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하나님의 음성(콩트)

성령충만땅에천국 2016. 10. 8. 17:46

하나님의 음성(콩트)|성경 말씀 묵상

은혜 | 조회 60 |추천 0 |2016.10.08. 07:21 http://cafe.daum.net/seungjaeoh/J75F/188 

10월의 말씀 산책

 

   최 교수는 미국으로 안식년을 떠나면서 중학교 3학년의 외아들을 데리고 갔다. 한 일 년쯤 그곳에서 영어 공부도 시켜서 데려올 생각이었다. 한국보다 1년을 낮추어 봄 학기부터 미국 중학교에 편입을 시켰는데 여름방학이 되자 다니던 마을 교회에서 23일로 중·고등부 수련회가 있는데 그곳에 참석하고 싶어 했다. 오래건 주의 그 시골 교회는 여러모로 시설이 낙후한 교회였는데 수련장도 시원찮은 곳임에 틀림없었다. 야영을 한다는데 모기도 많고 강사도 시원찮고 찬양이나 기도 훈련도 한국의 서울에는 비교도 안 될 것 같았다. 특히 최 교수의 외아들 한별은 변비가 있어서 아침밥을 채소와 함께 꼭 먹어야 하는데 텐트를 친 야영장에서 그렇게 먹일 수가 없는 일이었다. 미국에 와서도 아파트에 비데가 없다고 불평하던 애였다. 그가 어렸을 때 시골 교회에서 외할아버지 7순 잔치에 간 일이 있었는데 그 교회에는 좌변기가 없었다. 그런데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발을 동동 구른 일이 있었다. 다행히 여자 화장실에 좌변기가 있어서 밖에서 어머니가 망을 봐 줄 테니 갔다 오라고 했지만 영 말을 듣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 교회 목사님 사택으로 가서 용변을 마쳤던 애다. 그래도 아들 한별은 따돌림을 당하고 싶지 않다고 우겨서 핸드폰을 손에 쥐어주고 수련회에 보냈다.  

최 교수는 이틀 밤 째에는 너무 궁금하고 걱정이 되어 전화를 했는데 핸드폰이 꺼져 있어 메시지만 남겼다. 그런데 아무 회답이 없어서 교회에 전화해 보았더니 그날은 수련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보냈는데 거기서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자고 독도법(讀圖法)으로 지도를 읽어 다음날 수련장으로 찾아오게 되어 있는 프로그램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몇 년 째 해오고 있는 수련회 행사로 이 때까지 아무 탈이 없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각 팀에는 각각 휴지 말이 한 통과 손전등, , 그리고 토기 한 마리씩을 주어서 지금쯤은 팀장의 지시에 따라 불을 피우고, 토끼를 잡아 잘 요리해서 먹고 있을 것이니 안심하라는 것이었다. 그곳에 화장실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야영장에는 화장실이 없어 어디서나 후미진 곳에 구멍을 파고 용변을 마친 뒤 삽으로 덮어버린다는 것이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헤매며 살았던 것처럼 이런 험한 훈련은 문화적인 삶 이전의 자연에서의 삶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훈련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한국 수련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워서 땀만 나도 애들이 신경질을 부리고 즐거운 레크리에이션으로 즐겁게 해주고 그때 나누어주는 푸짐한 경품을 탐해서 참석하던 수련회였다. 최 교수는 한국과는 다른 이곳 수련회가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다음날 전화가 왔는데 이때는 독도법으로 본부를 찾아온 얘들과 부모가 만나는 상봉의 자리를 갖는다는 연락이었다. 정신없이 차로 가서 아들을 만나보니 얼마나 기쁜지 알 수가 없었다. 50년 이상이나 헤어져 있다가 만나는 남북 이산가족의 만남보다 감격이 더 컸다. 그런데 아들은 최 교수가 걱정했던 것과는 딴판으로 명랑하고 정말 아무 일이 없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아들을 만나고 보니 막상 그를 맡기고 자기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돌봐 주셨다는 느낌이 확 다가왔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니? 변비는 괜찮았어?”

아주 기분 좋아. 내년에도 여기서 산다면 이번에는 내가 팀장 한 번 하고 싶어.”라고 아들은 말했다.

식사가 끝나고 간이무대에서 애들과 부모의 상봉에 대한 감회의 발표회가 있었다. 어떤 아버지는 자기 딸을 어떻게 사랑해야 정말 사랑하는 것인지 참으로 사랑하는 방법을 이제야 알았다고 말하고, 딸은 아버지의 사랑을 처음 알게 되었다고 서로 껴안고 울기도 했다. 이번에는 한별이 불려 나가 수련회의 소견 발표하는 시간이었다.

 

저는 처음에 많이 걱정하고 떨었습니다. 알지도 못한 먼 장소에 우리를 버스로 태워다 내려놓고 핸드폰도 다 회수해 가버리자 산 중에 홀로 떨어진 것처럼 외롭고 울고 싶었으며 어머니가 무척 보고 싶었습니다. 오직 하나 의지 할 수 있었던 핸드폰도 가져가 버린 것입니다. 텐트를 치고 친구들과 누웠습니다. 그러나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9시가 되자 다 취침하라고 불을 꺼 버렸습니다. 화장실도 가지 못했습니다. 풀벌레 소리만 처량하게 들려왔습니다.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저는 어두워져 가는 해변 가에 홀로 남겨진 고아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갑자기 하나님밖에 의지할 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기도했던 대로 기도했더니 마음에 평화가 왔습니다. 이 모든 자연은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만들어서 우리와 함께 살게 하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르르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꿈에 너무 배가 아팠습니다. ‘예수님. 내가 너무 배가 아픕니다.’ 하고 뒹굴었더니 어떤 부드러운 손이 내 배를 어루만졌습니다. 아프던 배가 가라앉았습니다. “내가 네 배를 났게 해주겠다.” 그건 분명 예수님의 목소리였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기분이 좋아 일어났습니다. 집에서처럼 성경도 별로 안 읽고 기도도 그렇게 정성들여 하지 않았는데 이 산 중에서 왜 저에게 예수님은 나타나셨을까요? 그분은 제가 성경을 열심히 읽고, 기도를 성실하게 하고 있는 것보다 먼저 제가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언제나 저와 함께하시고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아들의 간증을 듣고 최 교수는 흐르는 눈물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첫째 놀란 것은 아들이 영어로 유창하게 이 모든 체험을 당당하게 이야기 한 것이다. 둘째는 예수님이 아들에게 음성을 들려주신 일이다. 자기가 일 년간 기도학교를 다니면서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해 다라고 그렇게 소원했는데 끝까지 안 들려주신 음성을 아들에게 들려주신 것이다. 지금까지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은 후련함을 느꼈다. 그때까지 잘 예수를 믿어보려 했는데 자기는 너무 답답한 신앙생활을 했다. 늘 자기를 괴롭히던 질문은 새벽기도는 잘 하고 있는 것일까? 십일조는 온전히 내고 있는 것일까? 성경통독을 잘 못하고 있는데 그래도 성실한 기독교인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을까? 그런 것이었다.

그녀는 남들처럼 기도를 잘 하고 싶어서 기도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자기는 주님의 음성을 직접 듣지 못했으며, 방언도 받지 못했고, 신유의 은사도 받지 못했다. 그러면서 어떻게 예수님의 신실한 종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말인가? 하고 속상했었다. 그런데 아들의 간증을 들으면서 최 교수는 갑자기 마음이 후련해지며 모든 구속에서 풀린 자유를 느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자기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는데, 그때까지 자기를 너는 나의 것이라고 부르시는 예수님이 곁에 계시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평소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고 하면서 자기 아들은 앞으로 이렇게 만들어 주셔야 한다고 자기의 욕심을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주님께서 부르시는 빛 가운데로 나오지 못하고 지금까지 교회가 요구하는 형식과 의식과 율법적인 생각의 패러다임 속으로 자기를 집어넣어서 양계장 안의 닭처럼 되어 살고 있으면서 늘 부족한 자신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한별아, 정말 들려달라고도 안 했는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어?”

그렇다니까? 나는 배가 아프다고만 했어. ‘그런데 내가 네 배를 났게 해주겠다.’고 하셨어. 정말 놀라운 것은 내 변비가 없어진 거야, 부끄럽기도 하고 또 변비를 영어로 뭐라 하는지 알 수 없어 그 말은 못했지만 아침에 일어나서 나는 시원하게 변을 보았거든. 그리고 지금까지 기분이 좋아. 예수님께서 내 병을 치유해 주신 거야

주여, 감사합니다. 그 음성이 바로 나에게도 들려주신 음성이야.”

?”

나는 하나님의 딸이야. 내가 음성을 들려 달라고 하기 전부터 그분은 나와 함께 계셨어. 나도 내 생각을 내려놓고 있었으면 너에게처럼 진즉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 주셨을 거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43:1)”라는 구절이 새삼스럽게 복음으로 다가왔다.



'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헛된 꿈과 계획  (0) 2016.11.05
성경공부와 경옥고  (0) 2016.10.24
고려장  (0) 2016.10.04
김준곤 목사를 회고한다  (0) 2016.09.18
생일 축하  (0) 2016.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