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제3부두

성령충만땅에천국 2016. 2. 3. 12:04

제3부두|성경 말씀 묵상

은혜 | 조회 21 |추천 0 |2016.02.01. 16:50 http://cafe.daum.net/seungjaeoh/J75F/159 

2월의 말씀 산책

    나는 대학교 2학년 1학기 말에 보병학교 제1기 특별군사 훈련생으로 입교한 일이 있다. 이것은 4년제 대학의 졸업생에게 최초로 실시한 특별군사훈련이었는데 나도 2년제 초급대학의 졸업생이었기 때문에 소집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예비역으로 편입된 나는 졸업을 하자 바로 소집영장이 떨어졌다. 중등학교 교사를 하고 싶어서 들어온 학교인데 말하자면 재수가 없게 수학 교사 자격증은 받았지만 군에 입대해야 했다. 두 가지 선택이 있었는데 하나는 우리는 전반기 간부후보생 훈련을 마쳤으니 후반기 훈련을 마치고 장교로 입대하든지 아니면 바로 사병으로 입대하는 일이었다. 장교로 입대한 사람들은 얼마동안은 편한 군대 생활을 했지만 육사생들에게 많이 푸대접을 받았고 또 진급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나는 사병을 지원했었다.

    논산 훈련소에서 부대 배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거기서 나는 일 개월은 더 기다렸을 것이다. ·후방 배치 명령이 떨어지면 전방으로 배치된 자가 바로 집으로 연락해서 돈과 고급 장성의 힘으로 전·후방 배치를 바꾸어 놓았다. 이런 엎치락뒤치락을 몇 번 겪은 뒤 구경만 하던 나는 후방으로 배치되고 다시 부산의 제3항만사령부로 발령이 났다. 당시 그곳은 후방 중에서도 가장 나쁜 곳이어서 떠나기까지 불쌍하다고 불침번을 면제 받기도 했다. 3항만사령부는 지금의 국군수송사령부의 모체로 1954년 제2관구 소속으로 부산에 창설된 부대였다. 6·25 사변이 생기자 미국에서 보내온 군수물자를 받아 병참, 병기, 의무기지 사령부 등에 보내 일선으로 보내기 위한 업무를 수행하는 곳이었다. 물자가 부산항에 도착하면 한국 측 인수자가 나가 미군 측과 함께 인수인계를 하는 장부(tally)를 만들어 상호 서명하고 교환해야 인수인계 업무가 끝나는 것인데 당시는 대학을 나온 사병들이 없어 영어를 그리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너무 걸려 하물을 수송해 온 배는 먼 바다에 떠서 항구에 들어오지 못해 기다려야 했고 일선에 보낼 군수 물자는 너무 급해 미군 측에서 쓴 탤리만 일방적으로 받고 물자를 받아 일선에 보냈기 때문에 지금까지 끝내지 못한 인수인계 서류 작업을 하기 위해 대학 졸업자가 많이 필요한 곳이었다. 그런데 이곳이 어렵다는 것은 지금도 약속된 하물이 들어오고 있어 주야간 작업을 하며 부두에 나가 하역작업을 하는 배 앞에 서서 체커(checker; 검사원)로 텔리를 작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사령부에 도착했던 우리는 일렬로 정렬해서 사령관 특별보좌관의 훈시를 받아야 했다. 그는 우리더러 영어 할 수 있는 사람은 손을 들라는 것이었다. 대학 졸업생으로 영어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모두들 눈치를 보며 손들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나는 무모하게 손을 들었다. 고생을 하더라도 군에서 영어 공부라도 하고 떠나면 뜻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과는 나와 함께 손을 들었던 사람은 사령관실 소속으로 남게 되었다. 그 때 우리의 사명은 부두에 나가 군수 물자를 훔쳐가는 사람을 적발해서 직접 부관에게 보고하는 것이었다. 부두에서는 계속 도난 사고가 일어나는데 감독관이나 검수원에게서 보고가 안 들어오고 중도에 무마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일조점호, 조회하기식, 일석점호, 변소청소, 내무사열 등이 없이 밤낮 없이 외출하는 편한 군대생활이었다. 그곳에서 내가 주로 나갔던 근무지는 3부두였다. 이것은 또한 내가 제대하고 신춘문예에 투고하여 당선된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다. 내가 어떻게 소설에 당선되어 작가가 될 수 있었는가? 나는 국문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국문과를 기웃거리며 소설창작법이나 현대문학 이론 등을 청강한 일도 없다. 내가 3부두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쓴 것뿐인데 당선이 된 것이다. 당시 심사 위원은 황순원, 박화성, 이무영 선생이었다. 심사평은 “<3부두>가 당선작으로서 뚜렷한 새것을 갖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만한 문장력과 저력이 있다면 충분히 자기 길을 개척해 나갈 수 있으리라는 데 합의를 보았다. 우리는 완전무결한 작품도 좋지만 대성할 수 있는 작가를 찾아내는 것도 우리의 임무의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이었다. 나는 당선 뒤에도 외로웠다. 동창도 친구도 문학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발표할 지면도 없었다. 현대문학사에 찾아가 편집을 맡고 있는 박재삼 시인을 만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19601월 첫 작품 解雇를 현대문학에 발표했을 때 백철 선생께서 동아일보에 다시 인간조건에 실망이라는 주제로 내 작품을 평해 준 것이다. 당시에는 각종 문예지에 발표한 작품을 ‘1월의 작품 베스트순위등의 타이틀로 일간지에 소개해 주고 있었다. 그 덕으로 현대문학에는 가끔 소설을 올렸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너무 빨리 광야로 불러서 시련을 받게 하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