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 및 개혁신앙 교리

[스크랩] 칼빈의 기독교강요특강(1)

성령충만땅에천국 2016. 1. 25. 06:50

 

칼빈의 기독교강요특강(1)

 

-자연계시적 지식(Ⅰ)-

 

Ⅰ. 강의를 시작하며

 

1. 칼빈의 생애

 

칼빈1)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의 ‘느와용’(Noyon)에서 ‘제랄드 칼빈’(Gerald Calvin)과 ‘잔느 르 프랑’(Jeanne le Franc)의 네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2). 그는 남달리 교육열이 강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최고의 교육을 받는 혜택을 입고 자랐습니다. 칼빈의 아버지는 칼빈이 12살이 되자 출세를 위해서는 신부가 되어야 한다고 권면하였고, 그 역시 같은 생각으로 14살 되던 해에 당시 최고의 지성의 도시인 파리 ‘라 마르슈’(la Marche) 대학에서 예비과정을 마치고, ‘몽떼규’(de Montaigu) 대학에 정식으로 입학하여 4년간 인문학 과정과 신학예비과정을 지독하다고 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그런데 칼빈이 ‘몽떼규’ 대학을 문학사 학위를 취득하자, 그의 아버지는 성직자보다는 법률가가 되는 것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면서 아들의 진로를 바꾸게 하였고, 결국 칼빈은 파리를 떠나 ‘오를레앙’  (Orleans) 대학으로 가 법률을 전공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비밀리에 헬라어를 공부하게 되면서, 그의 인생의 일대 전환이 오게 되었습니다. 당시 로마가톨릭에서는 일체 헬라어를 공부하지 못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헬라어로 되어 있는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금지시키고 있었습니다. 칼빈은 ‘오를레앙’ 대학에서 1531년 22살에 법학석사 학위를 받고 그 다음해에 “세네카의 관용론에 대한 주석”이라는 탁월한 논문을 발표하여 그의 자질과 능력을 남김없이 발휘하였으며, 1533년에는 법학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런데 헬라어로 된 성경을 읽게 되면서, 그동안 로마가톨릭에서 가르쳐 왔던, 또는 설교 해 왔던 내용들이 옳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1533년 10월 31일 자신과 교제하고 있던 니콜라스 콥(Nicolas Cop)이 파리대학의 학장으로 취임하게 되면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제목의 취임연설문을 발표 하게 되었는데, 이 연설문은 사실상 당시의 소르본느 대학과 그 신학자들을 비판하고 루터의 종교개혁에 동조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것으로, 칼빈의 영향 하에 작성된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니콜라스 콥과 칼빈은 사실상 파리에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다음해인 1534년 10월 18일 소위 ‘벽보사건’3)이라고 부르는 프로테스탄트들의 공개적인 저항이 있었는데, 이 사건은 “유일하신 중보자시오 구세주이신 우리 주님의 그 거룩한 성찬을 직접 반대하여 만들어진 교황주의 미사의 그 무섭고 용납할 수 없는 남용에 대하여…‘로 시작되는 벽보들을 파리와 프랑스의 주요도시에 게재하고 신앙의 자유를 주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으로 인하여 당시 프랑스의 국왕인 프란시스 1세는 교황 바울 3세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자신의 영토 내에 모든 이단을 섬멸하겠다고 칙령을 발표함은 물론,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을 체포하고 그 중 35명을 화형에 처하기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특히 35명의 화형처분자 중에는 칼빈의 친구 안티엔느(Etienne de la Forge)는 물론 자신의 친 형제도 1명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그를 회심4)케 함은 물론 나아가 경건한 삶에 눈을 뜨게 하였고, ‘경건’을 그의 일생의 목표로 삼았던 것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25살에 받은 성직의 특권을 포기하고 정치적 변혁기에 있는 프랑스를 떠나 스트라스부르크를 거쳐 스위스 바젤로 도피하였으며, 그의 나이 27세 때 이곳에서 저 유명한 “기독교강요”(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를 써서 종교개혁자로서 길이 빛날 대 과업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복음의 진수가 담겨 있고, 기독교 신앙의 원리와 체계가 스며있으며, 종교개혁 이후에 나아가야 할 신학의 나침반이요 신앙의 길잡이 역할을 감당할 대작이었습니다.

 

칼빈은 평생 경건을 연습하며 살았습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고난의 삶이 그를 엄섭하였지만, 이러한 고난이 그를 좌절케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습을 더욱 빛나게 하였던 것입니다. 특히 그는 하나님 앞에서 겸비한 삶을 살아왔는데, 그 모습은 그가 죽을 때 유언으로 남긴 말에서 잘 드러납니다. “내가 죽으면 제네바 공동묘지에 안치하되, 어떤 묘비도 만들지 말라.” 칼빈은 1509년 7월 10일에 출생하여 그러한 삶을 살다가 1564년 5월 27일 55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죽어간 숭고한 신앙과 정신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2. 기독교강요의 저술목적과 개요

 

(1)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목적에서 저술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5)  첫째는, 신학도와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공부를 위한 기초를 제공 해 주고자 한 것입니다6). 이 점은 초판의 목적도 동일하지만(다만 초판은 특히 경건을 강조했음), 특히 그가 쓴 1599년 8월 1일 제네바에서 독자들에게 드리는 글(1559년 마지막 정정 증보판에 부치면서)에도 잘 나타납니다. 즉 그는 “본서에서 내가 목적한 것은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가르쳐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접근하며 아무 장애 없이 그 말씀 안에서 생의 걸음을 걸어갈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이 책의 모든 부분에서 기독교의 개요를 개진하였고 또 그러한 순서대로 그것을 배열하였으므로 누구든지 그것을 바르게 파악하기만 하면 성경연구의 기본적인 목적이 무엇이며, 성경에 포함된 내용을 어떤 목표에 귀착시켜야 하는가를 결정짓는 데 어떠한 곤란도 당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를 더 들라면 당시 프랑스의 왕인 프란시스 1세에게 바친 이 책의 헌사(獻辭)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프로테스탄트들의 주장하는 교리가 마치 이단인 것처럼 호도되어 이들을 향해 적대적 행위를 일삼는 핍박을 받고 있지만, 루터로부터 시작된 개신교의 종교개혁 내지 개혁주의 신앙관이 결코 비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을 변호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특히 칼빈은, 당시 교회를 유형적이며 가시적일뿐만 아니라 그 형체를 로마교회의 교황청과 교직 계급제에 두고 있지만, 이와는 반대로 교회는 어떤 유형적인 형체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형체는 그들이 어리석게 찬양하는 그런 외부적인 화려함에 내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리고 개혁교리가 결코 물의를 일으키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프랑스 왕에게 원수들의 중상모략을 조심할 것을 권하면서 자신들의 결백함을 변호하기 위하여 적은 것이 바로 “기독교강요”이기도 합니다. 즉 그는 “폐하의 마음은 지금 우리에게서 멀리 떠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대하여 분노하고 계시지만, 그러나 폐하께 드리는 우리의 변호, 즉 이 신앙고백을 조용히 또는 침착하게 하번만이라도 읽어 주신다면, 우리는 다시 폐하의 호의를 얻을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우리는 인내로 우리의 영혼을 얻을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기다릴 것입니다. 이 능력의 손은 때가 되면 곤궁한 자를 그 고난에서 구출하고 또 기고만장하여 날뛰며 우리를 멸시하는 자들을 벌하시기 위하여 무장하고 틀림없이 나타나실 것입니다.”라고 적고 있는 데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7)

 

(2) 칼빈의 “기독교강요” 그 초판은 516쪽 옥타보판(Octavo)으로 1535년 8월경에 집필이 완료되었으며, 그 다음해인 1536년 4월 바젤에서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초판은 6장으로 되어 있었는데, 첫 4장은 율법(십계명해설), 신앙(사도신경해설), 주기도, 성례전으로 되어 있고, 이것은 루터의 요리문답서회의 순서에 따라 배정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5장과 6장은 논쟁적인 방법으로 각각 거짓 성례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다루고 있습니다. 5장에서 칼빈은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성례라 불리워지고 있는 견신례, 고해례, 안수례, 결혼례, 종유례 등 다섯을 성례가 아니라고 논박하였습니다8). 6장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개념을 해설할 뿐만 아니라,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를 논술하였습니다. 이것은 1534년의 그 유명한 ‘벽보사건’을 공적으로 정죄한 데 대한 대답이요, 또한 종교개혁에 대한 프랑스 왕의 잘못된 태도를 시정해 보려는 항변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1539년 8월, 칼빈은 다시 새로운 라틴어판 강요를 출판하였는데, 그 부피는 6장에서 17장으로 늘어났습니다. 이 판에서 칼빈은 서두를 두 개의 장으로 장식하였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인간에 관한 지식으로 된 두 장이었습니다. 그것은 1536년 판에서는 율법이라는 장에서만 다만 개략적으로 다루었던 문제들이었습니다. 그는 여기서 재세례파9) 카롤리(Caroli)와의 치열한 논쟁 끝에 삼위일체론의 해석을 상당히 확대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또한 재세례파를 한층 더 논박하기 위하여 신약과 구약의 관계를 다루는 장을 새로이 삽입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1536년판에서도 다소 다루어지긴 했지만, 회개와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가 여기서 새로운 두 장으로 개설되었습니다. 그는 또 여기서 예정과 섭리의 교리를 처음으로 조직화하였습니다. 이렇게 진일보하게 된 것으로 스트라스부르크의 개혁자 부처(Bucer)와의 대화와 어거스틴의 연구를 통해서였습니다.

 

1541년 라틴어판을 모국어인 프랑스어로 번역 출판하였으며, 1543년에 세 번째의 라틴어판과 1545년 프랑어판이 출판되었는데, 이는 1539년과 거의 차이가 없으나 내용이 17장에서 21장으로 늘어난 것이 차이라면 그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 여러 차례 재판을 거듭하면서 1550년에 라틴어판을 다시 출판하였는데, 이 판에서는 1543년판과 마찬가지로 21장으로 되어 있지만 여기서 처음으로 장마다 절을 분류하였습니다. 다만 칼빈은 이 1550년판에서는 성경과 그 권위, 성자와 그 형상에 대한 예배에 대하여 다소 첨가하였고, 양심에 대하여 설명을 첨가하였습니다. 그리고 칼빈은 새로운 판을 거듭할수록 새로운 인용문들을 풍부하게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끊임없는 연구를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559년 이제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결정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프랑스어판은 1560년). 이것은 칼빈이 전 생애를 바쳐 이루어놓은 정점이라 하겠습니다. 이 당시 그는 사일열(四日熱/ 일종의 말라리아)에 걸려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순간순간 느끼면서도 종래 21장으로 되어 있던 기독교강요를 무려 4배가 되는 80장으로 늘려놓았습니다. 전적으로 새로운 계획에 따라 완전히 개정하였으며, 또한 상당한 증보를 하였습니다. 1536년 초판의 요리문답 형식은 완전히 사라지고, 사도신경에 따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 그리고 교회의 4부로 재구성하였습니다. 이 1559년의 기독교강요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1부의 제목은 “하나님의 사역과 성품과 관련하여 세상의 창조주요 절대적인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하여”적고 있는데, 그 주요 내용은 자연계, 성경,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은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된다는 것, 우상과 하나님과의 구별, 삼위일체 하나님, 악의 존재는 하나님의 의를 훼손하지 못한다는 것 등을 그 내용을 하고 있습니다. 제2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한 바 구속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하여” 적고 있는데, 그 내용은 인간의 타락과 자유의지의 상실을 주장하여 인간에게는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논하고 있습니다. 특히 제3장 이하에서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 그리스도와 율법과의 관계, 구약과 신약의 관계,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 사역 등의 순서로 논술해갑니다. 제3부에서는 성령에 대하여 논하고 있으며, 이와 관련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는 방식에 대하여” 적고 있는데, 이는 곧 신앙에 대하여 논한 것으로, 그 내용으로는 신앙, 중생, 회심, 그리스도인의 생활로 나누어져 있으며, 특히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해서는 극기, 십자가, 종말사상, 성결, 행위, 자유, 기도, 예정, 최종부활 등 여러 가지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논하고 있습니다. 제4부에서는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우리를 이끄시고 예수 안에서 우리를 지키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은혜의 외형적 방편에 대하여” 논하는데, 여기서는 참된 교회와 거짓된 교회, 사도시대의 교회, 로마교회, 신경과 교회와의 관계, 회의와 그 권위, 교회의 성례전, 정치적 통치 등을 그 내용으로 진술해갑니다. 10)

 

3. 칼빈의 “기독교강요” 특강의 목적

 

필립 샤프(Phillip Schaff)는 “칼빈이 기독교강요로 인하여 개혁교회의 아리스토텔레스요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이중 칭호를 얻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개혁주의 교회에 있어 칼빈의 기독교강요가 미친 영향을 지대합니다. 이러한 책을 우리 모두 힘을 합쳐 같이 공부를 해 봄으로써 오늘날 우리들에게 엄섭하고 있는 각종 사조의 탁류(濁流)를 잘 해쳐나갈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특히 종교다원화, 가치상대주의라는 포스터모너니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여러 사조들이 우리의 생각과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는 대형화되어 가면서 세속주의라는 극한 풍랑에 교회의 정체성이 함몰되어 가고 있으며, 나아가 처처에 이단이 날뛰는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 정신을 차리고 경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대사조에 맥없이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기 위한 방법론으로 16세기 종교개혁자였던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통하여 그가 바라본 신학사상과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진수를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금년 2011년 우리교회의 표어가 “말씀을 사모하자”인데, 이즈음에 칼빈이 기독교강요를 적은 제1목적에서도 본 것처럼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이해함은 물론 말씀에 의지하여 경건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그 역량을 배양하려는데 또한 이 특강의 목적을 둡니다. 11)

 

그런데 앞으로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특강함에 있어 기본교재로 삼은 것은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Ⅰ-Ⅳ(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88), 죤 칼빈(김종흠․신윤복․이종성․한철하공역),“기독교강요(상)(중)(하)”(서울: 생명의말씀사, 1994)입니다. 이 책의 전체분량은 ‘상’(上) 735쪽, ‘중’(中) 615쪽, ‘하’(下) 634쪽 합계 1,984쪽입니다.12)

 

 

각주)

1) 칼빈의 생애에 대한 개관으로 읽어볼 만한 책으로는, 송삼용, 장 칼뱅, 넥서스CROSS, 2009.8; 이상규, 개혁주의란 무엇인가?, 고신대학교출판부, 2007 등이 있습니다.

 

2) 칼빈의 아버지는 느와용에 위치한 노틀담(Notre-Dame) 성당의 참사회의 공증인이자 주교의 비서였고, 후일에는 그 교구의 재무관이 되었으며, 그의 어머니는 네덜란드 출신의 여관업자의 딸로 칼빈이 6세 때인 1515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3) 벽보의 내용 중에는 “짐승보다 더 악한 자들아! 그대들은 하나님을 가루 반죽으로 만들어서 그와 더불어 유희하기를, 마치 고양이가 생쥐와 노는 것처럼 동정하는 체하며, 그대들의 가슴을 치며, 그를 셋으로 절단한 후에는 대단히 미안한 것처럼, 그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부르며, 그에게 평안을 구하는구나.”라는 비방의 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죤 칼빈(김종흠․신윤복․이종성․한철하공역), “기독교강요(상)”(서울: 생명의말씀사, 1994), 28쪽 신복윤의 기독교강요: 역사, 저작목적, 사상적 배경 글].

 

4) 칼빈이 회심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가능하지만, 헬라어 공부를 통하여 로마서를 원어로 읽게 되었다는 점입니다(대략 1532년부터 33년 말 사이). 특히 롬 1:21(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해지며 마음이 어두워졌나니)에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평가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1533년의 파리대학 학장 콥의 취임연설문작성관여도 중요한 계기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5) 윌리엄 바커(Barker)는 루터로부터 시작된 개신교 종교개혁을 변호하고, 또한 종교개혁을 따르는 이들이 성경을 훨씬 더 용이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 교리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기 위한 목적에서 저술되었다고 지적합니다(신학적 작품 “기독교강요”의 역사적 배경, in: David W. Hal/Peter A. Lillback, A Theological Guide to Calvin's Institutes, 나용화외역, “칼빈의 기독교강요신학”, 기독교문서선교회=CLC, 2009, 30쪽).

 

6)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그 위에 칼빈의 주석을 세워주기 위한 하나의 플랫폼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책이 기초가 되어 그가 신구약 주석을 하였다고 평가해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Barker의 앞의 글, 46쪽 참조).

 

7) 칼빈의 앞의 책, 41-71쪽(프랑스 왕 프란시스 1세에게 드리는 헌사 : 가장 위대하시며 고명하신 군주시며 가장 그리스도교적인 프란시스 왕에게 죤 칼빈은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와 구원을 삼가 기원하나이다.)

 

8) 로마 가톨릭의 경우 7성례를 주장하는데, 특히 이 중 견신례는 주례자가 신자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 이마에 성유로 십자를 긋고 성령의 임하심을 기도하는 것으로 오늘날도 이를 그들은 견진성사라 하며, 종유례는 병자에게 베푸는 것으로 이를 병자성사라고 하지만,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주님이 직접 제정하신 세례와 성찬 이외에 위의 다섯 가지는 인정하지 않는다.

 

9) 재세례파의 근본이념은 16세기 당시의 국가 교회(State-church)는 신약교회 원리에서 떠난 타락한 제도를 보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원시교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복귀개념 속에 함축되어 있다. 그래서 베인톤은 “리포메이션(Reformation)이란 말은 루터의 개혁운동을 지칭하는 말이라면, 개혁파(Reformed)란 말은 쯔빙글리나 칼빈의 개혁운동을 지칭하고, 회복(Restored)이란 말은 재세례파의 이념이나 사상 혹은 개혁운동에 대한 포괄적인 표현이라”고 했다. 그들은 신약성경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으며 그런 의미에서 복귀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원시교회는 오직 진실된 신자들로 구성되었고 교회와 국가가 결합되기는커녕 도리어 박해받고 경멸당하고 거부당하는 순교자의 교회로 파악하였다. 그래서 저들은 교회는 국가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고 보았는데, 이것은 국가교회 혹은 제도교회(Established church)로부터 독립을 이루려는 일종의 자유교회 운동이었다. 재세례교가 유아세례를 반대하고 재세례를 주장한 것도 국교회로부터의 분리의 논리적 결론이었다. 이것은 성인 세례 혹은 신자의 세례를 실시함으로서 국가교회 체제를 극복하려 했던 것이다(상세한 내용은 개혁주의학술원의 글을 참조할 것).

 

10) 합동신학대학원의 명예총장이신 신복윤박사는 새로운 관점에서 교의적인 해석을 시도해 본다면 1559년의 기독교강요는 주로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즉, 첫 부분은 하나님(삼위일체, 창조주, 섭리), 성경, 그리고 인간에 관한 교리의 문제요, 이것들은 제1부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둘째부분은 나머지 3부 전체에 미치고 있으며, 여기서는 역사적 계시와 구원의 계획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시 두 부분으로 세분되어, 첫 부분에서는 구원을 위한 준비와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에 있어서의 완성을 말하고(제2부), 둘째부분에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적용을 논술합니다. 이 구원의 적용은 (1) 성령께서 신자 안에서 내적으로 역사하시는데 그 완성은 내세에서 보게 됩니다(제3부). (2) 그리고 외적 수단을 통하여 성령께서 이 공작을 완성하시어, 그 목적으로 달성하게 됩니다(제4부)(칼빈의 앞의 책, 24-26쪽, 신복윤박사의 개관글 속에서).

 

11) 지난 2011년 1월 17일 ‘21세기를 위한 칼빈’(Calvin for the 21st century)을 주제로 서울 총신대에서 개막된 제11차 아시아칼빈학회 첫날, 세계칼빈학회 회장인 네덜란드의 헤르만 셀더하위스 교수가 주제강연을 했는데, 그는 “칼빈사상의 적응성은 전세계적이고 오랜 시간 지속되어온 영향력을 설명하면서, 칼빈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밀은 그의 신학에 있는데, 그의 신학은 성경적이고 다른 개혁자들의 최고의 것들만으로 구성됐으며, 다양한 역사적, 지정학적 환경 속에서 투명하게 적응돼 왔다”며, “무엇보다 하나님과 신자를 연결하는 그의 신학은 훌륭한 경건과 모든 성도가 참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어, 이러한 성공의 요소들이 21세기를 위한 칼빈신학의 중요성과 적절성을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크리스천투데이, 1월 18일 기사중).

 

12) 보충교재로는 David W. Hal/Peter A. Lillback, A Theological Guide to Calvin's Institutes, 나용화외역, “칼빈의 기독교강요신학”, 기독교문서선교회=CLC, 2009년을 사용할 것입니다.

출처 : 삶과 신앙
글쓴이 : 스티그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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