지 20년간 꾸준히 이북에 결핵병원을 세워 돕고 있다.

한편 내 이웃을 사랑하는 이들의 과열된 이타주의 현상도 볼 수 있다. 사회는 날이 갈수록 불의가 만연하고, 빈부의 격차는 심해지며, 윤리와 도덕은 땅에 떨어지고 있다. 이제는 자기구원에 만족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먼저 사회구원이 있어야 한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오히려 분쟁하게 하려 한다.”고 말하며 예수님도 눈에 보이는 거짓 화평을 싫어하셨다. 무엇 때문에 인간을 구원하셨는가? 누룩이 되어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함이 아닌가? 하고 기독교인들은 불의에 항거하여 세상에 뛰어들어야한다고 분연히 일어서는 이타주의자들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고 인권이 유린당하는 이웃을 보면 분연히 일어선다. 대기업이 임금을 수탈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임금 협상을 하려고 머리띠를 두르고, 때로는 금식하고 분신자살까지 감행한다. 노숙자를 위해 길거리에 나서며 독재정권에 맞서 몸을 던진다. 이런 종교단체로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있다. 또 기독교적인 이론을 뒷받침하는 민중 신학자들이 있다. 촛불집회를 하고, 연좌데모를 하고, 일인시위를 하고, 분신자살하는 사람들은 개인구원에 만족한 이기주의자들이 아니고 불의에 맞서 사회를 바로잡아보자는 이타주의자들의 분노의 표출이다. 그들도 입고, 먹고, 자야할 가족을 거느린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가족보다도 이웃 사랑이 먼저다. ·불신을 가리지 않고 그들은 내 이웃을 사랑하는 이들이다.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도 문제이지만 가족을 돌보지 않고 부의를 위해 몸을 던지는 과격한 이타주의도 문제이다. 기독교의 본질을 떠난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이 양 극단의 균형을 이룰 수는 없는 것일까? 여기서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인 기독교인의 역할은 없는 것일까? 세상()이 기독교인의 마음을 주장하고 있는 동안은 내 자신만 사랑하는 이기적인 이들, 즉 자기구원에 만족하고 안일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을 없앨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이념과 완벽하지 못한 체재로 생기는 독재적인 권력과 경제적 불평등으로 양극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국가나 종교가 막을 수 없는 이상 극단적인 이타주의 또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은 이상 영원한 안식은 있을 수 없다. 다만 기독교인이 예수님이 오신 뜻을 제대로 알고 세상과 영합하지 않는 경건한 삶을 살 수만 있으면 극단적인 이기주의는 사라지고 극단적인 이타주의도 줄어들 것이다.

 

겸손한 일은 그것이 하나님께 드려 질 때 거룩한 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