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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참 사랑의길을 가라고 전해라 (3월 6일 사순절 넷쩨주일설교) / 서은철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6. 3. 6. 03:42

사랑의 길을 가라고 전해라 요일4:7-12

주신 말씀 요일4:7-12절을 중심으로 [사랑의 길을 가라고 전해라]는 제목으로 말씀이 선포 되어질 때 주님 주시는 놀라운 은혜의 시간되기 원합니다.

요한일서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관점에서 성도의 신앙과 생활을 다루고 있고

3:1-4:6절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도의 신분에 합당한 생활문제입니다.

본문은 세번째 단락 4:7-5:3절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사랑의 계명 실천문제를 다루고 있는 부분으로 고전13장이 사랑장이라면 본 단락은 사랑의 송가입니다.

세 번 째 단락인 4:7-5:3절은 6개의 사랑으로 되어 있어서 형제 사랑의 권면(A4:7-8,A'4:21-5:3) 으로 형제 사랑이 지속되어야 할 것을 말하고 있으며, 사랑의 증거(B4:9,B'20), 하나님 사랑의 우선함(C4:10, C'4:19), 온전한 사랑(4:11-13,4:17-18), 하나님의 임재(4:14-16)의 키아즘 구조입니다.

고전13장이 사랑의 실천적인 면에 강조를 두고 있다면 본 단락은 사랑의 신적 기원을 보다 강조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성도가 사랑을 해야 할 근거로써 7-8절은 사랑의 속성으로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사랑하라 말하고, 9-10절은 사랑의 계획으로 사랑의 근거로써 하나님의 참사랑이 독생자를 보내주신 즉 하나님이 먼저 인간을 사랑하셨음을 밝히고 있으며 11-12절은 사랑의 내용으로 선 순환되는 하나님의 사랑은 형제 사랑으로 온전히 경험할 수 있다 합니다.

성도가 참 사랑의 길을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전해야 할까요?

첫째로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고 전해라 (7-8)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고 전하라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Άγαπητοί)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요한 사도는 이 서신을 읽게 될 성도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있으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άγαπώμεν)는 말로 사랑에로의 초청을 말하므로 엄한 명령이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사랑을 함께 실천하자는 부드러운 다정한 권면으로 그 사랑은 지속적으로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라는 말로 사랑의 속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사랑은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즉 진실한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원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γινώσκει)에서 알다(γινώσκω)는 단순한 지적 인식이란 의미를 넘어서 경험적 지식이나 인격적 교류를 통한 전인적 지식을 의미합니다.

특히 기노스코라는 말은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자신들은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영적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던 것입니다.

몇 일 전 교황이 중남미를 순방하던 중 불 같이 화를 내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되었습니다. 물론 질서와 어린이의 안전을 헤치는 일을 하지 말라고 소리 지른 것이었겠지만 역시 사람 냄새가 나서 반갑기도 했지요 .

우리 주변에 자기들은 특별한 영계를 보는 능력이 있어서 기도 중에 자기들끼리 서로 교통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한 결 같이 이단 사이비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익추구단체의 수장들일뿐입니다.

아무리 영계를 주름잡고 다녀도 6계를 순환하며 자기정체성을 깨달아 해탈과 득도를 했다 해도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영적지식이 허구이며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어 무익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사랑은 하나님께 속할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하나님의 모든 행위는 사랑의 행위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사랑의 행위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서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부모가 되어 보지 못하고는 부모의 심정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나는 75년 소위 임관을 앞두고 5분 스피치 테스트를 하는데 “나의 약혼자”라는 제목으로 나는 군과 약혼했으니 결혼하겠고 영원히 헤어지지 않겠다 는 취지로 발표하여 5점 만점에 5점을 맞은 적이 있지요.

그런데 그 후 결혼하여 아이들을 낳고 키워 보니까 그때의 생각이 순수하고 아름답긴 했어도 유아적 발상이고 설익은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요.

그래서 12살 먹은 새신랑이 상투를 틀고 나면 어른 대접을 받아도 50이 되어 총각으로 늙어 죽은 사람은 송장이 되지 못하고 아장이었던 것이지요.

내가 아이를 사랑하지 않으면 잔소리를 하지 않아요. 잔소리는 사랑하고 관심이 있으니까 잔소리하는 것이지 듣기 싫어하라고 미워서 하는 소리가 아닌데 엄마와 딸은 그것을 가지고 평생을 티격태격합니다.

그래서 엄마는 뜨거운 주전자에 아이 손을 가까이 하면 앗 뜨거! 하며 경험하게 하고 조심하게 하며 하나씩 이치를 깨닫고 배우게 되어 사고를 예방할 수 있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모가 되어서야 부모의 심정을 알 듯, 형제를 사랑하는 일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아무리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해도 형제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그 사람은 거짓말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농부가 봄에 씨앗을 뿌려야 하는데 하고 생각만 하고 말만하고, 씨앗을 뿌리지 않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와서 수확할 때 왜 나는 수확할 곡식이 없냐고 불평하는 사람과 마찬가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형제를 사랑하심으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데 까지 나아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성도가 참 사랑의 길을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전해야 할까요?

둘째로 독생자를 주시어 하나님이 먼저 사람을 사랑하셨다고 전해라.

9-10절은 사랑의 계획으로 사랑의 근거로써 하나님의 참사랑이 독생자를 보내주신 즉 하나님이 먼저 인간을 사랑하셨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려고 독생자를 보내 주셨다고 전하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사랑 표현의 클라이맥스 입니다.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다고 하면 모든 인간은 이미 죽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완전 멸망하고 사라지고 없었을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가장 귀한 말씀을 한절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합니다.

여기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은 세인을 이렇게 사랑하사 땅에 발 딛고 사는 사람을 사랑하시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창1장에서 창조의 순서 즉 질서를 강조한 반면 창2:4-4:6에서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시는데 그 땅을 다스릴 사람에게 포커스가 집중되어 있습니다.

즉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갈 사람에게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사람이 살만한 세상 환경을 만드시고 마지막으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바로 천지라는 세상 환경이 아니라 세인 즉 사람이 살 수 있는 최적의 환경들을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달이나 우주천체의 별들은 다 황무지이고 얼음덩어리인데 지구만이 사람이 살 수 있는 물과 적당한 온도와 산소를 주시어 우리로 하여금 살 수 있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만들어주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이 지구는 순간에 훅 갈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항상 깨어 기도하고 마지막 때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야 될 줄 믿습니다.

지구 온도 1도만 올라가도 난리법석을 떱니다.

만약 지구온도가 10도쯤 오른다면 북극과 남극 그리고 히말라야등 고산지대의 빙하들이 녹아내려 생태계가 교란되고 바닷물이 해일을 일으키고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며 지진과 낙뢰등 급격한 혼란을 야기하여 인류의 대부분이 죽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오른 손으로 지구 환경을 보존하시며, 죄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자식을 사랑한다고 해도 자식을 위해서 자기 몸을 버릴 사람은 말은 그렇지만 실재로 많지 않다 합니다.

더욱이 자기 부모를 위해 죽을 각오로 효도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요.

부모가 노쇠하면 부모 모시다가 스트레스로 가정이 파탄 나느니 시설 좋은 양노원이라 요양병원에 보내어 전문가에 의해 케어 받는 것이 더 유익하다 합니다. 최근 들어 메스컴을 뜨겁게 달구는 사건이 부모가 자식을 살해하고 방치하고 유기하는 사건들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신 분이 있습니다. 자기가 아니라 자식을 죽일 수 있냐고요?

그럴 수 없어서 자기 자신이며 동시에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도록 하시고 직접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10절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응답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이 먼저 일방적으로 자원하여 보내주신 은혜요 선물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은 오직 인간을 사랑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일 뿐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보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십니다.

여기서 화목제(ίλασμόν)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위한 목적으로 드려지는 제사를 말합니다. 화목제에는 피의 제사가 필요한데 이 피의 희생제사를 드리기 위해 양이나 염소의 피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제사는 불완전한 것이어서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화목제로 드려지기 전까지는 계속적으로 반복되어야 했던 것을 , 하나님은 인간을 위한 온전한 화목제사를 계획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 값이 하나님 값으로 화목제이전에 속죄제물이 되셨고, 죄인의 모든 죄를 속죄하신 후, 화목제가 되셔서 하나님의 원수되었던 자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여기지 않던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설파하면서, 화목제물로 감당하신 십자가 사역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보내신 사건과 그로 인한 우리의죄에 대한 용서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으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셨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가 그분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명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깊이 감사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성도가 참 사랑의 길을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전해야 할까요?

셋째로 하나님 사랑은 형제 사랑으로 온전히 완성된다 전해라(11-12)

11-12절은 사랑의 내용으로 선 순환되는 하나님의 사랑은 형제 사랑으로 온전히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 실천의 근거로 하나님의 참사랑에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11절에서 이같이(οϋτως)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보내신 하나님의 구속 행위를 가리킵니다. 즉 이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희생시키기 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태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연약하고, 죄인이었고, 불의하고, 경건치 아니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원수 되었던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서 하나님의 가장 소중한 독생자를 내 놓으셨음을 믿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마땅하도다”로 마침으로 성도들에게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고 , 먼저 하나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설명한 후에 그 사랑을 입은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권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마땅하다(όφείλομεν)는 말은 빚을 진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갚아야 할 당연한 책임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로 마땅하다, 옳다, 당연히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같이 사랑하셨기에 우리도 당연한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법적 용어입니다.

의무적으로 사랑하는 자는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

참된 사랑을 실천하는 자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자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속에 있는 자입니다.

12절에서 이러한 사랑의 실천이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행위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마땅히 나타나야 하는 사랑의 실천이 없는 자는 이단자이거나 그리스도인에게 경고하고 있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되 하나도 없다 합니다. 역사상 하나님과 가장 가까웠던 사이인 모세조차 하나님 그 자체를 보지 못했다 합니다.(출33:18-23)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은 영이 맑아 하나님을 보았다고 유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가까이 하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 분이십니다.그러므로 하나님을 보는 자는 죽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8)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나타났고(9-10),

사랑을 실천하는 자에게 나타나게 되는데 이로써 하나님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2절에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라는 말은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그 속성상 미음과 증오가 있는 곳에는 머물 수 없는 분이십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기에 하늘 보좌에 계시면서 동시에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의 마음속에 거하시게 됩니다.

온전히 이루느니라(τετελειωμένη έστιν)는 당시 미술가들이 작품을 다 만든후에 마지막으로 더 이상 손댈곳이 없을 때 사용하던 표현으로 ‘마치다, 완성하다, 목표가 성취되다는 뜻입니다.

즉 성도들이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은 성도의 삶속에서 온전히 성취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사랑중에 거하시고 그의 속성이 절대적 사랑이라 할지라도 예수를 믿는 자가 삶속에서 그 사랑을 실행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은 온전히 나타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면서 33년을 100% 인간으로 사시면서 3년간의 공생애와 자신의 몸을 죄인들을 위하여 내던져 속죄제 화목제로 십자가 희생이라는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가 있었기에 하나님의 사랑은 더 이상 하늘에만 머물지 않고 우리 속에 이 땅에 내려오게 된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를 믿는 성도의 사랑의 실천이라는 구체적인 삶속에서 온전히 성취될 줄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성도가 참 사랑의 길을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전해야 할까요?

첫째로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고 전해라 (7-8)

둘째로 독생자를 주시어 하나님이 먼저 사람을 사랑하셨다고 전해라.

셋째로 하나님 사랑은 형제 사랑으로 온전히 완성된다 전해라(11-12)

우리가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능하며, 우리가 하나님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날 때 비로소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품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에 사랑하며 살 수 있습니다.

유일한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을 모신 자들만이 참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인 우리에게 사랑이란 특권이며, 동시에 책임입니다.

성도 한 사랑 한 사람이 이 사랑의 특권과 책임을 다할 때 의와 평강과 희락의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도록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사랑의 전령으로 부름 받고 사명을 받은 성도인줄 믿습니다. 아멘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서대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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