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수*이동원 목사+목사님들설교

[스크랩] 감사의 깊은 원천(딤전1장12-20) / 한경직 목사(서울 영락교회)

성령충만땅에천국 2016. 8. 14. 20:15

감사의 깊은 원천(딤전112-20)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이미 읽은 말씀 가운데서 디모데전서 112절과 13절 상반절을 봉독하였습니다.

 

11월은 추수의 달이요, 또 감사의 달입니다.

우리 농민들은 1년간 농사를 잘 짓고 추수를 마친 후에 오곡백과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 다른 방면에서 사업을 하는 이들도 지난 1년간의 하나님의 축복을 회상하면서 감사를 드리는 달입니다.

 

성경에는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하였습니다.

또 감사를 더하고, 더하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다음 주일이 1년에 한 번씩 지키는 감사주일입니다.

또 이 주간을 감사주일 주간으로 지키며, 특별히 하나님의 축복을 회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성경을 상고하여 이 감사한 마음의 원천이 어디 있는지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읽은 말씀 중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감사를 찾아봅니다. 그는 기록하기를,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그 감사한 마음이 어디서 솟아오르는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사실 그는 예수를 알기 전에 예수를 훼방하였습니다.

핍박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 이들에게 폭행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셨으며, 용서하실 뿐더러 그를 충성되이 여겨서 그에게 그리스도를 봉사할 수 있는 직분을 맡기셨으며, 그뿐 아니고 그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까지 주신 것을 생각할 때에 그는 마음에 언제나 감격이 넘친 것입니다.

 

조금 내려가 그는 15절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는 자기는 이렇게 죄를 많이 지은, 말하자면 죄인의 괴수인데, 주님께서는 그 많은 죄를 사하여 주실 뿐더러, 그를 충성되이 보셔서 사도직까지 맡기셨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기에 그의 감격의 원천이 있습니다.

곧 그는 자기 자신의 장점을 보는 것보다도 단점을 보았고, 그가 주를 위하여 성취한 여러 가지 큰일을 본 것보다도 그가 전에 지은 자기의 죄를 먼저 보았습니다.

곧 사도 바울은 이렇게 무한히 겸손한 사람으로서 자기의 죄를 깨달을 때에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얼마나 더 크고 더 위대하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이 깊은 원천으로부터 언제나 감사한 마음이 솟아오른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뿐만이 아니고, 모든 참된 성도의 공통한 체험인 줄 생각합니다.

감사한 마음의 깊은 원천은 첫째는 자기의 과거 죄를 깨닫는 겸손이요,

둘째는 이렇게 큰 죄인이라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용서하여 주신 그 크신 은혜를 또한 깨닫는 겸손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주를 위하여 많은 고생도 하였고 위대한 일을 하였지만, 그 자신에 대하여 그는 항상 어떻게 생각하였는지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고린도전서 159절을 보면 그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말했습니다.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에베소서 38절에는, 나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니라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나는 죄인의 괴수입니다.” 고백을 했습니다.

 

이렇게 무한히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에 언제나 감격의 마음이 솟아오른 것입니다.

감격의 생각은 이렇게 겸손한 마음 밭에 자라기도 하고 또한 피는 아름다운 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직분을 가진 이들, 책임을 맡은 이들도 많이 계십니다.

우리가 이 받은 바 책임과 직분에 대해서 얼마나 감격스럽게 생각합니까?

그것은 내가 얼마나 나의 죄와 단점을 보는 겸손한 사람인가, 그리고 그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또한 얼마나 깨닫는가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이 겸손에 정비례가 되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더 많습니다.

 

반면에 마음이 교만해서 자기의 허물과 죄를 보지 못하는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물론 깨닫지도 못하고 감사하지도 아니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대해서 불평과 불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겸손은 감사의 깊은 원천이올시다.

 

그리고 창세기 329절과 10절에는 다음과 같은 야곱의 기도가 있습니다.

자세히 들어보세요.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가나안 땅에서 드린 기도의 일절입니다.

 

여기에 두 가지 주의할 점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첫째는 야곱이 친히 말한 대로 자기는 하나님의 모든 은총과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자기 과거의 허물과 죄를 생각하며 자기의 부족을 깨닫는 그의 겸손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가 본래는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다고, 곧 많은 축복을 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야곱이 소년으로서 지팡이 하나만 들고, 지금 말로 하면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요단강을 건넜었는데, 이제는 많은 짐승의 떼를 가지게 되었으니 이것을 하나님의 축복임을 깨닫고, 그의 마음은 감격에 사무쳤습니다.

 

이와 같은 야곱의 경험에서 우리는 감사의 원천을 하나 더 발견합니다.

곧 그는 겸손히 자기의 죄와 허물만 깨달을 뿐더러, 과거에 자기가 얼마나 비천하였는데, 이 축복을 받은 것을 기억할 때에 그는 감사의 마음이 사무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겸손히 과거의 자기의 비천한 처지를 돌아볼 때에 감사치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겸손히 자기의 과거의 비천한 형편을 돌아볼 줄 아는 이는 언제나 감사한 마음이 떠나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네가 배가 부를 때에 하나님을 잊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배가 부를 때에, 과거의 배고프던 경험을 돌아볼 줄 아는 이에게는 언제나 감격이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과거의 비천한 생활을 겸손히 돌아보는 사람은 감사한 마음이 떠나지 아니합니다.

겸손히 지난 날의 비천한 때를 돌아보는 마음은 감사의 깊은 원천입니다.

 

그런데 어떤 청년이 말하기를, 아 영락교회 와 보면 영락교회 교인들은 감사한 생각이 많은 모양인데, 자기는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고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사실 지금 20대 청년들은 그 이유를 잘 모를 겁니다.

그러므로 잠깐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도 아마 좀 필요할 줄로 생각해요.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영락교회 교우들은 그 대부분이 이북에서 넘어온 피난민들입니다.

아신 바와 같이 이북에서는 예배의 자유가 없습니다.

지금 이북에는 공공연히 이렇게 모여서 예배하는 곳은 한 곳도 없습니다.

 

몇 해 전에 발간된 <북한총감>이라는 책을 보니 평북 용천군 어느 집단농장에서 일요일마다 결석하는 이가 특별히 많은 것을 이상스럽게 생각을 해서 공산당 비밀경찰을 동원해서 조사하여 보았더니, 그들이 그 이유는 여러 가지 보고했지만, 그 집에 가보니 집에는 없고, 외딴 조용한 집 혹은 산골짜기에 가서 4~5인씩 모여서 비밀히 예배하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이런 것을 500여 채나 발견했다고 합니다.

 

공산당들은 이들의 비밀지도자 이만화 목사와 그의 동지 10여 명을 잡아서 사형에 처했다고 했습니다. 이북의 사정은 이러한데, 이 남한에는 이렇게 신교의 자유가 있어서 예배를 보게 되니 어떻게 감사치 않을 수가 있습니까?

 

평북 박천에서는 어떤 국민학교 여교사가 일요일 오후에 아이들을 모아놓고 다른 과목도 가르치면서 찬송가를 몇 장 가르쳐 주었다가 숙청을 당했다고 하는 사실 보도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남한에서는 마음대로 주일날 교회학교를 운영할 수 있을 뿐더러, 주간학교까지 주간에 운영하면서 찬송과 성경을 마음대로 가르칠 수 있으니 어떻게 감사치 않을 수가 있습니까?

 

벌써 70여년이 지났습니다. 6.25때에 이 공산당들은 남한에 와서 우리의 자유를 빼앗으려고 대거 침략한 것입니다. 중공도 가세하였습니다. 그때에 우리의 우방 미국을 비롯해서 16개국의 자유 우방들이 우리나라에 십자군을 보냈고, 우리의 국군과 같이 용감히 싸웠기에 이 땅에 오늘날 이 자유가 유지된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아는 우리로서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으며, 또 우방 제국에 대해서 감사의 생각이 없을 것입니까?

 

지금 청년들이 태극기를 바라볼 때에 어떠한 심정으로 보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제가 오래 전, 1925년 처음에 미국에 갈 때에 일본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고 10여 일이 지나서 아침 일찍이 호놀룰루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하루 머물고, 저녁에 떠난다고 하는 말을 듣고 저는 내렸습니다. 마침 어떤 친구가 있어서 저를 안내해서 그때 처음으로 호놀룰루 구경을 했는데, 제일 먼저 데리고 간 곳이 하와이에 있는 한인 국민회 사무실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한인 국민회 사무실 문을 처음 열고 들어서니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태극기였습니다. 그 안에는 독립선언서를 잘 써서 붙여놓았습니다. 저는 그 태극기를 보고 문자 그대로 통곡했습니다. ? 그때에는 이 땅에서는 태극기를 띄울 수 없을 때입니다. 일본시대에.

 

3.1 운동 때에 이 태극기를 갖고 나왔다가 매를 맞은 사람도 많고, 감옥에 들어간 사람도 많고, 죽은 사람도 많습니다.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로서 태극기가 높이 바람에 펄펄 부는 것을 볼 때에 어떻게 감사치 아니했겠습니까?

태극기는 자유의 상징입니다.

태극기는 우리 국군 장병을 비롯해서 자유를 사랑하는 세계 청년들의 피를 뿌린, 그 피밭에 세워졌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기독 청년들이 십자가를 무슨 심정으로 바라보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저는 지난 수요일에도 전주 예수병원 헌당식에 갔다가 돌아올 때에 웬만한 동네에는 조그마한 예배당이 있고, 예배당 위에는 작은 십자가가 있는 것을 바라보고 그 십자가를 볼 때마다 말할 수 없는 감격이 제 마음 가운데 느껴졌습니다.

 

? 그것은 간단히 말하면 두 가지인 줄 압니다.

하나는 나의 신앙 때문입니다.

내가 역시 죄인의 괴수인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내 죄를 속량해 주셨고, 나에게 이 직분까지 맡기시니 얼마나 감사한가?

 

그러나 또 다른 이유도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게 무언지 압니까?

이북에는 이런 십자가를 지금은 하나도 볼 수 없습니다.

전에 우리가 이북에 있을 때에는 이런 십자가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도 볼 수 없습니다.

사실 이북의 20대 청년들은 십자가를 한 번도 못 본 것입니다.

그래서 인민군에게 십자가를 좀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 교회에서 저 철원 고지에 100여만 원을 들여서 큰 십자가를 세운 이유도 여기 있는 겁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어떻게 감사치 않을 수가 있을 겁니까?

 

지금 기독 청년들이, 우리 영락교회의 청년들이 이 예배당을 들어올 때에 이 예배당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가지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도 또 우리 가운데 저와 같이 느끼는 분도 많은 줄 압니다.

저는 언제든지 어디 갔다가 정문을 들어올 때에는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면서 들어옵니다. ?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본래는 이곳이 천리교 우상 숭배하던 곳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본래는 이곳에 이런 예배당이 없었습니다.

저 조그만 예배당에서 예배하다가 너무 좁아서 사람들이 많아 함께 예배를 볼 수 없어서 여기 산을 뭉개고 여기서 천막을 치고 예배를 보았습니다.

겨울에는 너무 춥고 여름에는 너무 더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견딜 만합니다.

장마 때가 제일 급했습니다.

한번은 예배를 보는데, 비가 내려 쏟아져서 설교를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 설교할 수 없으니 그저 우리 머리 숙여 기도합시다.”

온 교우들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시작은 기도로 했지만, 조금 후에 보니깐 전부 울음소리밖에 다른 소리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이 예배당을 짓기 위해서 이북에서 올 때에 가지고 온 가락지를 바쳤고, 시계를 바쳤고, 심지어 밤에 덮을 이불까지 바쳐서 이 예배당을 지은 겁니다. 자유시장이니 이런 시장이니 해서 종일 장사를 해서 자기는 죽을 먹으면서 조금 이()가 나면 전부 모아서 이 예배당을 짓기 위해서 갖다 바친 자매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렇게 지어서 예배당이 되었습니다.

이런 것을 아는 우리에게 어떻게 감사함이 없겠습니까?

 

사실 우리 예배당 저 앞의 기념비를 여러분 보셨지요?

김응락 장로 같은 이는 이 예배당을 찾기 위해서 수복된 이후에 제일 먼저 이 뜰에 들어왔다가 순교를 당한 것입니다.

이렇게 이 교회가 된 까닭으로 우리 영락 교우들은 비록 멀리 수원에 갔을지라도, 주일날은 꼭꼭 이 예배당을 찾아옵니다.

멀리 인천에 살면서도 주일날은 예배당을 찾아옵니다.

어떻게 감사치 않을 수가 있어요?

감사한 마음은 피난민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도 오는 것입니다.

 

성경 한 절을 더 소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욥기 121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돌아갈지어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어다

여기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압니다.

 

욥은 동방의 의인이라고 하는 말을 듣는 어진 분입니다.

자녀도 많고 재산도 많은 다복한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알 수 없는 이유 아래서 일조에 재산 다 없어졌습니다. 자녀까지 다 잃었습니다. 이런 극히 암흑한 비극의 순간에 욥이 고백한 말씀이 이 말씀이올시다.

 

이 말씀 가운데 그는 첫째로 자기는 적신으로 나왔으니 적신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둘째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시고 또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취하시니 오직 하나님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욥의 깊은 신앙을 우리는 찾아봅니다.

인간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한 나그네인 것을 알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만물의 소유자이시요, 우리 인간은 다만 잠깐 동안 물건을 맡아서 쓰는 청지기일 뿐이라는 깊은 신앙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타나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많은 곡식이 자기의 소유라고 생각하지는 아니했습니다.

모든 물질은 물론 심지어 자기의 자녀들까지 하나님께 속하는 것을 깨닫고, 자기는 그저 잠깐 동안 맡은 한 청지기뿐인 것을 기억했습니다.

이런 신앙이 있으므로 그는 그러한 때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였습니다. 감사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거 모든 참된 성도들의 신앙입니다.

이것이 다니엘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사자굴에 던지울 것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을 향한 창 앞에서 기도와 감사를 계속한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순례자들의 신앙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처형장에 나가면서도 찬송을 부르며 나간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 내가 가진 물질, 나의 자녀, 심지어 나의 생명까지 하나님의 것임을 아는 참된 신앙이 감사의 깊은 원천이 됩니다. 이런 신앙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사실 피난민 가운데는 38선을 넘어올 때에 욥과 같이 있던 재산을 전부 다 잃어버렸습니다.

또 어떤 이는 가족도 전부 잃어버렸습니다.

문자 그대로 적수공권으로 이곳에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아오고 감사히 사는 것은 욥과 같은 신앙을 가졌기에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욥의 신앙은 감사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다.

감사한 마음은 겸손히 나의 허물과 죄를 깨닫고,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기억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감사한 마음은 나의 지난날의 비천한 때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크신 축복을 깨닫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감사한 마음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확실히 아는 참된 신앙에서 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아버지시여, 저희들에게 바울의 신앙, 야곱의 신앙, 욥의 신앙을 주셔서 언제든지 감사한 마음으로 주를 섬길 수 있는 축복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한경직 목사(서울 영락교회)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박종태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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