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저는 죽음이라는 것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것이라는 것을 자주 깨닫고 있습니다.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이 하나 둘씩 하늘나라로 불려서 올라갈 때 그 생각이 나고 어제까지
함께 있었던 사람이 오늘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통보를 받았을 때 그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생각이 들 때면 기분이 다운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리 나쁜 생각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서 우리 모두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면 세상의 잡다한 이전투구가
우리 안에 끼어들 자리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큰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언쟁을 하고 나아가 지금 나라 안팎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벌한 분쟁 또한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 모두가 도를 깨우친 사람처럼
심오한 마음을 가지고 산다면 이 세상은 또 얼마나 지루하고 삭막하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도를 깨우친 사람처럼 살 수
없음을 알면서도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까닭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너무나도 이성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을 미워하는데 너무
익숙하고 남을 깔아뭉개는데 너무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자신이 영원히 살 것처럼
말입니다.
엊그제 자정이 넘어 무안에 있는 장례식장을
다녀오면서 저는 문뜩 우리의 삶이 허망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이대로 죽는다면 내게는 어떤 아쉬움이 남을까, 잠깐 그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자식들이었습니다.
제 삶에 아쉬움이나 후회는 눈꼼
만큼도 없는데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아이들이 받아야 할 고통이 두려웠습니다. 그 생각을 하면서 새벽에 제가 승용차의 속도를 조금 냈더니만 아내는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하고 운전을 할 때는 속도를 이렇게 내도
괜찮은데 혼자 운전할 때는 제발 좀 천천히 다니세요.”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말해?”하고 물었더니 아내는 “죽어도 같이 죽는 것은
조금도 두렵지 않은데 당신 혼자 죽으면 나 혼자 어떻게 살라고요.”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아내는 천천히 운전하라는 말을 이렇게 예쁘게
표현을 했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우리의 삶은 언제나 이렇게 불안하고 허망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지금 살아있다는 것이
기쁨이고 축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10여 년 전에 미리 써놓은 유언장이
있습니다.
이제 10여 년이 지났으니 다시 쓸 때가
되었습니다. 미리 쓰는 유언장은 저로 하여금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시간을 갖게 하고, 얼마가 될지는 모르지만 제게 남아있는 시간을 보다
값지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다시 쓴다면 저는 아마도 이런 내용을
쓰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 큰 아들에게 당부하고픈 말, 아빠의
장례는 최대한 조촐하게. 화장해서 할머니 옆에 묻어 주고, 느그 엄마에게 최선을 다할 것, 둘째 아들에게, 네가 많이 울 것인데 너무 슬퍼하지
말 것, 밥 꼬박꼬박 챙겨 먹고 항상 씩씩할 것.
여보, 할 말이 너무 많아서 할 말이 없는
당신에게 참 미안하오. 벌써 당신의 잔소리, 당신의 코고는 소리가 그리워지려 하오. 당신 놔두고 먼저 가려니 발길이 무겁소. 당신에게 좀 더
잘해줄 걸, 지금 또 후회가 되오. 그래도 내가 일찍 가서 터 잡아 놓을 테니 천천히 오시구려.’
진짜 유서는 이러한 유서에 조금 더 세부적인
살을 붙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렇게 유서를 쓰고 나면 저는 다시 찬란한 아침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렇게 맞이한 해는 또 얼마나 아름답고
환하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맞이하는 하루는 제가 쓴
유언장을 실천할 수 있도록 덤으로 주어진 새 날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 새날에 화내고 짜증내고 남을 속이고 남을 미워하고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것으로 압니다.
고운 하루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대원(大原) 박 완 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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