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당신은 아는가 감요섭 선교사를

성령충만땅에천국 2016. 7. 15. 14:10

당신은 아는가 감요섭 선교사를|성경 말씀 묵상

은혜 | 조회 49 |추천 0 |2016.07.13. 06:56 http://cafe.daum.net/seungjaeoh/J75F/179 

7월의 말씀 산책

    나는 미국에 있는 친구로부터 감요섭(Joseph Price Cameron) 교수가 3년 전 127일에 소천 했다는 말을 듣고 너무 가슴이 아프고 안타까웠다. 작고했기 때문에 계속 이멜을 보냈지만 소식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한국에 부인과 함께 1959년에 와서 한남대학에서는 1961년부터 3년 간 부교수로 있으면서 수학과의 전신인 수·물과를 신설했다. 나는 이 대학에 1963년에 편입했기 때문에 오래 만나지 못한 분이다. 그러나 나는 2004년 미국 여행 중 그를 만나보기로 했다. 안다는 것은 그 사람과 관계를 갖는 일이다. 한남대학교 수학과에서 29년간을 봉직했던 나는 은퇴 후 미국을 방문하자 노스캐롤라이나 주에 사는 나의 맨토였던 영문과 한미성(Melicent Huneycutt) 교수를 만나러 간 김에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수학과 교수도 만나볼 생각이었다. 1023일 방문해도 되느냐는 내 이멜을 받고 그는 곧 환영한다는 답을 해왔다. 그는 아들이 의사로 같은 마을에 살고 있었지만 홀로 자기 집을 지키고 외롭게 살고 있었다. 자기 집의 객실(guest room)을 비워두고 우리 부부를 맞이한 뒤 바로 자기 차로 자기가 졸업했으며 수학 교수로 있었던 시타델주립사관학교(The Citadel, The Military College)를 안내 하였다. 이곳은 기숙사에 입사하여 군사 교육을 받고 졸업 후 임관하는 곳이었으며 졸업생들은 1860년 초 남북 전쟁 때는 남군의 주력 부대였으며 세계 제이차대전 때는 대부분의 학생이 입대했으며 그 중 279명이 생명을 잃었다고 한다. 감요섭 교수도 33개월 현역으로 근무 했으며 이 학교를 졸업하자 조지아 대학에서 수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고 이곳에서 교수로 있었다고 한다. 그는 그 학교의 졸업생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사는 곳이 마운트 플레즌트(Mt. Pleasant)로 강과 북대서양으로 둘러 싸여 섬과 같은 곳이었다. 그는 그곳 터줏대감으로 그곳에 살면서 정원도 가꾸고 낚시질도 하며 은퇴 후 여생을 즐기며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뒤로 나는 그와 계속 이멜로 사귀었다. 가끔 증손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며 4대째 애들이라고 자랑했다. 그는 나보다 11살 위다. 그러나 이멜을 쓸 때는 자기는 나와 스승-제자의 관계였지만 친구라고 부르고 싶다고 말하며 자기의 외손녀가 가정파탄으로 이혼소송을 당하고 있다고 이를 위해 기도요청을 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2월 달에 마운트 플레즌트에 눈이 왔다고 사진을 보내오고, 200412월에는 무게가 5kg이 넘으며 길이가 57cm에 달하는 큰 고기(Red Drum;민어의 일종)를 잡았다고 뒤뜰에 걸어놓고 사진을 찍어 보낸 적도 있다. ”동풍에 고기가 물지 않는다고 누가 말했던가?“라고 말하며 바람 부는 날인데 큰 고기를 잡았다고 개가를 올린 것이다. 어쩔 때는 자기도 나만큼 한국어를 잘 구사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내가 좀 더 훌륭한 영어를 쓸 수 있게 도와주어도 되느냐면서 내가 보낸 이멜의 영어를 수정해 주기도 했다. 정관사와 부정관사는 미국 사람도 잘 틀린다면서.

그는 외로워하더니 목사 어머니 되는 부인과 결혼하게 되었다. 정확한 날짜를 알려 주지 않아 잘 모르지만 새 부인이 2009년 크리스마스 때 장식했다는 트리의 사진을 보면 어쩌면 그해에 결혼한 것 같다. 한 번은 201069일의 조선일보 카피를 나에게 보내며 무슨 내용인지 간단히 알려 달라고 하기도 했다. 그것은 자기 큰딸 쇼(Carole Cameron Show)에 대한 기사였는데 이 딸의 시아버지가 평양에서 태어나 한국을 고향처럼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버드대 철학과를 다니고 있을 때 한국전쟁이 일어나 해병 정보장교로 자원입대, 인천 상륙작전에 참여해서 공을 세웠는데 정보부대를 이끌고 서울 탈환 작전에 앞장섰다가 녹번동에서 인민군과 교전 끝에 28세로 사망했다는 기사였다. 이를 기념해서 서울 은평구 평화공원에 쇼 대위 동상제막을 하려 한다고 그 가족을 초청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감요섭 교수의 딸도 서울에 왔는데 그녀의 남편은 하버드대에서 동아시아 학을 전공했고 서울대에서 석사를 마친 뒤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가 남편은 7년 전에 사망했다는 기사였다. 그는 딸을 통해 대개의 내용을 들었겠지만 나에게 그 기사를 통해 자기 딸 자랑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딸은 미 대사관에 근무했으며 한국에 대한 저서 외국에 의한 한국 독립의 파멸(The Foreign Destruction of Korean Independence)"이라는 책도 냈다고 했다.

감요섭 교수는 잠시도 소식을 못 보내면 견딜 수 없는 성미여서 컴퓨터 바이러스로 이멜이 먹통이 되면 짜증을 내며 새로운 ID로 자주 바꾸며 나에게 연락했다. comcast.net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jody2946, joepricecameron, beaverup, joeboycameron, exponent 등으로 바꾼 ID들을 계속 알려 왔었다. 드디어는 너무 화가 났는지 20111월에는 바이러스에 대한 마지막 해결책; A final solution to the virus"이라는 재목으로 그것은 컴퓨터를 죽이는 일이라며 권총으로 컴퓨터를 겨누고 있는 사진을 보내왔었다.

내가 그에게서 받은 마지막 메일은 2011612일에 받은 것이다. “노년을 위한 철학이라는 ppt 동영상이었다. 1. 무의미한 숫자는 버려라. 연령이건, 몸무게건 개의치 말라. 의사나 걱정할 일이다. 2. 오직 즐거운 친구만 사귀어라. 3. 계속 배워라. 컴퓨터, 기술, 정원 가꾸기 등 열심히 해라. 게으른 공간은 마귀의 집이며 마귀의 이름은 알츠하이머다. 4. 단순한 것을 즐겨라. 5. 자주 웃어라. 길게. 크게. 6. 슬픔은 있을 수 있다. 참아라. 슬퍼하라. 이겨내라. 7. 네가 사랑하는 것으로 주변을 채워라. 가족, 애완동물, 추억이 되는 물건, 음악, 화초 무엇이든 채워서 가정이 네 피난처가 되게 하라. 8. 건강을 소중히 여겨라. 건강하면 유지하고, 나쁘면 개선하고, 개선이 안 되면 도움을 청하라. 9. 죄의식에 사로잡히지 말라. 산책이든 이웃 동네를 가든 외국 여행을 하든 무엇이나 해라 다만 죄책감이 느껴지는 곳에는 가지 말라. 10. 기회 있을 때마다 사랑한다고 말해라.

그 후로 그가 아파 그렇게 말하기 좋아하던 내용을 전하지 못하고 또 듣지도 못하고 있다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나는 그와 멀리 떨어져 있었었지만 마치 함께 사는 것처럼 동행하고 있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가까이에 있는 형제보다 더 알고 교제하며 지내고 있었다. 날마다 기도하고 지내면서도 나는 예수님을 그를 알 듯 알고 있었을까 예수님께 미안하기도 했다. 그렇게 가깝던 친구를 왜 오랫동안 소식을 모를 때 그의 안부를 수소문해서 알아보지 못했을까하고 후회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감요섭 교수를 잘 알 수 있는 동문에게 이 슬픔을 같이 나눌 생각으로 전화를 했다.

감여섭 교수를 잘 알지요?”

그럼, 내가 배웠는데

그가 글쎄 3년 전에 세상을 떠났데. 까맣게 몰랐지 뭔가.”

그래, 그분이 몇 살이나 되었지?”

90세였어.”

나는 그가 나만큼 슬퍼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말했다.

그래? 그럼 천수를 다하셨구먼. 호상(好喪)일세 그려.”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는 감요섭 교수에 대한 그의 반응이 왜 그렇게 서운했는지.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섣불리 전하다가 다 안다고 거절당한 기분이 되어 씁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