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봉, 그는 말했다. 5월의 상처는 기억만 할 게 아니라 그 항쟁정신과 대동정신을 끊임없이 오늘 되살려야 한다고. 그것만이 죽은 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책임이라고.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 그것은 민주주의처럼 우리가 조금 다가가는 듯하면 저 멀리 물러난다. 그것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기엔, 그래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억압당하는 민중과 함께 하기엔 현실은 녹록지 않다. 현실은 우리에게 적절한 선에서 명분도 챙기고 실리도 챙기라고 끈질기게 요구한다. 그는 그런 현실에 끝까지 저항했다. 나이 먹는다는 것이 민중성 추구가 아닌 현실 추구 편에 친화력을 가진다면 그는 차라리 죽을지언정 나이 먹기를 거부했다.
일그러진 현대사, 일제 침탈과 민족상잔은 이땅 곳곳에 배반의 씨앗을 뿌렸다.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억울함조차 신원하지 못할 만큼 잘못된 힘의 역학관계가 자리잡은 곳, 그래서 민족 반역자든 반민주의 범죄자든 스스로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지 않는데, 거꾸로 용서와 화해, 상생을 먼저 말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것이 잘못된 힘의 역학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것을 올바르게 바꾸도록 항쟁정신으로 맞서야 하건만 타협이라는 쉬운 길을 택함으로써 용서를 구할 잘못을 저지르기보다 용서하기가 더 쉬운 역설의 땅이 되고 말았다. 5·18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답답한 가슴으로 쓴소리를 던져야 했던 이유였다.
현실에 영합한 자는 자신을 합리화하려고 현실의 어려움을 주장한다. 사회적 약자들의 생존권 요구를 현실성 없는 요구라고 간단히 치부하는 과거 운동권 인사들이 바로 그 현실을 구성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모르거나 모른 체한다. 디제이 집권 이후 정치권에서, 혹은 5·18을 기념하고 사업한다면서 실리를 챙기려는 자들 사이에서 대동정신을 외친 그는 외로울 수밖에 없었다.
이십여 년 전, 나는 그를 독일 땅에서 처음 만났다. 같은 망명자 처지의 동갑내기. “미국 생활에 적응하지 않는다”, “조국의 가난한 동포들과 감옥에서 고생하는 동지들을 생각해서 침대에서 자지 않는다”, “도피 생활을 할 때처럼 허리띠를 풀지 않는다”의 원칙을 지킨 사람. 유약하기 그지없고 먹물 근성을 버리지 못한 나를 부끄럽게 했던 사람, 그러나 그는 본디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 마음 좋은 시골 아저씨 같은 사람이었다. 배반의 땅이 그렇게 만든 것일 뿐.
왜였을까? 그를 마지막 보내는 곳에서 나는 어색했다. 그에게 추서된 국민훈장 동백장이 낯설듯이. 그 자리에 온 공인의 숲에서 잠시 외로움을 느낀 사람이 나만은 아닐 듯. 그 외로움이 그와 약속을 지키겠다는 다짐에서 온 것이기를. 그가 지핀 들불을 활활 타오르게 할 것을, 눈빛으로 나누었던 그 약속을. 그는 갔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정신을 떠나보낼 수 없다.
홍세화 기획위원 hongs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