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수*이동원 목사+목사님들설교

[스크랩] 전통이냐, 말씀이냐?(막7장1-9) / 이동원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6. 1. 29. 12:41

전통이냐, 말씀이냐?(71-9)

 

 

출 처이동원목사

 

한문에서 유래된 우리말 가운데 표리가 부동하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겉과 속이 다르다는 말이죠.

이 시대를 사는 우리 이웃들 가운데 가 끔씩 보면 지나칠 정도로 이중성의 잣대를 가지고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겉다르고 속다른 사람들이죠.

 

그런데 기독교인 가운데도 그런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저는 어느 인간이나 어느 정도의 이중성은 다 있다고 생각하지마는 지나칠 정도의 이중적인 삶의 스타일, 한국 사람들에게 짙은 경향이 있는데 왜 그랬을까 생각을 좀 해 보았어요.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죠.

그러나 그 원인 중에 하나는 저는 유교적 문화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유교는 한국인의 정신사 또 한국인의 삶의 가치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긍정적 기여를 많이 했습니다.

 

저는 기독교가 상륙하기 전에 유교가 있었던 것이 굉장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한국인의 도덕관, 정신 자세, 삶을 사는 스타일 한국사회의 건강성을 지배한 매우 중요한 원리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유교문화가 가진 부정적이거나 역기능적 요소들도 없지않아 있습니다.

 

저는 그 중에 하나가 특별히 형식의 틀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사람들로 하여금 형식에 집착하고 내용을 갖추지 못하는 삶을 살게 만든 한 요인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인의 출세관, 정말 이땅에서 내가 소중한 삶의 기여를 하겠다는 쪽보다도 어떤 타이틀을 갖느냐, 명예를 갖느냐. 이 쪽으로 유교문화가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이 을 살아왔던 한국 남자들의 최고선은 언제나 출세였습니다. 출세가 곧 성공으로 통했습니다. 그래서 옛날 어른들이 모여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조상 자랑이 꼭 나옵니다.

우리 몇대조 조상은 정승을 지냈고, 할말없는 사람들은 정승까진 못했으니까 원님이라도 했다. 이런 얘기들을 종종 나눕니다.

 

정승, 원님이라는 것은 일종의 자리인데요, 타이틀인데 그것이 그 자체가 자랑이 되겠어요?

그분이 그 자리에 있는 동안에 민족사의 발전에 이런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그러면 정말 자랑할만 하지요. 그러나 자리 자체, 타이틀 자체가 무슨 자랑이 될 수가 있을까?

 

이런 경향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오늘 이 사회를 아직도 강력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소위 그런 학력주의, 간판주의 이런 삶의 스타일이 얼마든지 있잖아요.

내가 어떤 유명한 학교를 입학했다. 그리고 졸업했다. 그 자체만으로 그것이 무슨 자랑이예요. 그것 때문에 내가 좋은 영향을 받아서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느냐라는 삶 의 내용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한국 대학의 문제점의 하나가 대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죽어라고 공부하던 학생들이 막상 대학에 들어가면 진지하게 공부 아니하는 경향이 참 많찮아요.

 

요즘 대학을 포함한 교육 개혁의 문제가 다시 검토되는 것은 저는 당연한 하나의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학교를 막상 졸업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책하고는 아주 멀어져요. 사실은 직장이라는 삶의 장, 이것은 그동안 공부해왔던 것을 적용할 뿐만 아니라 이제 계속 바뀌는 시대 속에서 좀더 내 직업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 계속 연구하고 책을 읽어야 할 터인데 졸업하면 책하고는 멀어지는 우리 모습들을 많이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간판은 있는데 실력이 없는 사회 이것이 한국 사회의 한 단면일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워싱턴에서 목회를 할 때 처음에 얼마 안되서인지 몰라도 손님이 많이 오시더라고요. 그러면 제가 늘 가이드를 했습니다. 저는 아마 목사 안되었으면 제가 관광 가이드 했으면 아주 잘했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해요.

가이드 하려면 기왕이면 잘해 제가 책을 갖다 놓고 연구를 했어요.

그래서 스미 소니안 박물관에 대한 연구도 하고 백악관의 역사, 또 여러가지 역사들 을 공부를 하고 건물에 대한 스터디도 좀 해보고 그래서 손님들이 오면 자질구레한 것까지 열심히 설명을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 손님들은 이 설명에 대해 관심이 없는 같더라구요. 그래서 많은 분들이 제가 설명이 길어지면 꼭 그럽니다.

목사님, 됐어요. 됐어요 빨리 찍고 가요. 사진 빨리 찍고 가자는 거예요.

오직 목적이 거기 왔다가 내가 워싱턴 백악관 지나갔다. 집에 가서 할 말이 있어야 하니까 나 백악관에서 사진 찍고 왔다.

 

거기서 뭘 배웠느냐 이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사진 찍고 가는 것이 중요하단 말이죠.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언제나 어디 다녀간 발자취에 보면 항상 낙서들이 많이 있는데 제일 대표적인 것이 왔노라 갔노라 김태평 뭐 이런 것들이 많찮아요.

 

그런데 거기서 무얼 배웠느냐가 중요하지 않아요. 요즘 단풍놀이를 해도 하나님이 주신 자연을 깊이 음미하고 감상하면 좋은데 그냥 헐레벌떡 갔다가 사진 한장 찍고 그냥 와요. 거기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느꼈느냐 하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여집니다.

 

이런 내용이 없는 허세의 문화, 간판 문화, 형식에 매달리는 삶, 그 형식에 따라주는 삶을 상실하고 있는 이 시대 사람들의 모습을 얼마든지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의 눈에 그런 사람들의 모습들이 보였던 것같아요. 예수님께 책망 받는 대표적인 그룹이, 대 표적인 그 당시 종교인들이었던 바리새인 그리고 서기관들 그룹이 예수님의 가장 혹독한 책망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보시면 예수님은 이사야서를 인용하시면서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6절 다 같이 읽어요.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그들을 뭐라고 말했습니까?

외식하는 자들. 이 겉만 꾸미는 사람들, 그리고 겉에 집착하는 사람들, 왜 바리새인들이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었을까요?

그것은 소위 그들의 전통에 대한 집착, 그것이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형식 중심의 삶으로 만들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여기 3절에 보시면 바리새인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무엇을 지키어 그랬습니까? 유전을 지키어 그랬습니다. 이 유전이라는 말이 전통이라는 말이거든요.

소위 Tradition 물론 전통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전통중에 좋은 것이 많이 있어요. 그러나 전통만 붙든다는 것은 잘못하면 과거에 집착하고 오늘에 삶의 내용을 상실케 할 커다란 위험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형식이 계속 반복되다 보면 그 형식을 통해서 어떤 고정된 규범이 생깁니다. 나중에는 그것이 움직일 수 없는 진리처럼 형식이 진리의 모습을 입고 대신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어느 공동체나 전통이 있습니다. 전통의 좋은 점이 있지마는 전통때문에 발전하지 못하는 것도 많이 있어요.

 

또는 전통이 우리로 하여금 가리키려고 했던 진정한 본질 그 본질에 다가서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 요인으로 종종 등장하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에도 마찬가지예요.

전통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렇게 해왔다.

과거에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혹은 옛날에는 이렇게 해왔다. 이 사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지금 어떤 신앙의 삶을 사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죠.

 

우리가 신앙의 내용에 본질에 다가서기 위해서 때로는 이 전통을 넘어설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이 전통을 넘어 서지못해요.

, 신앙생활의 성숙을 방해하고 또 신앙생활의 핵심에 다가서는 것을 방해할 수 있는 그런 전통, 이 전통에 역기능적 요소들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첫째 전통이라는 것은 우리의 속, 내면을 관리하는 것을 소홀하게 만들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전통에 집착하다 보면, 형식에 집착하다 보면 내용을 관리하는 일을 소홀히 하게 될 수가 있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소위 정결 규례였습니다. 깨끗하게 하는 규례.

오늘 2절부터 보시면 그의 제자중 몇 사람의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음식 먹을 때 규례가 생겼어요.

 

본문에 4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룻을 씻음이러라

 

4절에 그 음식 먹는데도 지키어 오는 것이 있었다. 그것이 계속되어 오면서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렇게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래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 아니예요. 본래 정결 규례의 그 원천은 뭔가하면 제자장들이 성전에 들어갈 때 반드시 물두멍에서 손을 씻고 나아갔습니다.

 

왜 손을 씻느냐. 손이라는 것은 우리의 모든 행동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거룩한 마음으로 나아간다. 그 상징으로 손을 씻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나사이에 거룩한 예배, 거룩한 제사가 가능하도록 그들 자신을 관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손 씻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손씻음이 상징하고 있는 마음의 깨끗함,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간다 이것이 훨씬 더 중요 했어요.

 

그런데 이런 일을 하다보니까 거기에 따른 다른 규례들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수호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더 잘 지키기 위한 다른 규례들을 자꾸만 만들어 갔습니다.

 

소위 미쉬나라는 구전법이 그 당시에 존재 하고 있었는데 유대인들은 이 법규를 가리켜서 율법의 울타리다 이렇게 불렀어요.

율법을 더 잘 지키기 위해서 또 다른 규칙들을 만들어요.

칙이 너무 세분화 되다 보니까 나중에 규칙이 장애물이 되어 갖고 본질인 하나님의 말씀을 망각하는 폐해마저 생겼습니다.

 

이 안식일을 지켜라 뭐 괜찮은데 나중에 안식일을 잘 지키기 위한 규칙을 만들어 요. 뭐 굉장히 많아요.

 

그 중에 웃기는 것도 있습니다.

안식일 날에는 거울을 되도록 보지 말아라 거울 자꾸 보다 머리 만지다 보면 일이 된다. 이런 이상한 그런 법규들까지 자꾸만 생기다 보니까 하나님이 안식일 지키라고 주신 이유, 하나님의 마음이 어디 있느냐.

 

정말 쉼을 주시고 하나님의 관계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 이러한 것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 본질을 망각하고 껍데기 형식에 매달리는 이상한 현상들이 생겼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벌써 그러한 현상들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가를 주목해 보시면서 이 중대한 경고를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본문의 6절입니다. 가라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마지막에 무엇이 강조되었습니까?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다같이.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그들이 형식에 집착하고, 어떻게 이 규례, 정결의 규례를 어떻게 잘 지키느냐, 이런 규례들에 집착하는 동안에 마음은 점점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단 말이죠.

 

처음에는 성전에 나가기 위한 그런 법규가 나중에는 식사 법규로 변질하고 식사 전에 손을 씻는다, 위생적으로 좋지만 거기다 지나친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것이 마치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나중에는 그릇 씻는 규례까지 다 만들었어요. 여기도 잔, 주발, 놋그릇 어떻게 씻느냐 그것까지 다 나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에 집착하다 보니까 하나님 앞에 내 마음의 상태가 어떻냐? 여기에 무관심하게 된 것이예요.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의 외면에 대한 관심이나 집착이 반드시 내적인 성결, 혹은 내적인 성숙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여러분, 외적인 관심이 나쁜 것은 아니지마는 그러나 더 중요한 우리 마음의 관리, 요즘 여러분의 마음의 상태는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내가 어떤 법규에 매달리고 전통에 매달리는 동안에 오늘 여러분의 마음은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사랑하시는 여러분,

반드시 우리가 해왔던 어떤 방식이나 전통이 내 마음의 성결을 보증하지는 못합니다. 살아계신 주님 앞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으로 설 수 있기 위해서 오늘 여러분의 마음을 점검해 보셨습니까?

전통 중심의 신앙이라는 것은 이런 내면 관리를 소홀히 할 수 있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로 전통의 역기능적 요소는 전통으로 말씀을 대신할 위험이 있습니다.

전통이 진리로 둔갑해 버릴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예배도 오래 드리다 보면 예배의 전통이 생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묵도에서 부터 축도로 시작되는과 거의 예배, 그것이 하나의 법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에 그렇게 예배드리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의 전통에 불과합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가다 보니까 전통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정말 하나님 앞에 나를 드리는 거예요. 이것이 예배의 정신입니다.

나를 드린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린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예배 잘 드렸냐?

그러면 정시에 시작하고 정시에 끝나고 갔다 왔어요.

이것을 예배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예배를 드리셨을까요?

예배시간에 빠지지 않았다, 내가 그날 그 자리에 있었다, 그것이 예배를 드린다는 보장이 되질 못해요.

 

어떻게 예배를 드렸는가? 어떻게 찬송했는가? 정말 찬양을 드릴 때 그 찬양의 가사에 몰두해서 찬양의 가사를 나의 고백으로 삼아 주님앞에 정말 찬양을 드렸는가? 말입니다.

 

기도할 때 정말 같이 기도하셨습니까?

기도를 인도하는 저와 더불어 함께 내 마음을 주앞에 드리며, 함께 기도에 공감하며 하나님 그래요,

맞아요, 저 기도가 바로 내 기도예요. 하나님 내 기도를 들어주세요. 말씀을 들을 때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로 듣고 그 말씀 앞에 응답하고 결심하고, 결단하고, 내 삶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내 속에 말씀하시는 주의 음성을 듣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체험합니다.

내 인생이 하나님 앞에 붙잡혔습니다.

맞아! 내 인생은 하나님의 것이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지,

내 인생을 주님앞에 맡기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예배를 마쳤을 때 나갑니다.

이게 예배를 드린 사람이에요.

 

여러분, 그 자리에 있다 가만 갔어요.

, 그래도 예배를 드리고 가서 공치니까 공도 잘 맞더라,’

예배드리고 나서 단풍놀이 하니까 기분이 썩 나쁘지 않더라.’

 

예배 정신이 중요해요.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이따금씩 저희 교회에 오시는 분들이 왜 주기도문을 많이 외우지 않느냐 이런 질문을 하더라구요.

여러분, 성경에서 주기도문 외워라, 암송하라 -

그런 말씀 보셨어요?

찾아가지고 오시면 제가 100만원을 틀림없이 지급하겠습니다.

 

주기도문 외워라. -

그런 것 없어요, 성경에.

주기도문은 이렇게 기도하라,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라, 주기도문은 기도의 샘플입니다. 기도의 모본이예요. 기도의 패턴이 예요.

 

주기도문을 정말 배웠다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암송하는 사람이 아니라 - 암송이 절대로 나쁜 것이 아니에요. 암송도 하셔야지요. 암송도 못하면 어떻게 하겠어 요? -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주기도문을 통해 기도의 정신을 배워서 주기도문을 가만히 보니까 맨 처음에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 - 임하시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먼저 기도하고, 그 다음에 오늘 날의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더라.

 

그렇다면 주기도문을 제대로 배운 사람은 어떤 기도를 하든지, 무슨 기도를 하든지 자기의 기도생활 속에 주기도문의 정신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기도를 배운 사람이에요.

 

주기도문의 메시지, 주기도문의 정신, 주기도문의 핵심을 배우지 못하고 나는 주기도문을 외웠다.

그러니까 주기도문을 배운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을 못배운거예요. 아무리 암송을 했어도 주기도문대로 내가 기도생활을 하지못하면 그 기 도의 정신이 내 기도속에 살아 있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주기도문을 배운 사람 아닙니다.

외우는 것 아무런 필요도 없어요. 껍데기에요, 그것은.

 

또 어떤 사람은 사도신경을 왜 안외웁니까? 예배 시간에 사도 신경 외워라, 그것이 성경 몇장 몇절에 있어요?

그것도 하나의 전통에 불과해요.

저는 사도신경 믿어요. 글자 하나 틀림없이 다 믿어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도신경에 포함된 교리를 정말 성경안에서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내가 정말 말씀이 가르치는 믿어야할 바 진리를 깨닫고 배우고 확신하고 그리고 말씀위에 내 인생을 세우지 못한다면 외워서 무슨 소용이 있어요?

차라리 안 외우는 것이 나아요.

그것이 제 생각입니다.

 

또 어떤 분은 와서 왜 이 교회는 십자가가 없어요? 십자가 좀 크게 만들어서 붙이지요. 십자가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상징입니다. 물론 사실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만 매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십자가의 내용이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가 내 마음에 계셔서 내 삶을 지배하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뒤를 날마다 따라가는 그 헌신과 그 고백이 없다면 십자가 간판을 매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저는 한국의 하늘에 가득한 십자가가 부끄러워질때가 있습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그 십자가의 정신과 십자가의 혼을 얼마나 이해할까?

정말 십자가를 통해서 죄 사함받고 새로워진 사람들이 이 십자가의 물결만큼이나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을 산다면 한국 사회가 왜 이 모양이 꼴이에요?

 

그 내용이 있어야지요. 내용이 없고 상징만 붙들고 있으면 그것은 부적과 같은 것이 에요. 샤마니즘, 미신입니다.

 

내가 볼 때 신앙의 확신도 없는데 어떤 자매가 십자가를 금목걸이로 해서 달고 다니더라구요. 성경공부하라 그래도 안하고 도망다니고 말이지요.

 

그래서 제가 어느 날 그랬습니다.

자매님, 십자가는 걸고 다니는 것이 아니예요 성경에는 십자가를 지고 다니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를 지셔야 합니다. 내 몸으로 십자가를 지고 다니는 거예요.

 

그랬더니 이 자매가 지지요 뭐.

그러면서 목걸이를 뒤로 돌려 매더라구요.

 

저는 교회 직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저는 한국 교회가 변혁되려면 교회 직분관이 변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직분이 벼슬이 아니예요.

철저한 봉사의 자리입니다.

 

집사자리를 얻었다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집사다운 집사가 되었느냐, 장로다운 장로가 되었느냐, 목사다운 목사가 되었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나는 주의 종이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내가 주의 종처럼 살지 못한다면. 저는 사람들이 목사님! 안 불러 줘도 하나도 유감 없어요.

 

가끔 미국에 가면 미국 목사님이나 미국사람들과 어울리면 저한테 꼭 목사님! 안그러더라구요.

브라더 이, 이형제 -

좋아요. 그게 어떤 때는 더 자연스러워요.

타이틀만 내세우는 것 무슨 의미가 있어요?

내가 정말 주님의 종다운 종이 되지 못한다면, 복음의 종으로서 복음을 확신하고 복음으로 사람들을 섬기고 그리고 복음의 메시지를 제대로 전하는 그 종이 되지 못하다면 내게 주어진 타이틀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형식은 필요하지만 형식에 따르는 내용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 형식은 오히려 나를 속이는 것입니다.

속에는 아주 하나님이 기뻐할 수 없는 것을 간직하고 있는 인생,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그랬어요. 그래서 주님이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책망하실 때 심지어 어떤 말씀까지 하셨습니까?

회칠한 무덤이여! 그랬습니다.

무덤에다 색깔만 멋있게 입혔어요. 그러나 그 속에는 썩어있는 송장이 있습니다.

냄새나는 송장이 있었습니다.

 

내 속에 뭐가 있을까요? ! 속이 중요한 거예요. 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유모어집에 보니까 이런 것이 있더라구요.

만두 장사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무엇이냐? 속 터진다.’

 

속 터지는 인생 많아요.

속이 터지면 부끄러운 인생 많아요.

정말 그 속이 충실해야 합니다. 그것은 복음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형식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때로는 내가 형식에 익숙하기 있기 때문에, 자리에 익숙하기 때문에 내가 된 줄로 착각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전통이 말씀을 대신 할 위험성은 언제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단순한 전통에 집착하는 신앙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번째로는 전통이 심지어 말씀을 폐기할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의 전통을 조심해야 합니다.

전통이 말씀을 폐기할 수도 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고르반이라는 제도였습니다.

,본문 조금 지나가서 보시면 11절부터 13절까지 같이 읽어요.

11 절부터 13절까지.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하면 그만이라 하고 제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너희에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13절에 너희에 전한 유전으로..‘

그 전통으로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폐기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전통 때문에 말씀이 가리워져 있었어요.

이 전통으로 말씀을 폐기하고 있다. 대표적인 제도가 그 당시에 고르반이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고르반이라는 말의 뜻은 하나님께 드립니다라는 뜻이예요. 그런데 이것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어떻게 악용했는가?

, 부모를 봉양해야 될 사람들이 당연히 도와야 하는 사람들이 부모에게 돕기싫 으면 이런 말을 했어요.

부모님. 제가 부모님 참 돕고싶지만 고르반했습니다. 고르반.하나님께 바쳤습니다

 

하나님께 바쳤다면 양해를 해줘야되요.

근데 정말 하나님께 바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부모를 도울 마음이 없으니까 그당시 있었던 제도, 전통이라는 제도를 악용한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하나님께 드린 사람들이 너무너무 생활이 어려우면 교회에서 그 사람들을 구제합니다.

 

심지어는 이런 일까지 했어요.

헌금을 도로 주는 일도 있어요. 교회 장로들의 결정에 의해서.

기가 막히게 이 제도를 악용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부모님들에게 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부모님..제가 돕고 싶어요. 그렇지만 고르반했어요. 하나님께 바쳤어요.”그리곤

교회가서는 저 도와주지 않으면 큰일나요.”

드렸던거 도로 가져가요.

너희가 이런 전통,제도를 악용하면서 결국 부모를 공경하라.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명백한 말씀을 어기지 않고 있느냐?

 

우리의 제도 우리의 형식을 빌려서 하나님의 진정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오히려 도피하고 있었던 사람들.

 

오늘은 이런 사람들이 없을까요?

저는 이 자리에 있었던 바리새인들의 최대의 후회가 어떤 후회였을까?

바리새인들은 서기관들은 그 당시 가장 놀라운 기회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지금 바리새인들은 누구와 대화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입니다.

여러분. 바리새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 뭘까요?

율법입니다. 토라.율법입니다.

 

근데 율법의 핵심이 뭘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율법과 선지자가 나에 대하서 증거하는 것이어늘

 

율법의 핵심이 뭡니까?

예수입니다. 구약의 모든 율법. 율법은 하라,하지말라는 계명인데 하라는 것 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것 했어요.

 

율법을 우리는 깨뜨렸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율법의 진노와 저주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율법의 저주를 받았던 우리를 속냥시키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율법을 제대로 지키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자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율법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바리새인들은 그 예수님을 앞에 놓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대화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율법이 가르치고 율법이 기다리고 있던 예수님이 그들 앞에 와 있었어요.

그러나 그 예수님에 대해 흥분하지 않고 다른거 가지고 흥분하고 있어요.

율법의 제도를 어떻게 지키느냐? 비본질적인 것.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

 

여러분. 교회 예배당에 와서도 정말 중요한 것에 관심없는 사람들이 있어요.

중요한 것.누굽니까?

예수. 믿으십니까?

 

예수가 구원이십니다.

믿으십니까?

 

예수가 소망이십니다.

믿으십니까?

 

예수님을 만나는 것. 예수님을 경험하는 것.예수님을 예배하는 것.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이게 제일 중요한 거예요. 근데 그건 관심없고 다른 거에 관심있어요.

..이 교회는 주보가 이상하다.”

그게 뭐그리 중요해요?”

왜 예배시간에 복음 성가 부르냐?”

 

 

요즘 복음성가 때문에 옛날 세대와 신세대 간에 갈등이 많아요.

가족예배 드리기도 힘들어요. 그렇죠?

신세대들이 좋아하는 찬양. 늙은 세대들이 좋아하는 찬양이 달라요.

저도 한번은 우리 아이들 방에서 이상한 음악이 들려오는데 도저히 견딜수가 없더라구요. 시끄럽고.

 

..음악 좀 부드러운 것. 클래식한 것 좀 바꿔서 할 수 없니? 그게 뭐니?”

 

아 빠..이것도 가스펠이야.가스펠이러더라구요.

 

가사가 좋대요.

그래서 한번 들어보자고 하니까 진짜 예수님에 대한 노래예요.

그래서 야단치려고 했다가 제가 가만히 생각을 해봤어요.

 

우리아이들. 새로운 세대들은 그들에게 익숙한 리듬을 통해서 예수님을 배울 수가 있다면 그거 막으면 안돼죠.

그들은 그들에게 익숙한 리듬을 통해서 예수를 배우고 예수님 가까이 갈 수가 있다면 음악적인 형식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해요.

우리 지휘자님 섭섭할지 모르지만 전 그렇게 생각해요.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다.

믿으십니까? 지휘자도 아멘 하셔야 되요. 중요한 것. 예수. 믿으십니까? 아멘하셨어요. 억지로 하셨는지 모르지만.

정말 더 중요한 것은 예수예요.

난 우리 아이들이 젊은 세대들이 말이예요. 예수님만 배울 수가 있다면 예수님만 만날 수가 있다면 예수님만 사랑할 수 있다면 락큰롤이 아니라 락큰롤 할아버지라도 부를 수가 있다고 전 생각해요. 할렐루야.

 

유감있어요?

끝나고 나서 얘기해요.

괜찮아요.

 

중요한 것은 예수이기 때문에 정말 본질적인 것.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가 있다면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가 있다면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가 있다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생이 뒤집어져서 바뀌어져서 정말 그리스도의 소망과 복음을 가지고 살 수만 있다면 사랑 하시는 여러분 때로 우리는 전통이나 형식에서 조금은 자유할 필요가 있어요.

 

그들은 앞에 예수님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 놀라우신 예수님.

그 분을 만나 영원에 대한 대화를 들을 수 있는 그 기회. 그 예수님께 경배할 수 있는 기회. 그 예수님께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는 놀라운 기회에 겨우 따진 것이 뭐냐면

예수님. 식사하기 전에 손몇번 씻을까요? 어디까지 씻을까요? 손목까지 씻을까요? 팔뚝까지 올라올까요?”실제로 그런것 가지고 싸웠어요.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 비본질적인 것. 기독교 신앙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그것을 붙들고 있고 중요한 것을 놓쳐버리고 있는 사람들.

당신은 예수님을 만나셨습니까?

그 예수님을 통해서 내 인생이 변하고 내가 구원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내 인생이 바뀌어지는 놀라운 체험속에 들어가 계십니까? 이게 중요한 겁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주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전통과 형식에서 자유함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예수님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늘 이순간 내 삶의 장에 다가오시어 내 손을 잡고 나와 더불어 동행하시며 내 길을 인도하시는 놀라운 체험만 일어날 수가 있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본질을 붙들고 사는 신앙. 메시지를 붙들고 사는 신앙. 예수님 그리고 그의 말씀이 날마다 내 삶속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내 삶을 움직이는 이 놀라운 자유. 이 놀라운 환희, 이 놀라운 능력안에 살아가는 여러분과 저의 삶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동원 목사(용인 지구촌교회)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박종태목사 원글보기
메모 : 이동원 목사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