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이 형통한 자가 된 비결! (창 39:1-5)
요셉은 성경에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가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을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그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 인류에게 구원의 길이 열리는 것처럼, 요셉 한 사람의 고난을 통해서 히브리민족에게 7년 흉년 때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둘째, 성경에 기록된 분량 면에서 엄청납니다. 요셉에 관한 내용이 창37-50장까지 나옵니다. 야베스의 기도로 유명한 야베스의 경우 역대상 4장에서 단 두절 나온 것과 비교한다면 엄청난 분량입니다. 그만큼 요셉은 성경에서 중요한 인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요셉의 모습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방법과 힌트를 얻게 됩니다. 요셉은 야곱의 12아들 중 11번째 아들입니다. 야곱에게는 네 아내가 있었습니다. 둘은 외삼촌의 딸이고 둘은 두 아내의 몸종 출신입니다.
그중 라헬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 라헬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요셉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야곱은 요셉에게만 어려서부터 채색 옷을 입히며 그를 많이 사랑했습니다. 그런 야곱의 편애는 나머지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셉을 보면서 인생의 향로를 결정짓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합니다. 여기 보면 인생의 미래와 장래와 내일과 내 운명이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아주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 요셉의 운명을 주관하시는 배후의 하나님이 바로 지금도 나의 운명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셉의 하나님은 곧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의 미래, 장래, 운명을 고민하시는 하나님은 곧 지금 나의 운명을 위해서도 고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
▶그러면 요셉의 운명에 '하나님은 어떻게 개입하시고 섭리하시고 액션을 취하시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들에서 양을 치던 형제들에게 야곱은 요셉을 불러 심부름을 보냅니다. 평소 미워하던 형제들이 아버지 심부름을 온 어린 요셉을 보는 순간 증오심이 발동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어린 동생 요셉을 애굽의 장사꾼들에게 팔아버립니다. 아버지에게는 들에서 맹수에게 찢겨져 죽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리고 야곱은 그 후 요셉을 애굽에서 만나기까지 20년 동안 비통한 마음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야곱도 그의 형인 에서를 속여서 평생 눈물로 살게 했습니다. 눈이 어두운 아버지를 속여서 그 아버지가 몸을 떨 정도로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야곱이 심은 그대로 값을 되돌려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심은 데로 거두며 살게 됩니다.
애굽에 팔려간 요셉의 모습이 오늘 읽은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갈 때 나이가 17살 되던 해로 당시 애굽 왕 바로의 경호실장 이었던 보디발이라는 사람의 집의 종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왜 하필 왕의 경호실장 보디발의 집으로 들어가게 하셨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왜 일까요? 화살은 쏘는 사람의 손에 의해 방향과 거리와 목적지가 결정됩니다. 인간의 미래와 운명에 하나님이 개입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인생의 행로는 그 하나님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지금 하나님이 요셉을 보디발의 집으로 보낸 것은 장차 애굽의 치리 자로 덕을 쌓고 안목을 키우기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아멘!/ 하나님은 이렇게 주도면밀하십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애굽의 왕 시위대장의 집으로 팔려가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 적인 섭리라고 보아야 합니다. /할/
그 때부터 요셉은 30살이 될 때까지 약 13년을 종살이를 하고, 억울한 누명으로 옥살이를 하는 고난의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 30이 되어서 애굽 왕 바로의 꿈을 해석하게 되어 갑자기 총리로 발탁이 됩니다.
총리가 된 요셉은 7년 풍년 동안 곡식을 잘 준비해서 풍년 이후에 있게 될 7년 흉년을 잘 대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고향에 살던 가족들, 아버지와 자기를 상인에게 팔아버린 형들까지 애굽 고센 땅으로 이민을 하도록 도와주어 하나님의 계획대로 히브리민족이 애굽에서 살수 있게 합니다. 이것이 요셉의 인생에서 중요한 줄거리입니다.
본문은 요셉의 인생 가운데 가장 어려운 시기였던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의 종살이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치므로 당했던 옥살이에 대한 내용입니다. 요셉을 한 번 조명해 보고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할/
1. 먼저 형통이 무엇인가?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 단어는 '형통'입니다. 2절에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3절에는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23절에는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모든 일에 형통케 하신 것입니다.
①먼저 형통이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자라크'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장애물이 있는 곳을 뛰어 넘다 혹은 건너가다'라는 뜻입니다. 또는 '번영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천주교와 공동으로 번역한 공동 번역에는 형통에 대해서 '앞길이 열리다, 잘나가다'는 의미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형통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처음에는 안되다가도 잘나가고 앞길이 확 열리고 장애물이 있으나 건너가고 넘어가고 결국 번영한다는 말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욥이라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어려운 고비를 겪었습니까? 그러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정말 잘 나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번영한 사람입니다. 즉 욥의 형통입니다. 다니엘이라고 하는 사람도 왕족 출신이었으나 하루아침에 몰락하여 바벨론 포로가 됩니다. 바벨론 왕의 눈에 들어 바벨론 나라 총리가 되었습니다. 때로는 사자 굴속에 던짐 받아 사자의 밥으로 주어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잘 뛰어 넘고 살아남아 잘 나가고 앞길이 열려서 형통했습니다. 이것을 다니엘의 형통이라고 합니다.
②형통이란 말의 또 가른 히브리어는 '찰레아흐'입니다. 이 말은 '번성'이란 뜻입니다. 영어성경에는 '번성한, 성공적'이란 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훗날 그의 형들을 만나 하는 얘기를 보세요.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45:8)고 합니다. 이것이 요셉이 형통한 이유입니다. 자신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③'형통'이란 말의 또 다른 히브리어는 '사칼'인데 이 말은 '번영했다. 성공했다'라는 뜻입니다. 형통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어떤 일이 내 마음과 내 생각대로 잘 되어져 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형통은 '어떤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잘 되어져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이 나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
형통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불통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는 것마다 불경기, 불황, 불통하게 되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받아서 다 형통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잘 되게 만들어 주시고 성공적인 삶을 살게 하시고 축복을 받게 하시고 번창하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④형통한 자의 비결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입니다. 2절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3절에도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요셉의 형통은 철저하게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형통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힘으로 형통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형통한 자가 되어'라고 합니다.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형통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십니다.
요셉의 생애 가운데 본문에서 처음으로 '함께'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아버지의 품에 그늘에 있을 때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아버지가 보이지 않자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이때 나타난 단어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라는 단어가 등장하게 됩니다. /할/
'함께'라는 단어가 신구약 성경에 144회 정도 등장합니다. 신비한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탄생하게 될 것인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를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니라' 성경은 얘기하고 있습니다. 전능한 하나님이 죄 많은 인간과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시간 속에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불가능이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과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영생과 천국이 지옥과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함께'라는 단어입니다. /아멘!/
⑤3절에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여기에서 '본다'는 단어가 2번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누가 보았습니까? 이방인이 보았습니다. 뭘 보았습니까? 요셉을 본 것입니다. '어 저 사람 뒤에는 누군가가 있어. 저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야' 이방인 보디발이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계심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가는 곳곳마다 형통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고 는 것입니다.
보았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막연히 느낀 것이 아닙니다. 어림짐작한 것이 아닙니다. 소문들은 것이 아닙니다. 확실히 본 것입니다. 요셉과 함께 하는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그때 요셉이 하는 일마다 잘되고 더 나은 자리로 고난에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한 걸음 더 전진하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할/
어느 정도 확실하게 보았느냐? 4절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신임을 얻습니다. 은혜를 입었다고 본문은 얘기하고 있습니다. 가정 총무가 된 것입니다. 가정 총무는 집안을 다스리는 종들 가운데 책임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젊은 노예가 한 명 왔습니다. 일을 맡겨 놓으면 정확하게 일을 합니다. 장사를 시키면 이윤을 많이 남깁니다. 재산을 맡기면 어디에 투자합니다. 예견능력이 탁월합니다. 실수하는 법이 없습니다.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집 재산 몽땅 다 요셉한테 맡기자. 요셉 네가 맡아라. 가정 총무가 된 것입니다. /할/
23절에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요셉은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하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갇힌 것도 형통한 일입니다. /할/
⑥형통한 자의 범위는 '범사'입니다. 3절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고 합니다. 범사에 형통합니다. 형통하는 사람은 범사가 잘 됩니다. 범사가 아니면 형통이 아니지요. 부분적으로 형통하면 형통이 아니지요. 신명기의 주제는 '여호와께서 너의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입니다. 또 다른 말로는 '손으로 하는 범사에'라고 합니다. 어떤 것은 복을 주시고, 어떤 것은 화를 주시고, 어떤 것은 형통하게 하시고, 어떤 것은 불통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전하신 분이십니다. 모든 것을 확실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할/
저는 찬송가 434장은 부를수록 힘이 납니다. '나의 갈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만사 형통합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형통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바꾸면 성공입니다. 요셉이 형통했다는 말은 요셉이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세웠거나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을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보면 사회적으로는 성공했으나 가정적인 면에는 실패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회적인 성공은 했으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아주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또 사회적으로는 성공했으나 신앙적인 면에서는 처절한 실패 속에서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성경에서 잘못된 성공의 예를 눅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입니다. 그는 많은 돈을 모았고, 창고를 여러 개 지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양식이 풍족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그는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에게 '어리석은 부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의 주인공 요셉의 성공은 그런 사람들의 성공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는 사회적 성공만이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 자기와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물질과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있어서까지 성공한 사람으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공의 모델이 되는 사람입니다. /아멘!/
2. 요셉의 형통의 비결이 무엇인가?
①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공했기 때문에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실패한다면 그 사람은 성공한 사람 같으나 사실은 실패한 사람입니다. 요셉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공했다는 증거는 하나님께서 요셉과 동행했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럼 왜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을까요?
⑴그 이유는 요셉의 삶에는 매사가 하나님이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First God' 이것이 요셉의 삶의 중심입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있었습니다. 그때 보디발의 아내의 집요한 유혹을 받습니다. 노예로서 주인의 집요한 요구를 거절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당시 노예는 생명, 인생, 삶이 모두 주인의 것입니다. 노예는 '예'만 있고, '아니요'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때 주인의 요구를 거절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거절입니다. 생사여탈권이 그 주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 요구를 과감하게 뿌리칩니다. 그 거절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9절에 '이것은 하나님께 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이것은 신앙인에게는 삶의 중심의 뼈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결국 감옥에 갑니다. 감옥에 있을 때 왕의 신하 둘이 들어왔습니다. 그 두 신하가 밤에 꿈을 꾸고 근심에 차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왜 그러냐고 묻자 꿈을 꾸었는데 해석할 수가 없다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때 요셉이 40: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꿈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냐' 그럽니다. 사실 이렇게 생각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꿈은 하나님께서 해석해 주실 것이니 말해 보라' 그 말은 요셉이 하나님을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사실 요셉은 꿈의 사람입니다. 결국 요셉은 꿈 때문에 고난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꿈 때문에 형들로부터 미움도 받고 팔려가서 노예가 되고 종살이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요셉의 생각 속에는 꿈에 대한 환상이나 기대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꿈들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꿈들이라는 것을 요셉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꿈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냐'고 하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꿈은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꿈을 꾸라고 말합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도 말합니다.
▶볼펜의 대명사로 알려진 모나미 153볼펜의 유래가 있습니다. 1963년 5월 1일에 탄생한 볼펜입니다. 볼펜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도 기술도 없었던 상태에서 벌어진 기적입니다. 좋은 필기도구를 만드는 꿈을 가지고 있었던 송삼석 회장 이야기입니다.
그는 꿈을 가지고 잘 해보려고 노력하였지만 번번이 실패하였습니다. 도산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산 기도를 하러 산에 올라갔습니다. 기도하는 데 회개의 영이 임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진 것이 너무 많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세 가지를 회개하면서 기도했습니다. ⑴주일성수를 하지 않았던 것을 회개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이제부터 주일 성수 하겠습니다. ⑵돈을 많이 벌고도 십일조를 하지 않은 것을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떼어먹었습니다. 이제부터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 ⑶새벽기도하지 않은 것을 회개했습니다. '내가 새벽마다 주님 앞에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했습니다. 이제 새벽기도를 하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펴 읽었는데 요21장에 '베드로가 예수님이 지시한 곳으로 그물을 던졌더니 153마리의 고기를 잡았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말씀이 레마로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모나미 153'이라는 볼펜을 만들겠습니다. 하나님, 이 볼펜이 모든 사람의 손, 아니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사람의 손에 다 들려지기 원합니다.' 기도하고 난 후 그는 목표를 크게 세웠습니다. 세계 인구가 당시 50억이었습니다.
'50억 개 팔리게 하옵소서!' 망해가던 회사가 볼펜 50억 자루를 팔았습니다. 모나미 볼펜은 이렇게 탄생되었습니다. 꿈은 그 사람을 기적의 주인공으로 만듭니다.
그런데 그 꿈이 이루어지기까지는 그냥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요셉처럼 고난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결국 요셉은 그 꿈 때문에 바로를 만납니다.
얼마 후에 바로 왕이 꿈을 꾸고 번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감옥에서 꿈을 꾸었던 간수가 요셉을 추천하여 바로 왕에게로 데리고 갑니다. 요셉을 본 바로 왕이 요셉에게 '너는 꿈을 잘 해석한다는데 할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요셉은 41:16절에서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대답을 주실 것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립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내가 해석하리이다'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제일주의의 고백입니다. 이 믿음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요셉은 먼저 바로의 잊어버린 꿈을 기억해 내고 그 꿈을 해석합니다. 그러자 바로가 무릎을 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꿈은 왕이 꾸었는데 그 꿈을 잊었습니다. 그런데 그 잊은 꿈을 요셉이 기억해내고 해석합니다. 그때 바로 왕은 요셉에게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네 명령에 복종하리라, 나는 너보다 높은 것이 이 왕좌 뿐이라'고 말합니다. 왕이 반지를 빼서 요셉의 손에 끼워 주었습니다. 요셉을 왕의 수레에 태워 백성 앞에서 사열을 받게 합니다. 나라의 모든 일을 요셉에게 다 맡겼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요셉에게 복종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요셉은 어느 날 죄수와 노예에서 한 나라의 총리가 됩니다, 꿈 때문입니다. /할/
꿈은 이렇게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꿈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면 반드시 고난의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꿈 때문에 상상도 못한 나락으로 추락했는데 어느 날 그 꿈 때문에 요셉은 한 나라의 총리로 올라갑니다. 마침내 요셉은 꿈대로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꿈을 가지라, 꿈을 꾸라고 말합니다. /할/
요셉은 매사에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았습니다. '신전 의식'속에 살았습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잠3:6절에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아멘!/
⑵'First God' 이것이 요셉의 삶의 중심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은 '바른 예배자의 삶'입니다. 우리 모두 예배에 목숨을 거십시다. 예배에 모든 우선권을 두십시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우선 하십시다. 예배는 신앙인들의 생명 그 자체이고 신앙인들의 목적입니다. 바른 예배자가 되십시다.
눅18:9-14절을 보면 두 예배자가 나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요, 다른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굉장한 기도를 합니다. 반면에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기도를 합니다.
두 예배 자에겐 공통점이 있습니다. ⑴둘 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립니다. ⑵둘 다 의에 관심이 있습니다. ⑶각각 자기를 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우러러 보면서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성찰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볼 때 차이점이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자기의 의를 내세웁니다. 자기가 잘난 것을 자랑하며 자기의 의를 내세우다가 마침내 하나님께 외면을 당합니다. 그의 예배는 실제로는 겉모습뿐이었습니다. 끝내 그는 참 예배 없이 성전을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기의 의를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하나님!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죄인입니다. 하면서 울부짖던 그는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고 기쁜 마음으로 성전을 나섭니다.
▶예배의 궁극적인 관심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안에서 나를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용서받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예배는 실패했습니다. 그 원인은 자기중심적인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하나님을 못보고 이웃도 보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자기가 낫고 똑바른 존재로 구별해 놓고 있고 자기만 의롭고 자기만 진실하다고 소리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미 무너져버린 상태입니다.
⑶'First God' 이것이 요셉의 삶의 중심입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합니까?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사람입니다. 요셉은 기도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일생동안 계속해서 하나님의 비밀들을 보여주셨습니다. 여러 사람이 꿈을 구고 해석하지 못해서 어려울 때 그는 누구도 모르는 비밀을 알아내고 해몽을 해주고 그대로 이루어지는 일들이 흔했습니다. 그가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을 알 수 있게 된 비결은 렘33:3절에 나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할/
기도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시간입니다. 교제하는 시간 대화하는 시간입니다. 가정에서 가족들 간의 대화가 없이 가족들과의 관계에 성공할 수 없는 것처럼 신앙생활도 하나님과의 대화가 없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성공할 수 없습니다.
마7:7-9절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할/
②자기와의 관계에 성공했기 때문에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⑴신앙생활은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자기 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보통 상처가 많은 사람들은 자기와의 관계가 잘 안됩니다. 자기와의 관계가 안 된 사람들의 특징은 열등감이나 교만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는 수많은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는 환경을 통과했지만 그에게서는 열등감도 교만함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요셉에게는 건강한 자아상이 있었습니다. 건강한 자아상을 갖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 속에서 살아도 건강한 자아상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불행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 있어도 건강한 자아상을 가진 사람은 행복합니다.
목표의식이 분명하면 장애물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상처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자꾸만 환경을 탓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조명이 어떻고, 책상이 어떻고... 공부에 대한 열정이 부족해서 그런 것입니다. 열정이 넘치면 집중력이 생기고 집중하면 조명도, 책상도, 어떤 환경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가치를 주안에서 인정하십시오. 내가 가진 능력이나 환경이 나를 판단하는 기준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인간적인 장점들이 나를 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고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할/
⑵그의 무기는 성실함에 있었습니다. 농부는 열심히 심어야 하고, 운동선수는 열심히 연습해야 하고, 사업가는 열심히 투자해야 합니다. 요셉이 그 꿈을 이루는 데 가장 큰 투자는 성실이었습니다. 어느 곳에 가든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불평하지 않고, 원만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디발 그 주인이 종 요셉에게 모든 재산을 다 맡길 정도로 성실했습니다. 그 붐만 아니라 또 감옥살이 할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1-22절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여기서 눈에 뜨이는 단어가 셋 보입니다.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에'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요셉의 재산은 오직 성실 하나였습니다. 그는 땅 한 평이 없었습니다. 재산 하나 없었습니다. 배운 것도 물론 없었습니다. 아는 사람도 하나도 없었습니다. 요셉의 재산은 오직 하나 '성실'이었습니다.
이게 중요한 일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핑계로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불성실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절대 큰일을 못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자기의 일에 성실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국사에 있어서 적들이 흠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성실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그의 성실함을 쓰신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믿음 하나만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가장 중요하고 기본이지만 믿음이 전제된 상태에서 내게 맡겨진 일들을 성실함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아멘!/
▶불쌍한 유대인이 이스라엘에서 살기 힘들어 무조건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는 영어를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습니다. 마침 유대인 회당에서 관리인을 모집한다는 소리를 듣고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영어를 전혀 못해 퇴짜를 맞았습니다. 그는 취직을 포기하고 길거리에서 행상을 시작했습니다. 워낙 열심히 일한 그는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은행에 대출을 요청했습니다. 재산이 많은 것을 안 은행에서는 대출을 허락하면서 사인하라고 서류를 내밀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어에 까막눈이었습니다. 은행원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영어를 읽지도 쓰지도 못 하면서 이렇게 큰 성공을 하였군요. 만일 영어를 읽을 줄 알고 쓸 줄 알았으면 무엇이 되었겠습니까?' 그가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영어를 할 줄 알았으면 회당 관리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걸 못하는 바람에 성실하게 행상을 해 이렇게 돈을 많이 벌었지요' 성실이 재산입니다.
▶이태백이라는 사람이 노년에 가서 의기 소침해서 시골로 돌아다니면서 소일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산중 오두막집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는데 주인 노인이 일찍 일어나서 숫돌에 무엇인가 열심히 갈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보니까 큰 쇠절구를 숫돌에 열심히 갈고 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무엇 하려고 그렇게 열심히 갈고 있습니까?' 그랬더니 노인이 대답합니다. '예, 바늘을 만들기 위해서 갈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 큰 쇠절구를 가지고 바늘을 만들기 위해서 다 늙은 노인이 매일같이 열심히 갈고 있습니다.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어느 세월에 그 큰 절구가 갈아져서 바늘이 되겠습니까? 그렇지만 그 노인은 열심히 성실하게 갈고 있습니다.
그 모습에 이태백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고는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붓을 잡은 것이 계기가 되어 그렇게 유명한 문필가가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할/
③타인과의 관계에 성공했기 때문에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대인관계를 잘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요셉도 그랬습니다. 요셉을 특히 미워했던 사람들은 가장 가까운 요셉의 형들입니다. 요셉에게도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성경 적인 입장에서 보면 대인관계에 성공했던 사람입니다.
대인관계에는 거리가 있습니다. 가까이 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가까이 한다고 모두 다 동일하게 가까이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주 가까워야 할 사람이 있고, 적당한 거리에서 가까이 지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멀리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가까이 해야 할 사람을 멀리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멀리해야 할 사람을 가까이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대인관계를 잘 하는 사람은 상대에 따라서 가장 합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사람입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가까이 해야 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그녀를 동침할 만큼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아는 대로 적당한 거리를 두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대인관계는 원수와의 관계에서 빛을 발합니다. 형들은 요셉을 상인들에게 팔았습니다. 그 결과 요셉은 13년의 세월을 종살이와 옥살이로 죽도록 고생을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너무나 억울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서 요셉과 형들의 관계가 역전 되었습니다. 요셉은 총리가 되었고 형들은 요셉에게 양식을 사로 왔습니다. 요셉에게는 충분히 원수를 갚은 능력이 있습니다. 원수를 갚을 기회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원수를 갚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랑의 눈물을 흘렸고 형들이 살 수 있는 길을 제공합니다.
창45:5절에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는 세상의 이치와는 너무나 다른 반응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축복하라는 성경 적인 반응, 복음 적인 반응입니다. 요셉 당시에는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축복하라는 말씀이 기록되기 전이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던 요셉은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고 축복하며 대인관계에 성공했습니다.
우리가 맺는 대인관계는 어떻습니까? 본능을 따라, 혹은 이익을 따라 맺는 관계는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주고받는 식의 대인관계는 아닙니까? 말씀을 따라 가십시오. 성경을 따라가십시오. /할/
④물질과의 관계에 성공했기 때문에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물질관계에 성공하는 것은 많은 돈을 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바르게 벌고 바르게 관리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셉은 남의 집에서 총무 역할을 하면서 그 일을 잘 해냈습니다. 주인 보디발은 요셉을 믿었고 그에게 모든 재산을 맡겼습니다.
물질관계에서 성공하려면 자신의 위치를 잘 알아야 합니다. 물질에 있어서 사람은 청지기입니다. 주인도 아니고 종도 아닙니다. 주인이 되어서 내 마음대로 물질을 쓰는 것도 잘못된 것이고, 종이 되어 물질에 지배를 당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청지기는 많은 돈이든 적은 돈이든 충성해야 합니다. 보통 돈이 많이 생기면 충성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칙을 잘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작은 것에 충성해야 큰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내가 가진 것이 많든지 적든지 그것을 내게 맡기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주인이 원하시는 대로 합당하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아멘!/
⑤사명에 성공했기 때문에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사명은 히브리민족이 애굽에서 살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메시아가 오실 수 있는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들을 애굽으로 부르게 되었고, 고센 땅에서 살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창47:6절에 바로가 요셉에게 '애굽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땅의 좋은 곳에 네 아비와 형들로 거하게 하되 고센 땅에 그들로 거하게 하라' 이것이 그의 사명입니다. 이스라엘을 세우는 일입니다. /할/
요셉은 애굽의 총리로 사실상의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당시 바로는 나라 통치는 총리에게 맡기고 자신은 신전을 짓는다든지 특히 자신의 무덤을 짓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피라미드나 왕가의 무덤에서 보듯이 이 일은 그 당시 국가적인 대사였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요셉은 구속사와 직접 연관이 없어 보이는 애굽 통치에 몰두하여 큰 성공을 거둡니다. 그런데 이 성공이 보이지 않게 야곱 가족의 애굽 정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일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요셉은 지혜롭게 현명하게 양곡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함으로써 이 가뭄의 문제를 잘 해결해 갔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애굽의 부강한 나라의 기틀을 마련해 갔습니다. 요셉은 새로운 토지법을 수립했고 새로운 조세 정책을 수립했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부강한 나라로 발돋움 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됩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가 그렇게 유명하다는 말을 듣고 한 사람이 그를 만나서 칼타코를 찾았습니다. 노벨 평화상을 탄 분이기에 너무나 다른 데가 많으리라 생각하였는데 고작 300명 고아들을 데리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수녀에게 물었습니다.
'수녀님! 기업가들은 하루에서 수 만 명 고아들을 먹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성공자라고 부르는데 기업가보다 못 하지 않습니까?' 이 때 테레사 수녀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성공하라고 부르지 않고 충성하라고 부르셨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준 일에 충성하다가 하나님 앞에 갈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명자는 하나님께 충성해야 합니다. /아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된 것은 이렇습니다. 요셉의 모든 관계의 성공에서 키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된 사람은 자기를 가치 있는 존재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되면 원수가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되면 재물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벌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쓰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되면 자신의 비전이 확실해지고, 그 비전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고 성실함으로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의 성공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성공이었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공적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이 확신을 가지고 남은 생애를 형통의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2011년 2월 27일 대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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