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모음! (531)
▶추운 날 달팽이가 사과나무에 기어오르고 있습니다. 달팽이가 아주 느린 속도로 조금씩 위로 올라가는데 나무껍질 사이에서 벌레 한 마리가 얼굴을 삐쭉 내밀더니 하는 말이 '이봐 이 바보야, 너는 지금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고 있어, 저 위에 올라가 봤자 사과는 없어'라고 합니다.
그러자 달팽이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저 꼭대기에 도달할 때쯤 되면 사과가 열릴 거야' 이 정신이 오늘 우리들에게 꼭 필요합니다.
▶마르틴 루터의 명저 '탁상어록'에 등장하는 '고학생과 자선의 손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 고학생이 길에서 행인들에게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체격이 건장한 남자가 큼직한 물건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고학생은 남자가 자신을 쫓아내기 위해 몽둥이를 들고 나온 줄 알고 겁에 질렸습니다. 남자가 다가가자 학생은 힐끔힐끔 눈치를 보며 도망쳤습니다. 남자는 자신이 가져온 물건을 흔들며 학생에게 소리쳤습니다. "멈춰라. 이것은 너를 위해 마련한 빵이란다." 학생은 더 멀리 도망쳤습니다.
그 남자는 불쌍한 학생을 위해 커다란 빵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몰랐던 학생은 남자의 인자한 표정과 손에 들린 빵을 보지 못한 채 계속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시며 손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자꾸만 도망을 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다만 인간의 소견과 이해가 부족해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는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마12:20)
▶미국의 한 아파트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화재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주검들 가운데 보는 이들의 마음을 유독 안타깝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그 집에 아기와 엄마가 있다는 사실을 소방대원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소방대원들은 그들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불길을 다 잡고 난 소방대원들은 다시 그 집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아기와 엄마는 화장실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기는 살아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기를 변기 속에 집어넣고 엄마 자신이 아기의 방패막이가 되어 타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지위나 학력을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조건 없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계십니까?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히틀러 치하에서 유대인 6백만 명이 학살당하였습니다.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많은 사람들이 가스실에서 죽어가야 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어린 아들 둘을 둔 어떤 일가족도 그렇게 수용소로 잡혀 들어갔습니다. 수용소에 들어가서는 노동이 가능한지의 여부가 먼저 처형하느냐 마느냐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아들 중 하나는 어리고 매우 병약하였습니다. 부모는 그것이 걱정되었습니다.
"저 아이는 몸이 약해서 틀림없이 가스실로 끌려갈 텐데 어떻게 하나...."
강제노역에서 돌아온 일가족은 밤마다 서로의 얼굴을 찾았습니다. 저녁에 아들의 얼굴을 보면 그 날은 생명을 부지한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이미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둘러보니 몸이 약한 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의 얼굴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모자는 이미 가스실로 끌려갔던 것입니다. 그들이 끌려갈 때 함께 있던 이들이 모자가 끌려가던 당시의 애끓는 모습을 전해 주었습니다.
어리고 약한 아들은 감시원이 끌고 가려 하자 마구 울며 발버둥쳤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품에 안고 눈물을 참으며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울지 마라. 이 어미가 같이 간다."
그러자 아들은 순순히 엄마를 따라 들어갔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안고 당당하게 가스실로 걸어갔습니다. 피할 수도 있었던 죽음의 길을, 자식 홀로 가는 모습을 볼 수 없어서 함께 간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아들의 애통함에 함께 한 사랑입니다. 그 어머니의 사랑을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몸이 약해 폐병에 걸렸었고, 늘 건강하지 못했습니다. 약국도 드물고 병원에도 쉽게 갈 수 없던 가난한 시절, 몸이 아파 오면 밤새 끙끙 앓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저를 등에 업고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리고 품에 안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이렇게 말씀하시곤 하였습니다.
"아이고 네가 아플 것이 아니라 차라리 이 어미가 아파야 하는데, 이 못난 어미 만나 네가 고생하는구나!" 어머니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어머니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던 눈물이 저의 얼굴에 떨어졌습니다. 저는 몸이 아파서 고통스런 중에도 어머니의 그 말씀과 눈물로 위로를 받으며 잠을 청했습니다.
"내가 아파야 하는데 네가 아프니 내 마음이 아프다. 내가 대신 아파 주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도 어머니의 이 음성이 제 귓가에 들려오는 듯합니다.
어머니의 참 사랑은 아들의 아픔을 대신하려는 것이요, 아들의 죽음에 함께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이토록 크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그보다 더 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당신을 사랑하듯 그렇게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어느 가난한 부부가 여섯 자녀를 어렵게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매우 절친한 부자 친구가 한 아이를 자기에게 양자로 주는 게 어떠냐고 제의했습니다. 그 날 저녁 아이들이 모두 잠자리에 들어간 다음에 아내와 그 문제를 의논하였습니다.
어떤 아이를 양자로 보낼까? 그들은 첫째 아이인 아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맏아들을 남 주기에는 너무나 귀하고 아까웠습니다. 둘째 아이는 딸이었습니다. 이번에 역시 첫 딸이라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셋째 아이도 딸인데 너무나 몸이 약해서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넷째 아이는 장모님과 너무 닮아서 보낼 수 없다고 부인이 거절했습니다. 다섯째 아이는 아버님과 너무 닮아서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아기 밖에 없었습니다. 그 순간 부인은 그만 울음을 터트리며 "우리 아가, 귀여운 것 남 줄 수 없어요"하며 통곡하고 말았습니다. 여섯 자녀가 있었지만 그 하나라도 기꺼이 내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단 하나의 독생자밖에 없었으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내어주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인류 역사는 누구를 무론하고 자기가 가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은 다양합니다.
첫째는 어둠에서 어둠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악에서 죄악으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소돔성 사람들이 그랬고, 노아 때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그랬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육에 속한 사람들이라 합니다.
둘째는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죄악에서 빛 되신 주님을 향해 가는 사람들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그랬고, 삭개오가 그랬고, 십자가 오른편 강도가 그랬습니다.
셋째는 빛에서 어둠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의 길을 포기하고 세상으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사울 왕이 그랬고, 엘리 제사장이 그랬고, 삼손이 그랬고, 웃시야가 그랬고, 가룟 유다가 그랬고, 데마가 그랬습니다. 그들은 낮의 빛에서 밤의 어둠으로 간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빛 되신 예수를 떠나면 마귀의 밤이 다가옵니다. 축복의 울타리인 교회를 떠나면 저주의 밤이 다가옵니다. 생명 되신 예수를 떠나면 사망의 밤이 옵니다. 영적 생활이 어두우면 육신의 비참한 밤이 됩니다.
넷째는 빛에서 빛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의 길입니다. 생명의 길입니다. 축복의 길입니다. 다윗이 그랬고, 바울이 그랬고, 베드로가 그랬고, 오늘 우리도 그렇게 행보 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래를 보면 어두움이지만 위를 보면 빛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말씀 하셨습니다.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하늘의 것을 생각하라. 아랫것을 보지 말고 위엣 것을 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빛에서 빛으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에베소서 5:8-9절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이것이 빛에서 빛으로 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으면 그것을 주님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능력 주셨으면 주님 위해 능력을 사용해야 합니다.
재능 주셨으면 주님 위해 재능을 사용해야 합니다.
물질 주셨으면 주님 위해 물질을 사용해야 합니다.
건강 주셨으면 주님 위해 건강을 사용해야 합니다.
▶정직하게 고백해 봅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 길은 그래도 배고픈 날보다는 배부른 날이 더 많습니다.
추운 날 보다는 따뜻한 날이 더 많습니다.
미운 날 보다는 사랑하는 날이 더 많습니다.
안 되는 것보다는 되는 것이 더 많습니다.
아픈 날 보다는 건강한 날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감사하지는 못할지언정 불평하고 투기하는 생활을 해서야 어찌 빛에서 빛으로 가는 성도의 생활이라 할 수 있겠는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이란 사전적으로 말씀드리면 두 가지로 대별됩니다.
첫째는, 소리, 빛깔, 모양 따위가 마음에 즐겁고 기쁜 느낌을 자아낼 만큼 고움을 뜻합니다.
둘째는, 하는 일이나 마음씨 따위가 훌륭하고 갸륵함, 또는 착하고 인정이 많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름다움을 '신의 선물'이라 했습니다. 플라톤은 '자연의 가장 우수한 것'이라 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쓸데없는 것을 정화한 것'이라 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꽃'이라 했습니다. R. U. 존슨은 '신의 미소'라 했습니다. J. 키츠는 '영원한 기쁨'이라 했습니다.
나름대로 모두 타당한 뜻풀이이며, 여기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들이 좋아하거나 원하는 대상이 곧 아름다움이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서 아름다움은 곧 '좋은 것'입니다.
한문을 보면 아름답다는 美는 양(羊) 밑에 큰 대(大)자가 받쳐진 글자입니다. 이 한자어의 뜻은, 고대 중국인들은 양고기를 맛있는 고기로 여겼기에 양고기를 많이 먹을 수 있는 것을 가장 좋은 일로 여겼고 여기에서 아름다움이라는 뜻이 파생된 것입니다.
영어 뷰티(beauty)는 '아름다운'이라는 뜻의 고대 프랑스어 'bellus'에 어조사 ity가 더해진 것으로, 'bellus'는 '좋은'이라는 뜻을 가진 bonus와 어원이 같습니다.
이에 비해 우리말 '아름다움'은 '아름답다'가 명사화된 말입니다. 아름답다는 '나(我)'를 뜻하는 고어 '아'에 접미사 '답다'가 붙어서 된 말입니다. 즉 '나'다운 모습이 '아름다움'이라는 말입니다.
'나'다운이란 자기 만족, 혹은 마음 상태가 좋은 것입니다. 마음의 좋음, 마음의 만족은 곧 감사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것이 아름다움입니다.
미국의 소설가 L. 월리스는 '바라보는 사람의 눈 속에 있다'고 했고, 영국의 철학가 D. 흄은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가?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온 세상을 헤매 다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 보아도 그가 찾고 있는 아름다움은 발견할 수도 없을 뿐더러 숲으로 가 보아도, 냇가로 가 보아도, 꽃밭으로 가 보아도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는 오랜 세월을 헤매 다니다가 결국 길에 풀썩 쓰러져서 말했습니다. '아, 대체 내가 찾는 아름다움은 어디 있을까?' 그 아름다움은 정말 어디 있을까요? 그것은 자기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4:23절에서는 무엇보다 마음을 잘 관리하라고 권고한 것입니다.
자기 마음을 착하게 하고 있으면 오가는 사람들도 착해 보이기 마련입니다. 괜스레 불량배 행세를 하면 어김없이 불량배들이 다가와 시비를 걸고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선한 일을 많이 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기도하는 사람이 모이게 됩니다.
찬양 잘 하는 사람에게는 찬양하는 사람이 모입니다.
봉사 잘 하는 사람에게는 역시 봉사자들이 모입니다.
구제와 선교를 잘 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선한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부동산 투기에 열심을 가진 여전도회 회장 집사님이 헌신예배 인도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주님 생각으로 충만했으면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은혜로운 예배를 인도했을 터인데 평소에 육신적인 소욕으로 충만했기에 예배 인도를 하는 중 찬송가를 부를 시간에 엉뚱한 말이 튀어 나왔습니다.
'여러분, 찬송가 102동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그리고는 목청을 돋우어 102장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여기 저기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회중들은 속으로 안타깝게 말합니다. '찬송가 가사대로만 살면 얼마나 좋을까?'
▶'화장실에서 보는 책' 15페이지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중등 장학사가 중학교에 장학 지도를 나갔습니다. 교실에 수업을 하는 한 학생 앞에 지구본이 놓여 있었습니다.
'얘야 지구본은 왜 기울었지?' '아이가 깜짝 놀라면서 제가 안 그랬는데요.'
기가 막힌 장학사는 담임선생님께 물었습니다.
'어제까지는 괜찮았는데...'
옆에 있던 교감선생님이 한몫 거들었습니다. '그거 사올 때부터 그런 것 같은데요.' 그러자 교장선생님이 송구스럽다는 듯이 말합니다. '장학사님, 국산품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한 마디로 기막힌 이야기입니다. 우리 교육현장을 꼬집는 대학가의 은어를 편집한 이야기책의 글입니다.
▶분수라는 말은 영어에서 몇 가지로 해석합니다.
자기 영역을 지킨다.(keep to one's sphere in life)
자기 수입의 한계 내에서 산다.(live within one's means)
자기 위치를 안다.(know one's place)
자기 자신을 안다.(know oneself)
▶서울의 한 교회에 목회를 잘하시는 목사님이 계시는데 이분은 청년 때에 망나니 생활을 하였는데 어머니의 눈물어린 기도로 아들은 변화를 받아 눈물로 회개하고 신학교를 마치고 시골교회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목사님이 전도사 시절 안타깝게도 청년시절의 잘못된 모든 것을 정리하면서도 담배만은 끊을 수 없었습니다.
사택이 예배당과 함께 있었고 화장실도 함께 사용하게 되는데 어느 날 새벽기도 한 시간 전쯤에 일찍이 일어나 화장실에서 습관처럼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마침 그 교회의 한 분뿐인 장로님이 다른 날보다 일찍이 교회 오셨습니다.
전도사님은 이런 시간에 누가 오랴 생각하고는 문을 잠그는 것을 잊었고 장로님은 무심코 이런 시간에 누가 화장실에 있으랴 하고 문을 열었는데 그만 그 장로님은 봐서는 안 될 장면을 보았습니다. 장로님은 말없이 문을 닫고 교회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새벽기도 시간이 되어도 전도사님이 나오실 줄 몰랐습니다. 그 다음날이 되어도 그리고 주일이 되어도 전도사님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온 교회는 전도사님을 찾느라 난리가 났지만 장로님은 말없이 대신 예배를 인도하시며 교우들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며칠 후 장로님에게 전도사님의 전화가 왔습니다. '장로님 저 사임하겠습니다. 저는 자격이 없는 전도사입니다.' 내용인즉 사건이 있던 그 날로 기도원에 들어와서 담배를 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지만 여태 끊지 못하고 못 참아서 조금 전에도 한 대 피웠다고 고백하면서 몇 천 번 생각해도 자신은 전도사 자격이 없다면서 사임을 청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 장로님이 하시는 말씀이 이렇습니다. '전도사님, 교인들 아무도 모릅니다. 전도사님! 담배끊기가 힘들면 피우세요. 교인들의 소리는 제가 막아 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듣는 이 청년 전도사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렇게도 끊을 수 없었던 꿀맛 같은 담배가 그만 역겨워지며 냄새조차도 싫어져 버렸습니다. 그 장로님의 사랑의 목소리에 그만 녹아 버린 것입니다.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 후 그 전도사님은 그 교회에서 신학교를 다 마치고 목사가 되었고 이제는 서울에서 목회 하시면서 훌륭한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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