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고 간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6. 2. 9. 20:10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고 간 목사|성경 말씀 묵상

은혜 | 조회 63 |추천 0 |2016.02.08. 19:53 http://cafe.daum.net/seungjaeoh/J75F/160 

2월의 말씀 산책


     나는 19789월 학생으로 댈러스에 가서 친구인 송수석 목사를 만났다. 그는 나와 함께 전주의 기전여고에서 1967년부터 2년간 근무했는데 그때 나는 교무주임이었고 그는 교목이었다. 그 뒤 나는 대학으로 떠나고 그는 미국으로 와서 이민 목회를 하고 있었는데 내가 댈러스로 학생 신분으로 가서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십년만의 해후다. 이민 목회라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미국 교회(Preston Hollow Presbyterian Church)를 빌려서 목회를 하고 있었는데 한국인들은 너무 시끄럽고, 어디나 쓰레기를 버리고 김치냄새를 풍긴다고 미국 교회에서는 싫어하였다. 조금 교인이 모여들기 시작하자 새 땅을 찾아 교회를 옮겼다. 이민 목회자인 송 목사는 교인들의 종이었다.

   

    처음 자체 교회를 가지고 197510529명의 교인들이 텅 빈 예배당에 둘러 앉아 창립예배를 드릴 때는 뒤에서 문만 열려도 혹 새 교인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하고 교인들은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는 바울이 말한 것처럼 자기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예수를 위하여 자기가 믿는 사람의 종 된 것을 전파하고 있었다. 고국에서 조그마한 인연만 있어도 이민자를 부탁한다는 연락이 오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항에 나가 마중했으며 갈 곳이 없으면 자기 집에서 재우고 살 집을 찾아 주었다. 차가 길에서 서면 찾아갔고, 영어가 통하지 않아 연락하면 바로 출동했다. 아이들 학교입학, 은행계좌 개설, 차 구입 등 그는 한 교회의 목사가 아니라 이민 사회의 목사였다. 부부가 문을 잠가 두고 교인 심방을 가면 어린애들은 문 밖에 앉아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이를 본 교인들은 가끔 자기 집에 데려가서 놀게 했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살 때는 목사님 애들 옷이나 장난감도 같이 사 주기도 했다. 성경의 야고보서에 보면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2:18)”라는 말이 있다. 송 목사는 행함으로 믿음을 교인들에게 그렇게 보이고 있었으며 교인들은 그의 믿음의 열매를 보고 자랐다

     그는 너무 무리하게 교인들을 돌보고 사역을 위해 일하다가 건강을 잃고 드디어 댈러스의 베일러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19841110일이었다. 그는 피로에서 오는 간암이었고 너무 늦게 병원에 오게 된 것이다. 그해 10월 초부터 소화가 잘 되지 않아 유동식만 들었는데 1025일부터 28일까지 있었던 캔톤 오하이오의 부흥사경회는 모처럼의 부탁이었기 때문에 거절할 수가 없었다. 무리해서 갔던 집회지에서 10회의 설교와 성경공부를 진통제를 맞아가며 진행했다. 그는 귀가하자 28일 저녁, 사택에 장로들을 모아 놓고 10월 정기 당회를 2시간 반 동안 진행하였다. 그리고는 다음날 바로 오스틴에서 열린 34일의 평신도를 위한 지도자 수련회에 참석하였다. 이렇게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활동하느라 자기가 암에 걸린 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1118일 일반 병동에 옮긴 뒤부터는 교인들이 교대로 밤을 새며 목사님을 위해 기도하기로 했다. 내가 그를 지키기로 한 날은 22일이었다. 사모님과 황전도사가 그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 날은 어느 때보다도 기분이 좋았고 약간의 주스와 미음을 들었다고 기뻐하였다. ! 기도는 응답될 것인가? 그는 오래도록 앉아 나에게 이야기를 하였다. 그는 기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많이 하였다. 그리고는 약간 걸어보겠느냐고 권하였더니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좀 걸었다. 그리고는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사모님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는 갑자기 강한 경련을 일으키더니 숨이 막힌 사람처럼 발을 쭉쭉 뻗으며 몸부림을 하였다. 나는 얼결에 발목을 잡으며 의사를 부르라고 소리쳤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그는 바로 응급실로 옮긴 후 전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24일 아침 839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마흔 일곱 살의 젊은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그는 떠나면서 하얀 봉투 한 장을 남기고 갔는데 그것은 캔톤, 오하이오에서 받은 강사 사례비였다. 봉투도 뜯기지 않은 채였는데 이것이 종자돈이 되어 그 뒤 일주년 추모예배 때에 교인들은 5만 불의 수석 기념 장학금을 만들어 프린스턴 신학교에 장학기금으로 전달하였다. 지금도 장학금을 받은 학생으로부터 감사 편지가 온다고 한다.


     그는 그리 오랫동안 강대상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고 떠났다. 그러나 그가 이민자들을 정착시킬 때 보여준 사랑의 삶이, 또 그의 삶에 감동되어 그의 자녀들을 돌보며 선물을 전해 주었던 교인들의 자발적인 헌신이,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그의 수석장학금을 받은 사람들의 감사가 지금 1,000 여명이 넘는 댈러스 빛내리교회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를 주장한 마틴 루터는 야고보 서신을 진짜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폄하하였다. 그러나 깊은 믿음의 경지에 있는 사람의 행함은 그것이 믿음의 열매요 바로 삶으로 본을 보이신 주님의 모습이다. 확신하건데 지금은 씨만 뿌리는 설교의 단계를 지나서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는삶의 본으로 전도할 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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