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길...
어릴 적 추억은 늘 따뜻했습니다.
저의 외가는 제가 요즘 걷고 있는 화양면입니다. 설이나 추석 때가 되면 저는 어머니를 따라 외가가 있는 화양면에 자주 갔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은 거기까지 가는 길이 아스팔트 포장길이지만 그때는 울퉁불퉁 비포장 흙길이었습니다.
버스 맨 뒤에 앉으면 달리는 버스가 통통 튈 때마다 어른의 머리가 천장까지 달 지경이었습니다. 그정도로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 때는 버스가 자주 없었기도 했지만 어머니는 그러한 버스를 타고 가는 것보다 외할머니 댁까지 걸어가는 것을 더 좋아하셨습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지금 그 거리를 계산을 해보니 어머니와 함께 걸었던 그 길이 얼추 십리 길은 넘었습니다. 오랜 기억 하나가 떠오릅니다. 그때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무렵이었을 것입니다. 8살이나 9살쯤 되었겠지요.
어렴풋한 기억에 파릇파릇한 보리밭이 기억나고 외할머니 댁에 도착해서 큰절을 했던 기억이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설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도 어머니가 저를 데리고 외할머니 댁까지 걸어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가 저를 데리고 가고 싶어서 데리고 갔던 것이 아니라 저라도 데리고 가면 덜 심심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어린 저에게 십리 길은 너무나 먼 거리였습니다. 그렇게 어머니를 따라가다가 다리가 너무 아파서 몇 번이나 업어달라고 칭얼댔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머리에 큰 보따리를 이고 계셨습니다. 친정집에 가는데 빈손으로 갈 어머니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다리가 아파서 더 이상 못가겠다고 하면서 업어달라고 보채면 어머니는 그때마다 조금만 더 가면 업어준다고 하셨습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우리 어머니는 자식에게는 거짓말을 할 분이 아니셨기 때문에 저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그 렇게 어머니의 그 말만 믿고 가다 서고, 가다가 또 서고 하다가 작은 산의 모퉁이를 돌았는데 외할머니 댁은 보이지 않고 끝없이 펼쳐진 들판이 나왔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보리밭에 퍼질러 앉아서 악을 쓰며 울었습니다.
아들이 그렇게 악을 쓰고 울면 적어도 달래야 하는 것이 어머니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보리밭에 주저앉아서 두 다리로 보리밭을 문지르면서 악을 쓰고 있는 아들을 두고서 뒤도 안 돌아보고 훠이훠이 앞으로 가셨습니다.
저는 더욱 악을 쓰며 울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자식 사랑이 너무나 끔찍했던 어머니가 저에게 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저는 더욱 목이 터져라고 악을 쓰며 울었습니다. 하지만 어림없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우는 사이에 점점 어머니와의 거리는 멀어졌습니다. 서서히 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넓은 들판에 혼자 남게 되면 호랑이에게 잡혀갈 것이 분명했습니다. 떼를 쓰는 아이는 이 동네 호랑이가 다 잡아간다고 어머니가 떠나기 전에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와의 거리가 500m도 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멀어지면 큰일이었습니다. 산기슭에서 호랑이가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 같았습니다. 당장 죽게 생겼는데 자존심이고 뭐고 소용이 없었습니다. 저는 벌떡 일어나 “엄마~~~~!” 하면서 있는 힘껏 어머니에게 달려갔습니다.
못 걷겠다고 발버둥친 조금 전의 행동은 기억도 나지 않았습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울고불고 달려서 겨우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대성통곡을 하였습니다.
그때서야 어머니는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뛰어온 저를 근처에 있는 냇가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저의 얼굴을 씻겨주고 치마로 얼굴을 닦아주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저는 어머니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에게 찍소리도 못하고 살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