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 (벧전 1:13-19)
언젠가 국민일보 겨자씨에 실린 글입니다. 어떤 사람이 바다에서 배를 타고 관광을 하다가 값비싼 진주 목걸이를 바다에 빠뜨렸습니다. 너무나 귀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항구로 돌아오자마자 바가지를 가지고 바닷물을 퍼내기 시작했습니다. 3일을 쉬지 않고 펐습니다.
그 때 거북이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무엇하십니까?' '물을 푼다.' '언제까지 푸실 것입니까?' '바닷물이 다 없어질 때까지 푼다.' 이 말을 들은 거북이가 말했습니다. '그러면 내가 살 곳이 없어지는 데...' 이렇게 말하면서 거북이는 물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조금 후 거북이는 그 '진주 목걸이'를 입에 물고 나타났습니다. /할/ 여러분, 무엇이든지 하려고 하면 할 수 있습니다. 길이 보이고 지혜가 떠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할/
오늘 본문은 베드로 사도가 당시 소아시아에 흩어져 살고 있었던 성도들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16절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고 하십니다. /할/ ◀제목 소개!▶
①여기 '거룩한 자가 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거룩하다'는 말은 속되거나 불경스러운 것과는 반대로 '구별 됨'을 뜻합니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순결하고 경건하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 거룩함은 '하나님을 위해 구별하여 놓음, 정결하게 하여 하나님께 드림'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을 '거룩한 백성들' 즉 '성도' 라고 합니다.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 구별이라는 것은 외적인 구별보다는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구별에서 시작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나 소금이라는 명칭을 가지는 이면에는 다른 사람들과 구별이 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은 같지만 그러나 내면에서 추구하고 판단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고자 하는 의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할/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이 되어진 삶을 살지 못하면 전혀 빛이 없습니다. 거룩하게 사는 사람들의 동기, 열정, 욕구, 바람, 목표, 소망 등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쓰여져야 합니다. 거룩함에는 언제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서 출발되어져야 합니다.
⑴그렇습니다. 거룩은 '구별한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고전1:2절에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되어졌다는 것입니다.
마치 다 같은 가구이면서도 이 탁자가 하나님 예배에 쓰여지면 성구가 되어 거룩한 가구가 됩니다. 주일을 거룩한 날이라고 하고, 성도를 거룩한 무리라고 합니다. 이는 오로지 하나님만을 위하여 구별된 상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믿/
⑵그리스도를 닮아 간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성화라고 부릅니다. 생활 면에서는 우리 주님처럼 성결한 삶을 살아야 됩니다. 윤리적으로 성결하고 양심적으로 깨끗해야 주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습니다.
처녀 총각이 결혼을 하게되면 아내는 남편을 위하여, 남편은 아내를 위하여 구별되는 것과 같습니다. 아울러 자녀가 자라가면서 아버지를 닮아 가는 것처럼 우리들은 아버지가 되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아멘!/ 거룩이란 원래가 하나님께만 주어진 형용사입니다. 영광스럽게도 우리에게 거룩을 입혀 주셨습니다. 사62:12절에서 '거룩한 백성'이라고 했고, 벧전2:5절에서는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불러주셨습니다. /할/
②왜 우리가 거룩해야 되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한마디로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할/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는 피조물과 구별된 창조주라는 말이고, 악과 구별된 절대 선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유한한 것들과 구별된 영원하신 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거룩하신 즉 그 분의 자녀 된 우리도 당연히 거룩해야 합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입니다. 참새는 참새끼리, 봉황은 봉황끼리, 까마귀는 그들대로, 독수리는 그들대로 모입니다. 돼지는 더러운 본성이기에 깨끗한 자리보다는 진흙탕 속에서 놀기를 좋아합니다. 까마귀는 시체를 먹지만 비둘기는 깨끗한 날짐승이라서 감람나무 잎을 물고 노아에게로 날아왔습니다.
이미 우리 안에는 이 같은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이 주어져 있습니다. 곧 신의 성품에 참여하도록 부르셨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받아 드리십시오. 우리 안에 계시는 주의 성령은 거룩하신 영이십니다. 이로 인하여서 전에는 죄인 줄도 몰랐는데 이제는 그러한 일로 인하여 아파하고 전에는 그러한 것들이 별 것 아닌 줄 알았는데 이제는 더욱 더 괴로워하면서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할/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분입니다. 절대적으로 의로우시고 선하시며 깨끗하십니다. 그분은 빛과 같은 분이십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고 그러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산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③두 종류의 거룩함이 있습니다.
⑴존재적인 거룩함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 사람은 거룩한 존재로 바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교회에 소속되면 그는 거룩한 존재입니다(고전1:2). /할/
존재 적인 거룩함은 행위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행위가 좀 부족해도 주님 안에 있으므로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존재 적인 거룩함은 나의 노력이 필요치 않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도를 받아드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값없이 구원받고, 값없이 영생을 얻고, 값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값없이 천국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수영을 못해도 배를 타고 있으면 물에 빠지지 않는 것처럼 말씀대로 살지 못해도 예수님 안에 있으면 세상과 구별된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멘!/
⑵행실의 거룩함입니다. 본문 14-15절에 보면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거룩하심 같이 모든 행실에 거룩해야 합니다.
행실의 거룩함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행실의 거룩함은 거룩하게 살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화초를 잘 가꾸려면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노력이 필요합니다. 존재 적인 거룩함을 얻은 우리가 행실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히12:14절에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려면 자신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요, 거룩은 '자르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육신 적인 것을 잘나내야 거룩해집니다. /아멘!/ 김유신 장군이 애마의 목을 자르며 자기 결단을 새롭게 한 그 결단이 삼국통일의 초석이 된 것처럼 사랑하는 성도들이 새로운 결단을 함으로 교회 부흥과 개인의 가정과 사업과 직장에서 복을 받는 한 해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④거룩함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거룩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거룩하기를 원하십니다. 살전4:3절에 보면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할/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거룩함을 명령하셨습니다. 레11:4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자기 백성들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을 거룩하게 보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주님 재림하시면 우리 모두는 주님의 보좌 앞에서야 하는데 그 때 거룩하여 흠 없는 모습으로서야 합니다. 살전5:23절에 보면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아멘!/
세상과 구별되게 생각하십시오. 세상과 바라보는 것, 추구하는 것이 구별되어야 하고, 생각하는 것이 구별되어야 하고, 말하는 것이 구별되어야 합니다. 또한 행동도 구별되어야 하고, 상황에 대한 반응도 구별되어야 합니다. /할/
간디는 '만일 그리스도인이 기독교적 삶을 충만하게 산다면 인도에는 힌두교도는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하게 살았다면 인도는 복음화가 되었을 것인데,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하게 살지 못해서 인도가 복음화가 되지 못했다는 결과가 됩니다.
⑤거룩함이 없이는 주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히12:14절에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거룩을 잃어버린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
그런데 현대는 거룩이라는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거룩은 심각한 말입니다. '거룩이 없으면 예수님을 볼 수 없다.' 이만하면 심각한 말씀이 아닙니까? 거룩이 없이는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거룩이 무엇입니까? 또 한번 상고해 봅니다. '거룩'은 '하기오스'라는 말로 '순수하다, 헌신되었다, 구별되었다'라는 의미가 강하게 들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거룩하다'는 말은 '구별되었다, 분리되었다'라는 뜻이지요. '하나님을 향한 분리'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레20:26) /할/
구별된 것을 거룩이라고 말합니다. 구별된 땅을 성지라고 말합니다. 구별된 쌀을 성미라고 부릅니다. 구별된 사람을 성인이라고 합니다. 구별된 책을 성서라고 칭합니다. 구별된 가구를 성구라고 이름을 붙이고 있습니다. 구별된 돈을 성금이라고 합니다. 구별된 사람을 성도라고 합니다. 거룩은 구별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구별되어야 하고 거룩해야 합니다. /아멘!/
⑥우리가 누구 앞에서 거룩해져야 하는가?
⑴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할/ 하나님은 우리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거룩한 신앙의 모습으로 속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일수가 없습니다. /아멘!/
⑵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거룩이 나타나야 합니다. 거룩은 보이는 형식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거룩이 눈에 보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 하리라' /아멘!/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과도 시기, 질투, 미움, 속임이 개입되면 거룩함이 아닙니다. 거룩한 사람은 남을 편안하게 해 줍니다. 격려해 줍니다. /할/
▶연극 배우가 무대에서 연극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친구가 왔습니다. 그리고 배우 친구를 보고 말했습니다. '구두끈이 풀어 졌네' 그 배우는 얼른 구두끈을 고쳐 맸습니다. 그리고 연극 연습을 계속 하였습니다. 조금 후 그 친구가 나갔습니다. 배우는 구두끈을 다시 풀어놓고 연극 연습을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던 옆에 있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세요?' 배우가 말했습니다. '내 연극 배역이 거지입니다. 구두끈을 풀고 어수룩하게 보이는 거지 역할입니다. 그런데 친구가 구두끈 풀어졌다고 지적할 때 나름대로 나를 잘 되라고 하는 것이기에 그대로 들어 주었습니다. 이제 그가 다시 나갔으니 풀어놓아야지요.' 이것이 거룩입니다. 남을 편안하게 하여 주는 것이 거룩입니다.
거룩은 누구에게나 거룩해야 합니다. 유대인의 정직은 상거래에서 나타납니다. 탈무드에 보면 사람이 죽어서 심판대 앞에 서게 되었을 때에 가장 처음 받는 질문은 '너는 거래할 때 정직하였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탈무드의 규정에 보면 '상점 주인은 되(斗)를 일주일에 두 번 닦아야 합니다. 추는 일주일에 한번, 저울은 매번 쓰고 난 다음에 닦아 두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할/
⑶거룩은 물질관계에서도 나타나야 합니다. 거룩한 물질을 드리는 것이 거룩입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거룩한 물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십일조는 구별된 헌금입니다. 거룩한 물질 십일조를 구별하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권투 선수 포먼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거친 성격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난폭하고 성질이 고약하고 침략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는 불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권투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많아지자 권투 선수에서 은퇴하였습니다. 그 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전도하려고 하니까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가 돈을 벌 수 있는 길은 권투뿐이었습니다.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고 권투 하나에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45살에 권투 선수로 다시 복귀하여 다시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그가 늦은 나이에 그렇게 한 것은 전도를 위한 돈 때문이었습니다. 그 후 번 돈은 모두 전도에 투자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거룩한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할/
⑷자기 자신 앞에 거룩이 있어야 합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입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자기를 성결하게 하는 것이 거룩입니다. 다 속여도 둘만은 속일 수 없습니다. 자기와 하나님만은 속일 수 없습니다.
▶어느 교회 젊은 집사님이 담배를 끊지 못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심하다가 여름휴가를 얻어 철원에 기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기도원에 들어가 기도하고 담배를 끊을 작정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이틀 지나도 성령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도원에서도 숲 속으로 몰래 들어가서 담배를 피우고 나오곤 했습니다. 담배를 피우고는 자신의 모습이 그토록 처량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왕에 결심하고 올라왔으니 도중에 내려갈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어느 날 기도하는 데 이상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버려라. 내버려라' 무엇을 내버리라는 것일까 생각하며 주머니를 뒤져보았습니다. 바지 주머니에 담배와 라이터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유유히 흐르는 한탄 강에 집어 던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바위 위에 엎드려 기도하다가 성령을 충만히 받았습니다. 그 후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 날부터 담배냄새만 맡으면 구역질이 났습니다. 담배를 완전히 끊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셔야 합니다. /할/
▶'죤 찰스 라일' 영국 주교는 '거룩함'을 12가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⑴습관적으로 하나님과 한 마음을 가는 것이 거룩입니다.
⑵모든 죄를 피하고 하나님을 거슬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거룩입니다.
⑶예수님의 마음을 닮기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것이 거룩입니다.
⑷온유하고 오래 참으며 인내하며 혀를 다스리려고 노력하는 것이 거룩입니다.
⑸자기를 부인하고 절제하는 것이 거룩입니다.
⑹거짓말, 비방, 험담, 속임수 등이 발붙이지 못 하게 자기를 경계하는 것이 거룩입니다.
⑺선행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거룩입니다.
⑻마음을 청결하게 하려고 애쓰는 것이 거룩입니다.
⑼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거룩입니다.
⑽겸손하게 살려고 애를 쓰는 것이 거룩입니다.
⑾인간 관계를 잘 하며 모든 면에 성실한 것이 거룩입니다.
⑿영적인 것을 추구하며 세상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거룩입니다. /할/
⑦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약4:7-8).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즉 '마귀는 대적하고, 하나님은 가까이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할수록 하나님도 우리를 가까이 해주셔서 우리는 더욱 더 성결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타락한 세상입니다. 약4:4절을 보면,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타락한 세상과 벗이 되어, 세상이 가는 길로 살아가면 하나님과 원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세상과 짝하여 살지 마십시오! 하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과 등지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 많은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살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김대중 대통령께서 통치하실 때 초대 비서실장이 김중권씨입니다. 그분이 장로님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 장로님에게 비서실장을 좀 해 달라고 하시더랍니다. 그런데 장로님이 '저는 안 됩니다. 저는 노태우 대통령을 모셨던 사람이고 제가 또 영남 사람이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비서실장은 대통령과 고락을 같이 한 사람이 해야지 저는 전혀 모르는데 제가 어떻게 그 자리를 하겠습니까?'라고 했는데도 '꼭 해 달라'고 하더랍니다. 계속 거절했더니 대통령께서 집에까지 오셨답니다. 그러니 더 이상 거절을 못 하고는 '정 그러시면 한 가지만 제 부탁을 들어주시면 제가 순종하겠습니다. 나는 장로입니다. 주일은 교회에 가야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저를 부르시면 안 됩니다. 이 날은 하나님이 부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비서실장을 해야 합니다. 나는 매 주일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것을 허락해 주시면 하겠습니다' 그 약속을 받고 대통령 비서실장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대통령을 모시는 일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대통령을 모시기 위해서 얼마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주일을 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대통령을 모시는 일 보다 주일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에덴동산은 마귀에게 빼앗겼지만 우리는 주일을 빼앗기면 다 빼앗기게 됩니다. /믿으시면 아멘!/
⑧거룩한 생활을 하려면 거룩한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우리에게 습관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습관은 그 사람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좋은 습관은 우리를 성공과 축복의 길로 인도합니다. 반대로 나쁜 습관은 우리를 실패하게 만들고 패배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자녀 교육의 핵심은 좋은 습관입니다. 자녀에게 좋은 습관을 갖게 만들어주면 자녀는 좋은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미국 조지아 주립대학의 '토머스 스탠리'교수가 '부의 세습'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최근 20년 동안 미국의 경제를 움직이는 백만장자들의 성장 과정과 기업의 성장 내용을 연구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 발표에 따르면 미국 재벌의 80%가 중산층이나 노동자 출신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기업을 물려받거나 많은 유산을 물려받아 재벌이 된 사람은 고작 20%에 불과했습니다. 스탠리 교수는 이런 결과에 대해서, 자수성가하여 큰 재벌이 된 사람들의 공통점은 부모로부터 물질적인 유산을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좋은 습관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습니다.
행실의 거룩함도 거룩한 습관에서 옵니다. 눅22:39절에 보면 '예수님은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셔서 기도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눅4:16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늘 하시던 대로, 평소의 습관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예배생활은 이미 오래 전부터 몸에 익숙해진 습관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거룩한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거룩한 생활이 가능한 것입니다.
행실의 거룩함이 습관에서 오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거룩한 습관의 훈련입니다. 거룩한 행실이 자연스럽게 나오도록 거룩한 습관을 반복적으로 훈련하는 것입니다. 초신자는 세속적인 습관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교회생활을 하면서 그 세속적인 습관을 거룩한 습관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이 필요합니다. 습관을 바꾸는 것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세속적인 습관을 거룩한 습관으로 변화시키는 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를 몇 년을 다녀도 변화가 없고, 직분을 받아도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믿/
습관은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래된 습관일수록 바꾸기가 더 어렵습니다.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무는 쉽게 뽑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심은 지 1년 정도 지난 나무는 뿌리 때문에 쉽게 뽑을 수 없습니다. 심은 지 이미 오래된 나무는 힘만으로는 뽑아낼 수 없습니다.
습관이라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선이든 악이든 습관을 들인 후, 그것이 오래되어 습관이 되어버리면 그 만큼 바꾸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습관은 바꿔야 합니다. 바꾸지 않으면 거룩한 삶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고 늘 기도로 무장해야 합니다. /아멘!/
⑴여러분, 말씀으로 무장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17:17절에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투명한 유리컵에 오렌지 주스를 부으면 컵의 색깔이 노란색으로 바뀌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엡5:26-27절에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말씀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힘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게 만들어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할/
유대인들은 말씀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닷물에 빠져 죽어 가고 있는 사람에게 밧줄을 던져 주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당신은 이 밧줄을 꼭 붙잡으시오. 만일 놓치면 곧 죽음입니다.' 말씀을 밧줄로, 생명줄로 비유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많은 환란과 역경 중에서도 살아 나온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밧줄을 꼭 붙들고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거룩입니다. /아멘!/
⑵그 다음 우리가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딤전4:5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할/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먹는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는 것처럼 기도도 기도하는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지금은 뉴스가 좀 뜸합니다 만은 전에 일본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한 사건으로 온 인류가 핵의 재앙으로 인해서 불안에 떨었습니다. 그 당시 뉴스를 보면 '방사능 피폭'이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방사능 피폭이란 방사능에 쏘였다는 말입니다. 방사능을 쏘이게 되면 인체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방사능 피폭은 체내 피폭과 체외 피폭이 있습니다. 체내 피폭은 방사능에 오염된 음식이나 물 혹은 공기를 통해서 체내에 방사능이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방사능이 축적되면 신체에 막대한 영향이 나타납니다. 불임, 백혈병, 암, 탈모뿐만 아니라 생식 세포가 피폭되면 유전자 이상으로 기형아가 태어나게 됩니다.
체외 피폭은 방사능을 직접 쬐는 것을 말합니다. 이번에 폭발된 일본 원자력 발전소에서 작업하던 인부들이 체외 피폭을 받은 것입니다. 체외 피복은 심하면 급성 장애를 일으키기도 하고 급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방사능 피폭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하지만 기도는 다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서면, 방사능과 달리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의 빛이 나옵니다. 그 빛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래 핍박자 이었습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가 주님을 만날 때 그는 방사능을 직적 쪼인 체외 피폭자들처럼 주님의 빛을 직접 쪼이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그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변화되었습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존재가 거룩해졌고, 주님에게서 나오는 빛의 힘으로 행실도 거룩해졌습니다. /할/
⑶범사에 성령의 다스림을 받으며 사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 님은 거룩한 영이십니다. 성령 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성령의 터치를 경험하는 사람은 거룩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믿/
사무엘상을 보면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왕이 되기 전에 사무엘 선지자를 만납니다. 사무엘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성령으로 충만한 선지자의 무리를 만나게 되는데 그 때 사울도 성령의 충만을 받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울에게 신비로운 체험이 나타납니다.
삼상10:6절에 보면 사무엘은 사울이 체험할 것을 예언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성령의 충만함)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사울이 변하여 새사람이 된다고 말합니다. 성령님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구약에 보면 성령님을 상징하는 것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기름입니다. 종이를 물 속에 넣으면 종이 속에 물이 스며듭니다. 그런데 기름 바른 종이는 물 속에 들어가도 물이 기름 때문에 종이 속에 스며들어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세상 속에 살기 때문에 세상 것들이 사람 속으로 들어와서 사람을 세속화시킵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충만하면 기름과 같은 성령의 역사 때문에 사람이 세속화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에 충만한 사람은 거룩한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이란 '성령의 지배를 받는 생활'입니다. 성령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기를 원하시지만 문제는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⑷'코람 데오'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라틴어 '코람 데오'(coram Deo)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으로 즉 '신전의식'을 의미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나를 보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아멘!/
요셉은 신전의식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보디발의 아내가 아무도 보지 않는 집 안에서 동침을 하자고 유혹했으나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라며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요셉은 그 현장에 사람은 없었지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식했던 사람입니다. 우리 그리스인들에게 이런 신전의식이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야 거룩한 행실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시골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불신자였지만, 아들은 주일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가는 도중인데 무밭을 보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얘야, 목이 말라 안 되겠다. 무 한 개 뽑아 먹어야겠다. 너 여기서 누가 오는지 잘 보고 있어라'하고 무밭에 들어가 다리통 만한 무를 뽑으려고 했습니다.
그 때 갑자기 아들이 '아버지. 누가 봅니다.'라고 소리쳤습니다. 깜짝 놀란 아버지가 밭에서 뛰어 나와서 보니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가 '이놈아. 보기는 누가 본다고 그래. 남자가 간이 커야지. 똑똑히 지켜' 그리고 다시 무밭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아까 뽑으려다가 뽑지 못한 그 무를 다시 뽑으려고 하는데, 이번에도 또 아들이 '아버지. 누가 봅니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무밭에서 급히 나와 사방을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화가 난 아버지는 '이놈아. 누가 본다고 그래? 아무도 없잖아'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하늘에 달과 별이 보고 있습니다.'라고 하자,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무시하면서 '쓸데없는 소리말고, 똑똑히 지켜' 그리고 다시 무밭으로 들어가서 무를 뽑으려고 하는데, 아들이 다시 소리쳤습니다. '아버지. 정말입니다. 누가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이번에도 헐레벌떡 나와서 '자꾸 누가 본다고 그래?'라고 말하자, 아들은 '하나님이 다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이쯤 되자, 아버지는 더 이상 무를 뽑을 수가 없었습니다. /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코람데오'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기쁘고 즐거운 생활이 가능하고 그럴 때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시16:8-9절에 보면 다윗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의 삶 즉 코람데오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 그의 마음이 기뻤고 그의 영도 즐거워했으며 그의 육체도 안전했습니다. /아멘!/
⑨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거룩하게 사는 비결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⑴먼저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고 했습니다(13). 이 말은 우리 마음의 집중을 의미할 수도 있고 마음의 훈련된 상태를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무엇보다도 '활동의 태세'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태세를 갖추라는 말입니다. /할/
또 '마음의 허리를 동인다'는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펄럭거리는 긴 베옷을 걷어붙이는 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 긴 옷을 걷어붙이고 급히 탈출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유월절 양을 먹었던 모습을 가리킵니다.
영적으로 애굽과 같이 죄악된 세상을 탈출하여 천국의 삶을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마음의 허리를 동여매고 매사에 긴장된 자세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한 삶을 사는 방법입니다. /아멘!/
⑵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근신'해야 합니다. 이 말은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네 자신을 다스리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근신은 마음과 행동을 침착하게 하는 것, 즉 사치와 방탕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근신이란 방종과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또한 게으름과도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근신이란 '절제하는 생활과 성실한 생활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할/
⑶'순종하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순종이 거룩해지는 통로입니다(14-15).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자녀는 부모를 닮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성품을 심어주십니다. 벧후1:4-7절에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드러내야 합니다. /아멘!/
⑷두려움으로 살아라!(17) 왜 두려움으로 살아야 하는가?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한 대로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왜 우리가 두려움으로 살아야 하는가? 인생은 나그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나그네'라는 말은 '파로이키아스'인데 본래 '지나가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사는 게 마치 지나가는 과객(過客)과 같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짧고, 인생 가운데 행한 모든 것들은 허무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벧전1:24절에서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인생이 풀과 같이 신속하고, 인생의 모든 영화가 꽃과 같이 허망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왜 소망이 있습니까? 벧전1:4절에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위해 천국의 영원히 썩지 않는 보화를 유업(상속재산)으로 준비해 두셨다는 말씀입니다. /할/
여기 '두려움'말은 공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경건한 두려움'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계산하고 모든 것을 셈해야 할 판단의 날이 반드시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할/
고후7:1절에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아멘!/
⑸거룩의 본질입니다(18-19). 그렇습니다. 거룩은 우리의 어떤 행실에서 거룩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금 같은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입니다. /아멘!/
여러분, 세상의 성공보다 귀한 것은 예수 십자가 보혈입니다. 그 복음을 깨닫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는 비결임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2011년 7월 17일 대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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