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김준곤 목사를 회고한다

성령충만땅에천국 2016. 9. 18. 19:27

김준곤 목사를 회고한다|성경 말씀 묵상

은혜 | 조회 35 |추천 0 |2016.09.14. 09:55 http://cafe.daum.net/seungjaeoh/J75F/186 

9월의 말씀 산책


이번 929일은 김준곤 목사가 돌아가신 7주기이다. 작년 제 6주기 추모식 및 민족복음화의 꿈기념비 제막식은 102일 오전 서울 종로구 부암동 C.C.C.본부에서 열렸다. 지금은 그의 꿈은 비석에 새겨져 문자로 화석화 되었지만 이 비석을 와서 보는 사람마다 그 문자가 다시 살아 나와 성령의 폭발을 일으켰던 엑스플로’74의 역사를 재현해서 270만의 개신교인이 1,000만이 되었던 그런 복음화의 불씨가 한 번 더 살아나기를 기원한다.

나는 대전에 있는 한남대학교에서 C.C.C.의 지도교수로 대전의 진공열 대표 간사와 함께 지도자 세미나나 참석하며 방관자 같은 삶을 살았다. 그러나 나는 엑스플로’74 행사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그 뒤 바로 미국에 학위 과정을 하러 갔는데 행운으로 내가 장로로 시무하는 댈러스 빛내리교회(당시 달라스장로교회)에 김 목사를 강사로 초빙하여(1983.5.26.-29.) 큰 은혜를 받은 바 있다. 생각해 보면 내 주변에는 김 목사와 가까웠던 많은 분들이 있었다. 미주 홀리클럽 회장으로 있는 L.A.의 김경수(치과 의사) 장로는 내 처조카이며 그의 부인 노경자 권사는 김 목사의 비서 출신이다. 또한 댈러스 교회에 전도사로 와 있던(1986-1998) 김은자 전도사도 김 목사의 비서였다. 그녀가 순출판사에서 목사님 제자들의 글을 모아 나와 김준곤 목사 그리고 C.C.C."라는 책을 출판하려고 할 때 내가 그녀의 글 윤문을 해 준 일이 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녀의 원고는 실리지 않아 매우 섭섭하였다. 또 내 사위 김성종 장로는 순천지구 나사렛으로 그의 부친 김용환 장로가 팔순을 맞았을 때 순천지구 나라렛형제들이 김 목사를 초청한 일이 있었다. 김 장로는 순천의 C.C.C. 회관의 대지를 기증했을 뿐 아니라 그 뒤로도 나사렛형제들의 활동을 오랫동안 적극 도왔기 때문이다. 나는 큰 일로 너무 바쁜 몸인 김 목사가 소천되기 11개월 전의 허약한 몸으로 서울에서 순천까지 한 마리 양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와 준 그 인정을 잊을 수 없다.

엑스플로’74 때 외국인 전도요원 삼천 여명의 총 지도자였던 닐스 베커(Nils W. Becker) 목사가 쓴 “Fireseeds from Korea to the World(한국에서 세계로 퍼진 불씨)”라는 책을 나는 뒤늦게 사위를 통해 보게 되었다. 거기에 보면 김 목사가 6·25 때 부인과 딸을 데리고 고향인 신안군 지도면으로 피난해서 공산주의자로부터 아버지와 아내가 곤봉과 죽창으로 사살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자기도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난 이야기가 나온다. 살아난 뒤 김 목사는 원수를 갚으려는 증오심만 있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기도 구원의 은혜를 입은 것을 깨닫고 공산주의자인 마을 지도자에게 복음을 전하러 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의 간절한 진심 때문에 공산주의 지도자는 눈물로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했다. 그런데 얼마 후 토벌군 300명과 함께 국군 장교가 상륙했다. 이번에는 피해 가족들이 원수를 갚겠다고 아우성이었다. 김 목사는 공산당원들을 용서하라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가족을 잃고 분노한 주민들은 김 목사도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며 그를 처형하라고 소리 질렀다. 그는 처음엔 공산주의자들 때문에 죽을 뻔했는데 이번에는 반공 자유진영 군중 때문에 죽음에 직면한 것이었다. 전 생애를 통해 그의 머릿속은 민족복음화가 전부였다.

김 목사는 후에 독재정권과의 유착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어머니처럼 하나밖에 없는 우리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1958년 한국대학생선교회를 설립하고 대통령 조찬기도회(후에 국가조찬기도회;1966)를 통해 박정희 대통령과 친분을 갖지 않았다면 전군신자화운동(1969)으로 군부대마다 군목을 두고 일선에 있는 군인들을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무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민중들의 대규모 집회를 가장 두려워하던 독재정권 하에서 외국인을 포함한 32만명의 전도요원 훈련과 100만 명이 넘는 밤 집회를 여의도 광장에서 해 낼 수 없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특히 엑스플로’74(1974. 8.13 - 18.) 기간 중 8·15 경축식 때 육영수 여사의 피격 사건이 있던 비상시태 속에 이 집회를 은혜 속에 어떻게 마칠 수 있었겠는가? 이 엑스플로’74는 국내외가 놀란 기적이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1907년 평양 대부흥 이래 최초의 가장 큰 성령 폭발이었다. 이 때를 기해서 놀라운 교회성장이 있었던 것은 통계 숫자가 말해 주고 있다.

김 목사는 많은 부정적인 비판을 받고 있다. 세상에서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적과 동침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불의의 방법을 용인해야 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 앞에 모두 죄인이며 의롭다고 자고(自高)할 수 없다. 죄인이 어떻게 죄인을 심판할 수 있겠는가? 모두 죽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 김 목사는 신촌의 세브란스 병원에서 291111분에 소천했는데 무의식중에도 1212분에 눈을 감고 싶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죽어 주님 앞에 서면 미안해서 분부하신 것을 온전히 이루지 못하고 왔다고 머리를 숙이고 속죄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럼 주께서 그를 찢고, 치는 일만 하지 않고 측은한 생각으로 착하고 충성된 종아 내가 네 마음을 안다.”라고 하시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여기 아쉬운 마음으로 비서로 수고 했던 김은자 전도사의 회고를 올린다.

 

C.C.C.간사가 되어서였습니다. 제가 모시고 바라보는 목사님은 항상 마음속에 주님이 가득 채워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그리스도가 연인인 것처럼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셨는데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주님 생각뿐이셨습니다. 그 분을 뵈면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그리스도의 성령의 계절이 임하게 하자고 예수, 혁명, 성령의 제3 폭발을 외치는 모습이 눈에 선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차를 타고 가실 때나, 회의를 하실 때나, 또 누구를 만나 담화를 하실 때에도 자주 수첩을 꺼내어 무엇인가 기록하시었는데 이것은 그분이 민족 복음화를 위해 늘 기도하시던 중 주님으로부터 귀한 음성을 들을 때마다 메모해 놓으시는 습관인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설교에 영력이 있는 것도 이때 들었던 주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들려오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지금도 그 분을 생각할 때 가장 많이 떠오르는 것은 그분이 묵상하시고 기도하시던 모습입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자리를 떠나 산으로 가시든가 조용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우리 간사들을 훈련하실 때 언제나 강조하셨던 것은 성령보다 앞서지 말고, 기도보다 앞서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엑스플로’74, 민족복음화 운동을 계획하시면서 너무나 많은 장벽들과 사탄의 방해가 주님의 사역을 가로막는 것을 아시고 전국 간사들을 서울로 불러 교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간사들에게 이 대회에 대해 염려되는 일, 안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 사탄의 방해 등 생각나는 대로 말하라고 하시고 한 간사에게 그것을 모두 받아쓰게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였으나 누군가가 “3백 명 숙식도 어려운데 30만 명의 숙식은 절대로 안 됩니다.”라고 말하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여름인데 전염병이 돌면 누가 책임집니까?”, “교통사고가 안 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등등 제 기억으로는 그 때 가장 문제가 되는 부정적인 제목은 75가지나 되었다고 기억됩니다. 이 때 목사님은 이 문제들을 하나하나 읽으신 뒤 여러 간사들에게 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들을 해결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평소에 고백해 왔던 우리는 아무 대답도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집회를 성공적으로 치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사람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목사님은 우리를 한번 돌아보신 뒤 이 문제를 두고 기도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문제를 읽고 통성 기도하고 또 한 문제를 두고 기도하고. 우리는 이렇게 중간에 힘들면 찬송을 불러 가며 끝까지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오래 기도했는지 아마 밤을 샌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리고 나서도 좀처럼 사탄의 방해가 줄지 않자 40일 금식기도를 선포하시고 희망하는 간사들은 동참하시기를 권하셨습니다. 찬송, 성경 읽기, 기도, 운동, 휴식 등을 섞어 가며 따라온 간사들을 격려하시며 금식 기도를 하시는 모습은 눈물겨울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정성을 드려 준비하며 기도하시는 모습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분명 이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는 확신까지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미쁘시고 신실하셨습니다. 걱정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해 달라고 기도했던 75가지 제목에 다 긍정적인 응답을 해 주셨습니다. 들어주시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단 한 가지는 행사의 둘째 날, 815, 해방 기념 예배의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비가 오기 시작한 일입니다. 기자들은 비가 멎을 기세가 없이 점차 심해지자 저녁 집회를 취소해야 하지 않느냐고 확답을 하라고 성화였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계속 기도만 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는 집회는 중단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기자들은 분명 큰 사고가 날 것이라고 말하며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초조한 마음으로 8시 저녁 집회까지 비가 멎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는 멎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눈을 의심하게 한 것은 우산을 받쳐 든 성도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늘어나기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더니 그 광장을 꽉 메웠습니다.

우중에 집회는 만 명의 성가대 합창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집회에 열기가 더해 가자 한 사람 한 사람씩 우산을 접는 것이 보이더니 우산을 다 접어 바닥에 놓고 빗물이 고인 바닥에 성도들이 그냥 앉는 것이 보였습니다. 기자는 물론 우리 간사들도 너무 놀라 아연해 졌었습니다. 빗속에서 박수 치고 찬송하며 말씀을 경청하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마음 깊숙이에서 용솟음쳐 올라오는 물줄기처럼 기쁨과 감격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쓸어 내려가는 느낌을 체험했습니다. 드디어 집회는 끝났습니다. 그들은 퇴장할 때도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쓰레기도 남기지 않고 돌아갔습니다. 어떤 군대가 이렇게 질서 정연할 수가 있을까? 사령관도 보이지 않는데 누가 명령해서 이렇게 순종하며 따르는가?

이 광경을 본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신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성령의 폭발이 오히려 이 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한 가지 제목의 기도만 안 들어주셨는지를 우리는 뒤늦게야 깨닫고 김 목사님의 영도력에 다시 한 번 놀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빠져 나올 때 홍해를 가로막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깨닫게 함에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사건은 또한 기도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우리에게 세 번 닭이 울 때 베드로를 회개시킨 것보다 더 가슴 아픈 감격과 눈물의 회개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저는 이 사건 없이는 김준곤 목사님을 회상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모세가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홍해를 향해 지팡이를 드시던 이 시대의 위대한 지도자 김준곤 목사님을 이 사건과 함께 늘 보며 살게 됩니다. (1995.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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