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반공법 위반’ 재심 승소한 한승헌 변호사
지난 24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한겨레>와 만난 한승헌 변호사.
“영국 정치가 윌리엄 글래드스턴은 ‘너무 느려 빠진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내 나이 41살 때 ‘어떤 조사(弔辭)’ 필화사건으로 구속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았어요. 83살이 된 지금 재심 끝에 무죄가 됐지요. 그나마 개인적으로는 다행이지만, 여전히 참담하고 착잡한 마음입니다. 과거 독재 치하에서 전과자 누명 쓰고 사법살인 같은 참변을 당한 분들께 빚을 진 것 같아요.”
24일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한겨레>와 만난 한승헌(83·사진) 변호사의 표정엔 회한이 묻어났다. 이틀 전, 그는 1975년 검찰의 조작 수사로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던 이른바 ‘어떤 조사’ 필화사건 재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시국사건 변호에 평생을 헌신한 국내 대표적인 인권변호사도 반공법을 위반한 범죄자라는 ‘주홍글씨’를 떼는 데 무려 42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1972년 기고 ‘어떤 조사’ 3년뒤 필화
인권운동·김지하 변호에 ‘미운털 구속’
구치소 옆방 ‘경희대생 문재인’ 인연도
“무죄 다행이지만 참담하고 착잡하다”
인권운동·김지하 변호에 ‘미운털 구속’
구치소 옆방 ‘경희대생 문재인’ 인연도
“무죄 다행이지만 참담하고 착잡하다”
30여년간 시국사건 120여건 변호맡아
“허약하고 겁도 많지만 불의에 용기”
사법부·검찰에 적극적인 ‘개혁’ 당부
“허약하고 겁도 많지만 불의에 용기”
사법부·검찰에 적극적인 ‘개혁’ 당부
사건의 발단은 1972년 9월 한 변호사가 <여성동아>에 쓴 ‘어떤 조사’라는 제목의 수필이었다. “당신의 죽음을 아파하는 것은 앞날의 ‘미확정 사형수’를 위한 인간의 절규를 높이는 결의”라는 대목 등을 검찰이 문제 삼았다. 검찰은 글에 등장하는 ‘당신’을 ‘유럽간첩단사건’(1969년)에 연루돼 1972년 7월 사형당한 김규남 전 공화당 국회의원이라고 지목했고, 결론적으로 한 변호사가 반국가단체 구성원인 김 전 의원의 활동을 찬양·동조했다(반공법 위반)는 논리로 그에게 올가미를 씌운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은 ‘미확정 사형수’에 대해 실제 사형집행이 이뤄졌던 당시 국내 현실을 꼬집은 것이다. 반공법을 비판하거나 북한을 찬양·동조하는 내용은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실제 한 변호사는 ‘어떤 조사’에 “미국의 연방대심원(연방대법원)에서 사형제도의 위헌을 선언하여 생명의 불가침이 크게 재인식된 터”라고 환기하며 “지구상에 사형을 폐지한 나라가 40개 나라에 이른다”고 적었다. 이어 “만일 ‘당신’이 한국 아닌 다른 나라에 태어났더라면 최소한 오랏줄에 목을 매이는 그런 최후는 면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오직 법관만이 자기 심증으로 흑백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높은 지존의 자리에 있다 해도 전능일 수 없다”면서 사법부의 판단만으로 생명을 앗아가는 사형제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권력이 전능을 탐하고 심판이 완전을 착각하기 때문에 절대의 생명이 상대적 판단 앞에 아침이슬이 되곤 한다”는 안타까운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글 어느 곳에도 반공법 위반의 소지는 없었다.
하지만 당시 그는 민주회복국민회의 중앙위원, 한국앰네스티 창립 이사 등으로 민주화와 인권운동에 참여하고 있었기에 독재정권에 ‘미운털’이 박힌 상태였다. 때마침 그가 반독재운동에 나섰던 이병린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위원(전 대한변호사협회장)에 대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불법 수사를 공개하고 시인 김지하의 변호까지 맡자, 검찰이 결국 ‘어떤 조사’를 트집 잡아 한 변호사를 구속기소한 것이다.
한 변호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어떤 조사’는 사법당국의 오판으로 ‘사법살인’이 일어날 가능성을 지적한 글이었습니다. 내가 검찰에 구속됐을 때는 1974년 긴급조치 1·4호가 발동되면서, 형식적인 법치주의마저 사라졌던 시대였어요. 민주화 인사나 저항적인 인물에게 도청·미행은 일상적인 일에 가까웠고, 나 역시 구속 수사 과정에서 안기부 수사관들로부터 야구방망이로 위협을 받았어요.”
구속된 그를 위해 129명에 이르는 역대 최대 규모의 변호인단이 꾸려졌다. 하지만 권력의 눈치를 살핀 사법부 태도를 바꾸지는 못했다. 대법원에서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형이 확정했다. 시련은 끝이 아니었다. 1980년 5월 이른바 ‘김대중 내란 음모’ 조작사건에 연루돼 다시 징역 3년형(1년 복역)을 받았다. 두 사건으로 8년간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다. 이 때문에 한동안 그는 시국사건 피해자를 돕기 위해 방청객으로 재판정을 드나들어야 했다.
“당시 검찰 수사는 진실을 밝히는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로 민주화운동을 했던 인사들에게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주는 모욕이자 보복이었어요. 사법부의 태도도 비슷했습니다. 다행히 내게는 복역 기간이 여러가지 법을 새로 공부하고, 의로운 청년이나 민주인사와 인연을 맺는 소중한 기회였어요. 75년 서울구치소 구금 중에 데모하던 대학생이 옆방에 왔길래, 교도관을 통해 새 ‘메리야쓰’(내의)를 한 장 건넸는데, 그게 ‘경희대 법대생 문재인’이었던 것 같은 일들이죠.(웃음)”
2015년 서울고등법원이 ‘유럽간첩단사건’ 피해자인 김 전 의원 재심 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했고, 이제는 한 변호사 차례였다. 이듬해 한 변호사는 ‘김 전 의원이 간첩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됐고, 그를 애도·위로해 반공법을 위반했다는 유죄의 전제도 소멸됐다’며 재심을 신청했다. 지난 22일 재심 재판부는 “수필 내용은 사형집행을 당한 사람을 애도하고 있을 뿐,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 폐지 주장은 나오지 않는다”며 무죄 판결을 내렸다.
한 변호사는 1965년 이후 30여년간 시국사건 120여건을 변호했다. 변호사 자격을 잃었던 8년을 빼면, 구속과 가혹수사에 대한 공포에 맞서며 한해 5건 이상을 맡은 셈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나약한 사람’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저 사람은 독재정권 시절에 시국사범을 변호할 만큼 겁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해요. 하지만 보다시피 나는 몸도 허약하고, 겁이 많은 사람입니다. 다만, 불의한 권력에 탄압받는 사람들을 외면하면 나중에 스스로 가책받는 게 더 무서워 용기를 낼 수밖에 없었어요. 그렇게 몇 건 하면 끝날 줄 알았는데, 숙명이 돼서 평생 이런 삶을 살게 됐어요. 나중에는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전직 직원들까지 ‘한 변호사만큼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 같다’며 부당해고 소송을 부탁하더군요.(웃음)”
한 변호사는 올해 법조인으로서 60년을 맞았다. 2006년엔 노무현 정부의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피의자 신문조서 증거능력 제한과 재정신청제도 확대 등을 끌어내기도 했다. 그는 최근 개혁의 화두가 된 검찰과 사법부에 대해서도 “사법부와 검찰이 권력에 휘둘리거나, 동조자, 추종자가 돼서는 안 된다”며 ‘적극적인 변화’를 당부했다.
인터뷰 말미 그가 건넨 자신의 시집 <하얀 목소리>에 실린 ‘백서’의 한 대목이다.
‘거센 비바람이야 어제오늘인가/ 아직은 목마름이 있고/ 아직은 몸부림이 있어/ 시달려도 시달려도 찢기지 않는/ 꽃잎 꽃잎/ 꽃잎은 져도 줄기는 남아/ 줄기 꺾이어도 뿌리는 살아서/ 상처 난 가슴 가슴으로 뻗어 내려서/ 잊었던 정답이 된다’.
글·사진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