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저희 집 사랑방은 갓 쓰고 도포 입은 점잖은 선비들이 모여 재미있는 우스개 소리도 많이 나눈 곳이었지만, 학문과 역사를 논하고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토론의 방이었습니다. 술상 심부름, 밥상 심부름을 하느라 사랑방을 들락거리며 가끔 얻어 들었던 이야기들이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무렵 사랑방의 주인이셨던 저의 할아버지께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자고로 소인배들은 글 잘하고 말 잘하며 얼굴도 잘생긴 경우가 많다”라는 말씀이 생생하게 기억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을 그르치고, 나라를 위태롭게 하며 역사를 후퇴시켰던 그 많은 소인배들은 대체로 머리도 뛰어나고 공부도 잘했으며 우수한 성적으로 과거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일세의 도덕군자이던 정암 조광조를 허위 사실로 모함하여 30대에 사약을 받고 죽어가게 했던 남곤·심정 같은 사람도 머리 좋고 글 잘하며 잘 생겼던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광해군이 쫓겨나도록 패악을 저지르는 일에 주역이던 이이첨 또한 참으로 잘난 소인배였고, 나라를 팔아먹는데 큰 공을 세운 이완용 또한 잘 생기고 글 잘하던 대표적인 소인이었습니다.
머리 좋고 잘난 사람들이 왜 그렇게 소인이 되고 말았을까요. 그 점에 대한 다산의 진단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학(科擧學)은 이단(異端) 가운데서도 폐해가 가장 혹독하다. 이단의 대표적인 양묵(楊墨)은 고대의 일이고 불로(佛老)는 현실과는 너무 먼 주장들이다. 그러나 과거학만은 그 해독을 생각해보면 비록 홍수와 맹수라도 비유할 바가 못된다. 과거 공부를 하는 사람들 중에는 시부(詩賦)가 수천 수(首)에 이르고 의의(疑意)가 5천 수에 이르는 사람도 있는데, 이런 공력을 학문하는 데로 옮길 수 있다면 주자(朱子)와 같은 학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爲盤山丁修七贈言)라고 말하며 머리 좋고 글 잘하는 사람들이 암기력은 뛰어나 학문과는 거리가 먼 과거시험 과목만 달달 외워 과거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여 벼슬에 임하다 보니 인격의 형성은 뒤쳐져 소인배가 되고 만다는 생각에서 조선시대 과거제도의 폐단을 혹독하게 비판한 다산의 주장이었습니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조선시대의 가장 나쁜 과거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법시험이나 행정고시를 거쳐야만 고관대작이 될 수 있습니다. 머리 좋고 암기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당연히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여 모든 가치는 팽개치고 오직 권력과 재물의 추구에만 뛰어난 머리를 활용하다보니, 그들이야말로 옛날의 소인배로 타락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우리의 현실을 살펴보면 대체로 그런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머리가 좋으니 유신헌법도 기초하고 출세 길이 열려 있으니 부잣집으로 장가가고 그렇게 해서 권력과 재물에 맛이 들고 보면 모든 가치는 팽개치고 어떻게 해서라도 권력을 쥘 수 있고, 재산을 모으는 일에 전념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러다 보니 세상과 나라를 무너뜨리게 하는 죄악에 빠지게 됩니다.
고대의 공거(公擧)제도가 과거제도로 타락해 소인과 군자(君子)를 구별하기 어려운 제도의 폐단으로 파탄 나는 세상, 시험으로 인재를 고르는 제도가 언제쯤 개선될 날이 올까요. 다산의 탄식이 오늘에 더욱 절실하게 느껴져서 마음이 아플 뿐입니다.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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