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 및 개혁신앙 교리

[스크랩] 사도신경에 대해서

성령충만땅에천국 2016. 1. 25. 06:49

사도신경에 대해서

 

우선 사도신경은 현재 개혁교회 내에서도 그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배척시하는 곳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심지어는 사도신경을 하는 교회를 이단시까지 하는 경향이 요즈음 들어 매우 짙게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사도신경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가지고 이단이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삼는 것은 문제가 매우 많다.

사도신경은 주 예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되심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탄생하심과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수난·부활·심판을 고백하는 것이므로 말 그대로 믿음의 문제인 것이지, 이것 자체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기준으로 이단시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사도 신경 (使徒信經 , Symbolum Apostolicum)

 

사도신경은 그리스도교도가 믿어야 할 기본적인 교의(敎義)를 간결하게 요약한 성도들의 표준 신앙고백이다.

 

사도들의 신경이 아닌 사도 신경

 

사도신경은 곧 사도들의 신조(the Apostles' Creed)는 그 이름과는 달리 예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신조도 아니고, 사도들에 의하여 쓰인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신조(使徒信條)라고도 불리는 이 명칭은 예수의 12제자(사도)가 각기 1구절씩 만들었다는 전승에서 유래되었다는 말도 있으나 이는 AD 4세기의 루피너스(Rufinus)가 “사도신조 주석”을 쓰면서 사도신조를 열 두 사도가 한 줄씩 썼다고 주장한데서 기인한 것으로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다.

 

복음서에 기록된 신앙고백(마16:16; 28:19)을 기초로 한 단편적인 신조가 2세기부터 존재한 것은 사실이다. 지금의 사도 신경의 모체가 된 것은 서기 400년경의 라틴어로 된 ‘로마 교회 구 신조’(the Old Roman Creed)이고, 그 이후 300여 년 동안 서방의 여러 교회들이 사용하면서 자신들의 신조에 맞게 내용을 수정하였다.

 

현재의 사도신경과 유사한 후기 사도신경은 AD 6세기나 7세기에 가서야 나타나는데, 초기의 사도신경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몇 구절이 추가되었다. 즉 “지옥에 내려가셨다가”(He descended into hades)라는 구절이 추가되었고, 교회라는 단어 앞에 “우주적 혹은 가톨릭”(catholic)이라는 단어가 추가되었으며, “성도들의 교통(the communion of saints)을 믿사오며”라는 구절, 그리고 “영원한 생명(the life everlasting)을 믿사옵나이다.”라는 구절이 추가되었다.

 

이러한 추가 구절들은 프랑스 지방이나 북아프리카 지방의 역본들로부터 수집되어 추가된 것들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도신경은 8세기에 현재와 같은 언어로 확정되었고, 12세기에 가톨릭교회에 의해서 공적으로 인준되었다.

 

루터와 칼뱅은 사도신경을 미사 전례에서 떼어내어 《교리문답서》에 넣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이것을 존중하게 되었는데, 현재 사용되고 있는 내용은 2세기 후반 성립된 ‘로마신조’를 바탕으로 하여, 5~6세기경에 갈리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 이단적(異端的)인 주장들이 많이 대두하여, 이 신조를 기준으로 이단·정통 여부를 가렸으므로 상징(symbolum)이라는 호칭이 붙게 되었다. 그 내용은 삼위(三位) 즉 하나님·그리스도·성령에 대한 구체적 신앙고백으로 되어 있는데,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수난·부활·심판 등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고백이다.

 

그러므로 권위나 정통성에 있어서 십계명이나 주의 기도문과는 차원이 다르다. 필립 샤프(Philip Schaff)의 말처럼 사도신경은, “일찍이 만들어 진 것 가운데 그렇게 짤막한 것으로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최선의 대중적인 요약”이기는 하지만, “이 신조가 매우 단순하고 간결해서... 신학적인 지식이 증가된 단계를 위한 공식적인 교리의 기준이 되기에는 충분하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

 

만약 사도신경이 각 시대의 정통신앙의 기준이 될 만 했다면 그 후에 니케아신조(325년)나 칼케돈(451년)신조가 다시 나와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종교개혁 이후 교파들이 저마다 신조를 만들어 30개도 넘는 신조가 양산(量産)되어 이전 것을 대신하거나 보강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초기의 신조들을 방편으로 현대 교회들의 일치된 정통성을 이룩하려는 시도의 부당함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적절한 평가가 있다.

“사도신경이나 니케아 신조등을 기초로 교파들을 연합시키려고 하는 것은 다 자란 성숙한 어른을 아이들 상태로 돌아가라고 강요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J.L.Neve, Churches and Sects of Christendom

 

1. 사도신경의 의의

사도신경을 다함께 암송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 기독교의 복음의 본질적인 진리이기 때문이다.

사도신경은 성경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 6000년 역사를 모두 합쳐서 가장 중요한 진리를 말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사도신경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도신경은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간단하고도 명확하게 나타낸 신앙의 요약문이다.

 

2). 교회는 사도신경의 신앙 고백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올바른 신앙 고백이 없다면 그 교회도 올바른 교회가 될 수 없다. 지상의 모든 교회는 이 사도신경의 신앙 고백 위에 세워졌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은 교회를 교묘하게 파괴시키려는 이단의 침투에도 성도들을 지켜줍니다. 사도신경은 기독교의 표준적인 신앙이기 때문이다.

 

3). 사도신경은 공적인 신앙 고백이기 때문이다.

사도신경은 어떤 사람의 개인적인 신앙고백문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개인의 종교적 신념이나 자기중심적 신앙 표현이나 주장이 아니다. 사도신경은 신앙 공동체인 교회의 공식적이고 성경적인 신앙 고백이다.

 

 

2. 사도신경의 역사

염두에 깊이 두어야 할 일은 사도신경이 만들어진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이다. 복음서에 기록된 신앙고백(마16:16; 28:19)을 기초로 한 단편적인 신조가 2세기 초중반부터 존재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의 사도신경의 모체가 된 것은 서기 400년경의 라틴어로 된 ‘로마교회 구 신조’(the Old Roman Creed)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오늘날 로마 가톨릭교회나 개신교회들이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은 이와 같은 ‘로마교회 구 신조’가 아니고, 그 이후 300여년 동안 서방의 여러 교회들이 사용하면서 자신들의 신조에 맞게 내용을 수식한 것으로서 서기 700년경 비로소 지금의 것과 같은 내용을 갖추게 된 개정신조이다.

 

서기 900년경이 되어서야 이 사도신경이 동방을 제외한 모든 교회들에서 공식적으로 쓰여졌다. 동방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사도신경을 결코 공식적인 신앙고백으로 채택한 바가 없었고, 그 대신 동서방교회가 함께 그 정통성을 인정하고 있는 니케아 신조(325년)를 택하여 썼다.

 

사도신경은 언제부터 암송하게 되었나?

최초의 신앙 고백은 마태복음 제16장 16절에 나오는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고백하는 장면이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그 제자들은 교회를 세우고 전도를 하며 신앙생활의 본을 보이면서 복음을 전파해 갔다. 그러다가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 교회가 세계를 향하여 흩어져 나가기 시작할 때, 신앙으로 하나가 되고 신앙적 전통을 지켜 나가기 위해 조항을 만든 것이 그 시작이다.

 

신앙 고백을 위해 만든 조항들은 이단들로부터 순수한 신앙을 방어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내용이 첨가되기도 하면서 그 모양을 다듬어 나가다가,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신앙고백이 채택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은 무려 400여년이라는 세월 동안의 기독교의 역사가 압축된 신앙고백의 결정판이다.

 

 

3. 사도신경의 내용

사도신경의 내용은 어떤 것인지 간략하게 살펴보자.

 

1).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이 말은 사람과는 다른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며, 그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고백하는 것이며, 온 천지와 모든 생물과 사람을 창조하신 창조주로서 하나님을 시인하는 것으로서, 이 모든 내용을 그대로 믿는다는 신앙 고백이다.

 

2).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구세주요 메시야임을 굳게 믿는다는 고백이다. 또한 하나님으로서 사람인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탄생하신 것을 믿으며, 본디오 빌라도라는 총독에 의해 가장 극악한 죄수들을 사형시킬 때만 쓰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을 믿는 신앙을 고백하는 내용이다.

 

3).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자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이는 예수님의 죽으신 후에 일어난 일들과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셔서 무덤 속에 계시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셨음과, 하늘나라로 승천하셔서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때가 되면 이 땅에 다시 오시는데, 그 때는 육신으로 초라하게 오실 때와 달리 온 인류를 심판하는 심판주로 오신다는 사실을 믿는 고백이다.

 

4). 성령을 믿사오며

이는 성령님을 성부 하나님이나 성자 예수님과 동일한 존재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하심과 감동하심으로 우리가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것이며,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여러 은혜와 신령한 은사를 받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내용이다.

 

5).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거룩한 공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를 믿는다는 뜻이며, 성도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모이기를 힘쓰고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힘이 성도의 교통에서 나온다는 것을 믿는 내용이다.

또한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인 죄를 사면해 주심을 믿는다는 것인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피 흘리시고 죽으신 것을 믿을 때 우리의 죄는 흔적조차도 남지 않고 사라지게 된다는 고백이다.

 

6).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 아멘.

이는 우리의 죽음 이후의 영혼의 영원함을 믿는 것으로서, 우리들도 언제가는 죽게 될 것이고, 또 예수님이 신령체로 부활하신 것처럼 언젠가는 우리도 그렇게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영원한 나라에서 왕이나 제사장처럼 영원토록 살아간다는 사실을 믿는 고백이다.

 

 

* 사도신경의 문제 구절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a) 애매한 내용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에는 신학적으로 석연치 않은 찜찜한 내용이 첨가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앞서 말한 대로 지금의 사도신경은 서기 700년 이후 갈리아[프랑스] 지방에서 형성된 것을 당시의 로마교회가 최종적으로 수용(受容)한 것이다. 그런데 이 8세기 신조에는 그 전의 구 신조에는 없던 여러 마디의 수식어가 첨가되어, 신학적으로 그 의미를 애매(曖昧)하게 하고 있다.

 

첨가된 10여 가지 표현 가운데, 특히 신학적으로 주목이 되는 두세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다음은 구 신조에는 없던 구절, 곧 “지옥(hell)에 내려가셨다가”(he descended ilto hell)라는 삽입구이다.

이러한 표현대로라면, 예수께서 무덤에 장시되어 계셨던 삼일 동안 ‘지옥’에 다녀오셨다는 희한한 이야기가 된다. 이 문구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인정치 않음으로써 이단이 된 아리우스파의 신조에 처음으로 나타났는데(359년), 점차로 퍼져나가다가 결국 8세기에 개정된 사도신경에 정식으로 삽입된 것이다.

 

이곳의 ‘지옥’(hell)은 본래 헬라어의 ‘하데스’(hades)나 히브리어의 ‘스올’(sheol)로서 죽은 후에는 모든 사람이 가게 되는 무덤 곧 음부(陰府)이다. (창37:35; 시 16:10; 88:3 등). 국내에서 번역 출판된 사도신경 해설에도 이 말이 잘못 적용되었음을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단어[지옥]는 악인들의 형벌 받는 곳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래서 현대 영어 지옥(hell)은 성경의 용어 ‘스올’이나 ‘하데스’와는 다른 뜻이며 또 사도신경에도 적당치 않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때에 그는 분명히 지옥으로 가시지 않았다.”(도날드 콜, 오창윤 역, 사도신경 해설<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1984),75,76.)

 

이러한 비성경적인 표현은 영혼불멸을 주장해 온 로마 가톨릭교회의 연옥설과 상통하고 있음을 교리사에서도 쉽사리 찾게 된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 음부 곧 ‘하데스’를 일종의 연옥으로 보고, 예수께서 무덤에 머물러 계시던 삼 일 동안에 그의 영혼이 연옥의 한 부분인 림보(Limbus)에 내려가 구약시대의 의인의 영혼들을 구속했다는 기상천외한 주장에 이용하고 있다.

이러한 비성경적인 표현은 개신교 신앙에도 큰 영향을 미쳐서, 문맥을 무시한 채 인용된 성경의 다른 표현들(벧전3:19, 벧후2:9, 눅16:23)과 어울려, 개신교의 연옥에 해당되는 중간상태(中間狀態)라는 엉뚱한 교리를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했다.

 

이 중간상태란 사람이 죽은 후 부활 때까지 영혼이 임시로 머물러 있는 상태라고 하는데 성경에는 물론 칼빈주의 기본신조에도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칼빈주의 신학을 대표하는 훼케마(Anthony Hoekema)는 비유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동원하여 이를 강력히 주장하고 있어, 다수 그리스도인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국내에서 번역되어 발간한 또 다른 <사도신경 강해>에도 이 사실이 아래와 같이 드러나 있다.

“주께서 옥에 내려가셨다”는 표현은 사도신경에 있어서 가장 많은 논쟁거리를 일으켰다. 사실상 어떤 신조에서는 이 표현을 임의대로 수정하든지 혹은 아예 그것을 포함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이 구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과연 무슨 뜻을 내포하고 있는가라는 것으로써, ...... ‘옥에 내려가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의 죄악을 얽어 놓으셨다거나,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구원의 소식을 거지 나사로와 또는 뉘우친 강도와 같이 하나님을 믿다가 죽은 자들에게 가져다 준 것임을 암시해주는 것이다.”(부르스 로커비, 문석호 역, 사도신경 강해(서울:생명의 말씀사,1977, 58.)

 

바로 이것이 문제이다. 성경의 어느 곳, 어느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께서 장사되어 계시던 3일간 거지 나사로와 회개한 강도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인가? 앞서의 영혼문제에서 언급한 대로, 또 하나의 개신교 연옥을 만들어내는 엄청난 신학적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혼란 때문에 미국의 감독교회는 1789년에 제정한 기도에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표현을 아예 삭제하거나 다른 표현을 쓰게 했다가, 1892년에는 이를 철회하는 등 갈팡질팡하고 있다. 이러한 자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이를 영적인 의도로도 해석하지만 모두 궁색한 시도에 불과한 것으로, 역사적 배경과 본문의 의도에 빗나간 것이다.

 

오늘날 영어로 된 사도신경에는 거의 모두가 “지옥에 내려가셨다가”(He descended into hell)를 그대로 포함하고 있다. 우리 한국교회들은 쓰고 있는 사도신경도 물론 8세기에 개정된 것이면서도, “지옥에 내려가셨다가”라는 문구는 이유도 밝히지 않고 삭제한 채 적당히 통용하고 있어 교리적인 혼란을 모면하고 있지만, 문서의 역사적인 정확성과 신학적인 정직성은 무시하고 있는 셈이다. 신학적으로 깊이 재고해야 할 문제이다.

 

b) 사연이 있는 표현 - "거룩한 공회"

문제가 되는 또 다른 삽입구는 교회에 관한 것인데, 5세기 '로마교회 구 신조'에는 일반적인 표현으로, “거룩한 교회(the Holy Church)를 믿사오며”로 되어있다. 그러나 8세기 개정신조에는 거기에 가톨릭(Catholic)을 첨가하여, “거룩한 가톨릭교회(the Holy Catholic Church)를 믿사오며”로 표현했다. ‘가톨릭’(catholic)의 뜻은 본래 ‘보편적’ 혹은 ‘세계적’(universal)이란 뜻이어서 일반적으로 쓸 경우에는 구태여 로마 가톨릭 교회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사도신경에 쓰여진 배경은 그 역사 때문에 전혀 다르다. 그 당시 이미 베드로의 후계자임을 공언하고 나선 로마교회의 감독이 전세계교회의 머리로서 땅 위의 모든 교회를 대표하고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교회라는 주장을 강화하고 있던 때였기 때문에 실제로 말의 뉘앙스가 다르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당시에 서방의 로마교회와 지상권을 위한 싸움을 벌이고 동방의 희랍교회가 자신을 “거룩하고, 정통적이며, 세계적[가톨릭,catholic]인 사도직의 동방교회”로 부르고 있던 때라, 서방의 로마교회가 이 가톨릭이란 표현을 쓰기 시작하자 자기 이름을 도적맞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리하여 동방교회는 로마교회의 권위주의적 독선을 드러낸 사도신경을 배척하고, 내용은 거의 비슷하면서도 동방교회의 영역에서 제정된 유서 깊은 니케아신조를 자신들의 신앙 고백으로 고집한 이유를 알게 된다. 아울러 역사적인 뒷받침이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로마 가톨릭교회가 사도신경을 굳이 사도들의 직접적인 작품이라고 무리하게 주장하는 이유도 깨닫게 된다.

 

한국교회들이 쓰고 있는 사도신경에는 이 "거룩한 가톨릭교회"의 표현을 그저, "거룩한 공회"라고 했는데, 이 "공회"란 말은 본문의 뜻과는 거리가 먼 애매한 뜻이지만, 이러한 방식으로 난관을 넘기고 있다. “거룩한 공회”를 예수님의 지체되는 “거룩한 교회”로 고치거나 “거룩한 공회”로 발음하면서 “거룩한 교회”를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그러나 [한영 찬송가]에 함께 쓰여진 영문 사도신경에는 “the holy catholic church”라고 써서 그것이 8세기의 개정 신조임을 드러내고 있다.

 

c) 의심스러운 말 뜻 - “성도가 교통하는 것”

또 다른 문제의 삽입구는, “성도가 교통하는 것”(the communion of saints)이다. 성경적인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인 모든 교인들을 성도(聖徒.saints)라고 한다.(고전1:2)여기서 ‘교통’이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이나 인간과의 교제를 나타낼 수 있는 헬라어의 ‘코이노니아’(koinonia)인데, 여기서는 그 문법적인 성격을 보아 성만찬을 통해 이루어지는 교제임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가톨릭에서는 죽은 가톨릭의 신앙적 영웅을 성인(saint)으로 봉해 일반적인 의미의 성도(saint)를 신성시 하였습니다. 그래서 로마가톨릭교회에서는 성도들의 ‘교제’를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죽은 성도들에게까지 확대하여 성자숭배와 죽은 사람에게 기도하는 교리적 근거로 오용하고 있다. 물론 성경적인 의미의 성자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인 모든 신자들인 ‘성도’를 가리키지만, 로마가톨릭의 성인은 죽은 지 오랜 세월이 경과한 후에야 특별 심의를 거쳐 서품(敍品)되는 비성경적인 개념이고, 죽은 자와 교통하는 일은 사단의 속임수로 (삼상28:8-19), 성경에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사8:20; 신18:11.12)

 

교제는 영어로는 fellowship으로 서로 정감 있게 친분을 맺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기독교에서는 본래의 문자적인 의미대로 거듭난 성도들이 서로 믿음과 사랑으로 교제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물론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것과”로 바꾸어서 암송해도 무방하다.

 

d) 의문의 인물 - 본디오 빌라도

유대 총독인 빌라도는 역사 속에서 예수님을 죽음에 내어준 인물이지만 그는 오히려 할 수만 있으면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애를 쓴 흔적을 여러 곳의 성경에서 읽을 수 있다.[참고 : 마27:24 ; 눅23:4, 14-22]

 

사도신경에서 본디오 빌라도가 들어간 것은 역사성 즉, 역사적인 사실임을 증명하기 위해 첨가된 것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시켰던 사람들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인 유대인들이었다. 대제사장, 율법학자, 바리새인들은 틈만 나면 기회를 노려 예수님을 없애고자 노력하였고 결국 빌라도를 윽박질러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였던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여전히 주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하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행3:13)라고 책망했다.

이사야 53/5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우리들의 죄, 좀 더 구체적으로는 나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고난을 받으신 것이므로 올바른 신앙 고백이 되려면 “나의 죄로 인하여 고난을 받으시고”라고 고백하는 것도 바람직해 보입니다.

 

e) 의문의 단어 - 저리로서

참고로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에서 오늘날 ‘저리로서’라는 표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저리로서’라는 말은 ‘그곳’이라는 옛 말에다가 조사 ‘-으로부터’에 해당되는 옛 표현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신 그 곳으로부터 라는 뜻이다.

따라서 “저리로서”를 “그곳으로부터” 또는 “하늘로부터”로 바꾸어 암송하거나 이해하면 될 것이다.

 

 

4. 결론

 

사도신경은 기독교의 기본교리를 잘 표현한 훌륭한 신앙고백서이나 부분적으로 오류가 있고, 가톨릭의 사상이 가미되었다. 그래서 사도신경을 이단 판별의 기준으로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다고 사도신경을 무시하는 것보다 바르게 이해하거나 바르게 고쳐서 암송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신앙이 흔들릴 때 사도신경을 외우면 힘이 나고 바른 생각이 정립된다. 교인들에게 마지막 혼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른 교리를 확립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을 통하여 확인된 개신교의 정신은, <오직 성경>만이 신앙의 규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교회는 1546년 4월 6일, 개회 중이던 트렌트종교회의(1545-63) 제 4회기 동안, “성경과 전통은 동등한 권위를 가진 것으로 용납되어야 한다”는 치명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사도 바울의 신조처럼, 성경은 능히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하며,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여,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딤후 3:15-17)하게 하는 유일한 정통 신조임을 재확인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사도신경은 기독교의 기본교리를 잘 표현한 훌륭한 신앙고백서이나 부분적으로 오류가 있고, 가톨릭의 사상이 가미되었다. 그래서 사도신경을 이단 판별의 기준으로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사도신경을 성경적 교리에 맞게 수정해 보면 다음과 같다.

 

사도 신경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우리 죄를 대신해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그 곳으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주님의 몸된) 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The Apostle's Creed

 

I believe in God the Father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and in 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Ghost,

born of the Virgin Mary,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한글삭제)

The third day He rose again form the dead;

He ascended into heaven,

and sitteth on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

from thence He shall come to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I believe in the Holy Ghost;

The Holy Catholic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And the life everlasting. Amen.

출처 : 삶과 신앙
글쓴이 : 스티그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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