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소설가 황석영 (하)
소설가 황석영 (하)
“아쉬움은 없습니다. 난 운이 좋은 사람이었고 사람들 사랑을 많이 받았으니까. 내가 그걸 전혀 의식 못 하다가 이번에 자전을 쓰면서 알았어요. 내가 얼마나 철딱서니 없나, 생각도 들고.” 최근 자전 <수인>을 펴낸 소설가 황석영이 지난 6월13일 오후 경기 고양 일산동구 정발산동 자택 인근 카페에서 인터뷰를 하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나는 젊은 나이에 일찍 이름을 얻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고, 항상 누군가 곁에서 챙겨주거나 아껴주는 이들이 있었다. 재간둥이란 참으로 싸가지 없는 존재여서 그것을 믿고 이기적인 자신을 잘 알아채지 못할 때가 많다. 또한 나는 늘 어딘가 목적지를 정해놓고 앞으로 달려가기에 바빴다… 수많은 정다운 사람들을 뒤로하고 무엇을 향해서 그토록 내달려온 것일까.”(황석영, <수인> ‘에필로그’ 중에서)
쉼 없이 달려온 인생이었다. 황석영(1943년생)은 만주에서 태어나 해방을 맞고, 평양을 거쳐 서울로 월남한 뒤 전쟁을 겪고,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4·19와 5·16을 맞았다. 베트남전쟁과 유신, 10·26과 5·18, 6월항쟁과 지난해 촛불항쟁에 이르기까지 그는 우리 현대사의 모든 현장을 몸으로 겪어내고 그 시대적 씨줄을 횡단하는 다양한 군상을 문학으로 그려냈다. 최근 황석영은 자신의 일대기를 담은 자전 <수인>을 내놓으면서 그에게 도움을 주었던 지인들의 명단을 책 말미에 실었다.
“윤한봉(사회활동가, 작고) 김근태(정치인, 작고) 나병식(출판인, 작고) 김남주(시인, 작고) 문익환(목사, 작고) 최승칠(소설가, 작고) 김용태(전 민예총 이사장, 작고) 여운(화가, 작고), 김영중(조각가, 작고) 이문구(소설가, 작고)…”(<수인>, ‘감사의 말’ 중에서)
그와 고락을 함께했던 많은 이들이 세상을 떴다. 밤새 질펀한 술판을 벌이며 왁자지껄 의기투합하고, 수배와 투옥의 고난을 스스럼없이 나누어 졌던 벗들이 하나둘 역사 속 인물로 사라진 지금, 황석영은 그들이 “무엇을 위하여 그토록 내달려온 것인지” 들려줄 수 있는 몇 안 남은 시대의 증인이다. 황석영의 자전은 단순한 개인회고록이 아니라, <수인> 1·2권의 부제가 말하듯 ‘경계를 넘’어 ‘불꽃 속으로’ 뛰어들었던 당대 주요인물들의 생생한 육성을 담고 있다. 지난 회에 이어 황석영과 나눈, 못다 한 이야기를 전한다.
“난 글쓰기를 통해서 자기 치유를 하고 극복을 하는 거 같아요.” 소설가 황석영은 최근 출간된 자전 <수인>에 자신의 일대기가 아주 세밀하게 묘사되었음에도 유독 가족사와 관련된 부분에선 생략이 많았던 데 대해 잠시 침묵하다 “그게… 내가 상실한 부분입니다”라고 짧게 답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문학 한다고 유난 떨지 마라
-황석영 문학을 논할 때 흔히 ‘리얼리즘문학’ ‘노동문학’이라든가 ‘남성서사문학’의 대표라는 타이틀이 따라붙습니다. 이런 평가에 대해서 동의하세요?
“저는 우습게 생각하죠.(웃음) 젊어서부터 그런 구분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겼어요. 이건 분단문학, 저건 노동문학, 이렇게 구분하는 건, 한국 문단이 단편소설을 중심으로 작품 평가를 해왔기 때문일 거예요. 아니, 사람이 뭐 투쟁만 하고 노동만 합니까? 사람이 살면서 연애도 하고, 아버지가 월남민이라거나 6·25 때 살해당했다 그러면 분단 얘기도 들어가고, 장편소설을 쓰면 그 안에 복합적으로 다 들어가는 거죠. 전 사실 다양한 소설을 썼습니다. ‘객지’ 같은 소설이 있는가 하면 ‘섬섬옥수’나 ‘삼포 가는 길’같이 서정적인 것도 있고.”
-요즘 독자들은 무거운 서사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역사적 서사가 빠진 문학에 대해서 어떻게 보세요?
“전 그런 경중을 따지지 않습니다. 서사가 없어도, 문체와 내용이 걸맞고 얘기를 잘 풀어내는 좋은 작품이 많아요. 서사가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하진 않습니다. 물 한 방울에도 바다가 깃드는 법이니까.”
-‘좋은 글을 쓰는 방법이 뭐냐?’는 질문을 받으실 때마다 ‘글은 궁둥이로 쓴다’고 답하시던데 (웃음) 그게 아무나 궁둥이 깔고 앉아 있다고 되는 겁니까?
“사람들이 그 말을 잘못 알아듣는데, 제 얘긴 문학을 신비화하지 말란 거예요. 문학을 천형(天刑)에 빗대어 신비화하고 작가를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처럼 얘기하는 거 딱 질색입니다. 글쓰기는 노동이에요. 일정 시간을 노동에 바치지 않으면 못 쓰는 거예요. 삼류영화 보면 작가가 글 쓰면서 막 (원고지 구겨서 던지는 흉내 내며) 피투성이가 되잖아요. 화가들은 베레모 쓰고 그림 그리다 (캔바스에 ×자 긋는 흉내) 찍찍 긋고 찢어버리고… 실제론 그렇지 않다는 거죠. 노동을 해도 한 20년 하면 달인이 된다는데, 글은 50년 이상 써도 달인이 안 되는 것 같아. 그냥 수수하게 앉아서 코딱지도 후비고 배꼽 까고 앉아서 짜장면도 먹고, 그러다가 안 풀리면 새벽에 슬슬 걸어나가서 24시간 국밥집 같은 데 가서 소주 반병쯤 먹고 들어와요. 자고 일어나면 막혔던 게 풀리기도 하고 내가 괜히 엄살 부렸나 싶기도 하고.”
-일반인들이 생업에 종사할 때처럼 문학도 몸으로 하는 노동이다?
“그럼요. 그래야 동시대 사람들하고 교감할 수 있죠. 사람들이 출근해서 하는 여러 잡다한 노동보다 내가 그렇게 특별히 뛰어난 일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작품에 임할 때 그는 건실한 샐러리맨처럼 일상을 관리한다. 일은 보통 남들 다 자는 밤 10시경에 시작하는데 가장 집중력이 높아지는 시간대는 새벽 2시부터 4시 사이. 자고 일어나서는 야채즙과 낫토로 간단히 요기하고, 식사는 보통 저녁 한 끼만 한다. 특별히 외부 약속이 없을 때는 육식도 가급적 피하는 편이다. 황석영에게 문학은 고독한 천재들의 밀실작업이 아니라, 달고 쓰고 짜고 매운 일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는 삶의 흔적이다. 엄살 부리지 않고 유난 떨지도 않으면서, 흔들리는 세파 속에서 수걱수걱 자기 삶을 꾸려나가는 보통사람들의 남루하지만 절실한 뜨거움을 담아내는 일.
“방북 20주년을 그냥 넘길 수 없다는 개인적 조급성으로 너무 성급히 이명박 정부를 믿었다는 게 내 불찰이고, 정치적으로도 큰 과오였어요.” 방북 20주년 해인 2009년 이명박 대통령의 중앙아시아 순방 동행과 관련한 얘기들은 <수인>에 빠져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리얼리즘문학·노동문학 따위 타이틀
“그런 구분 자체 못마땅하게 여겨”
‘글은 궁둥이로 쓴다’는 평소 지론
“글쓰기는 노동, 신비화하지 말란 뜻”
“그런 구분 자체 못마땅하게 여겨”
‘글은 궁둥이로 쓴다’는 평소 지론
“글쓰기는 노동, 신비화하지 말란 뜻”
89년 ‘금단의 땅’ 북한 전격 방문
작가의 치기 등 부정적 평가 뒤따라
“분단이 운명이냐”던 재일동포의 질문
“한계 긋고 산 세월에 자괴감 들었다”
작가의 치기 등 부정적 평가 뒤따라
“분단이 운명이냐”던 재일동포의 질문
“한계 긋고 산 세월에 자괴감 들었다”
아, 내가 왜 북한을 못 가?
1989년 3월 황석영은 또 한 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다. 어머니 등에 업혀서 38선을 넘은 지 42년 만에 금단의 경계를 넘어 북한 땅을 밟은 것이다. 한 해 전인 1988년 노태우 정부는 ‘남북동포의 상호교류와 이산가족 상호방문, 남북간 대결외교 종식’ 등을 골자로 하는 7·7선언을 발표했다. 평화공존을 위한 획기적인 조치였지만, 당시 정부는 남북 교류에 있어 정부를 통한 대북창구 단일화를 주장했고 시민사회에서는 더욱 자유롭고 다변화된 민간 차원의 교류와 협력을 주장했다. 황석영이 정부 허가 없이 방북을 결행한 것은 그 시점이었다. 직접 가서 북측과 남북 문화교류를 위한 협의를 하고, “객관적인 북한방문기를 써보고 싶다는 의욕”(<수인> 1, 166쪽) 때문이었다고 했다.
-당시 방북에 대해서 여러 말이 많았습니다. 같은 해, 진보시민사회를 대표하는 전민련 문익환 목사의 방북이나 전대협 임수경의 방북과는 달리, 조직적 합의에 의하지 않은 개인적 행동, 작가로서의 치기라는 부정적 평가도 있었어요.
“일부러 그렇게 소문을 낸 거죠. 88년 우리가 민예총(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을 조직할 때부터 민간 자주교류에 대한 논의가 있었어요. 누군가 거길 가서 물꼬를 터야 하잖아요. 조직과 별개로 개인으로 움직이겠다고 한 건, 불고지죄(반국가활동을 알면서 신고하지 않는 경우 처벌하는 국가보안법 조항)로 다 걸리게 될까봐 그런 거지.”
-남북 문화교류가 필요하다는 데는 공감대가 있었다 해도, 누굴 대표로 파견한다는 합의는 없었던 것 아닙니까?
“내가 대표한 적은 없어요. 다만 내가 해외 인사들을 많이 알고 북하고 연결될 수 있는 통로를 아니까 내가 간 거지. 황석영이가 워낙 엉뚱한 일을 잘 저지르니까 (웃음) 내가 갔다고 하면 ‘황석영이 무슨 간첩이야? 소설가지’ 그럴 거 아녜요. 그렇게 해프닝을 벌여야 금기에 대한 두려움을 깨고 민간교류가 일상화될 것 아니에요? 그건 누군가 해야 될 일이었어요.”
-자발적으로 투옥을 각오하고서까지 북한에 가고 싶었던 개인적 이유가 있습니까?
“이번에 자전을 쓰면서 스스로 확인한 건데, 어렸을 때 평양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던 추억이 내겐 있어요. 아버지하고 모란봉 올라가서 미르꾸(캐러멜) 사줘서 맛있게 먹던 기억도 나고.”
-그게 3~4살 때 일인데 기억이 나세요?
“그때 찍은 사진이 있어요. 어머니가 고향 평양에 대해서 늘 하시던 얘기들, 할머니 얘기. 그런 게 내 속에 강력하게 남아 있었는데, 85년에 서독에서 열린 ‘제3세계 문화제’에 아시아 대표로 참가하고 유럽, 미국, 일본을 돌면서 ‘아, 내가 왜 북한을 못 가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구 지식인들은 도무지 이해를 못 하는 거야. ‘니들은 북에 대해서 왜 그렇게 두려워하고 터부시하냐?’면서. 그걸 의아하고 우습게 여기는 게 그들 표정과 말씨에 그대로 드러나요. 작가로서 모멸감이 들었죠.”
황석영은 일본에서 한 재일동포로부터 들은 질문을 오래도록 되새겼다고 했다. “그럼 당신은 조국의 분단을 그냥 운명이라고 체념하고 살아갈 건가요?” 국가보안법이 무서워서 한계를 그어놓고 활동하고 말하고 글 쓰며 살아온 세월들에 자괴감이 들었다. 한국전쟁 당시 남과 북에서 죽어간 이들, 그 경계의 금기를 깨뜨리다가 갇히고 처형당한 이들, 광주에서 죽어간 시민들을 생각하며 그는 마음을 굳혔다.
변절’ 꼬리표 붙은 2009년 ‘MB 동행’
‘알타이연합’ 프로젝트 흐지부지 끝나
“문익환·윤이상·김일성 다 죽고 없어
혼자라도 뒷마무리해야지 싶었던 것”
‘알타이연합’ 프로젝트 흐지부지 끝나
“문익환·윤이상·김일성 다 죽고 없어
혼자라도 뒷마무리해야지 싶었던 것”
‘가족사 관련해 생략 많더라’ 지적에
침묵하다 “내가 상실한 부분입니다”
“나는 문학지상주의자 아니지만
글쓰며 치유받고 극복한 것 같아”
침묵하다 “내가 상실한 부분입니다”
“나는 문학지상주의자 아니지만
글쓰며 치유받고 극복한 것 같아”
광복 60돌이었던 2005년 7월 황석영은 일본 도쿄에 있는 오에 겐자부로의 자택에 방문해 문학의 현재와 미래, 동아시아 평화 구축을 위한 해법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8년 황석영(맨 오른쪽)은 자전적 일화를 담은 성장소설 <개밥바라기별>을 출간했다. 그해 열린 ‘개밥바라기별 문학투어’에 참여한 시민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2009년 5월12일 이명박 당시 대통령의 중앙아시아 순방에 동행한 황석영이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유적지에서 이 대통령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연합뉴스
“미지의 것 때문에 금기의 억압이 있다면 작가는 자유로워지기 위하여 그것을 위반하고라도 확인해야만 한다. 국경, 장벽, 철조망 너머로 날아오고 날아가는 철새들을 본 적이 있다면 생명의 본성과 사람이 정해놓은 잡다한 규정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반문하게 될 것이다.”(<수인> 1, 275쪽)
황석영은 방북 후 베를린에 체류하며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체험한 북한 기행문을 썼다. 방북기의 제목은 <사람이 살고 있었네>. 그가 한창 글을 쓰고 있던 89년 11월,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동-서독 간의 자유왕래가 실현되었다.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의 시민들이 서로 꽃을 주고받으며 만세를 부를 때, 황석영은 찬 이슬비에 흠뻑 젖은 채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다.
그러나 한반도 냉전의 장벽은 여전히 견고했다. 1993년, 4년여의 망명생활을 접고 자진 입국한 황석영은 곧바로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수인번호 83번. 그는 7년형을 받고 복역하다가 5년 만인 98년 김대중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어느 날, 이명박과 함께 선 까닭
-정상적인 집필을 할 수 없는 감옥생활 5년은 작가에겐 치명적인 형벌입니다. 후회하지 않으세요? 선생님의 방북과 망명생활을 소영웅주의적인 행동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소영웅주의를 점잖게 얘기해서 ‘메시아주의’라고 하기도 해요.(웃음) 지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거나 저로 인해서 사람들이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 메시아주의. 내 안에 그런 요소가 있어요. 내 소설이나 행동이 남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믿는 허영심이.”
-스스로 메시아주의라고 얘기하시는 건 좀 위악적으로 들리는데요.
“아니 뭐, 그건 분명해요. 나한테 그런 허영이 있다는 거. 내가 2009년에 이명박하고 중앙아시아 간 것도, 남북관계에 뭔가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촉매제 역할을 하고 싶단 욕심이 있었던 거예요.”
-지금도 ‘황석영’ 이름을 검색하면 연관검색어로 ‘변절’이란 단어가….
“그것 때문에 욕을 와장창 먹고 지금도 그런 꼬리표가 따라다녀요.”
-그때 왜 그러셨어요?
“2009년이 내가 방북한 지 20주년 되는 해였어요. 근데 돌아보니, 방북 당시 관계자들, 문익환, 윤이상, 김일성… 다 사망한 거야. 나 혼자 살아남았어. 그러니 내가 뭐라도 뒷마무리를 해야 하지 않나 싶었지요. 2008년에 엠비(MB)정권이 들어섰는데 광우병 사태 겪고 나서 (지지를 만회하기 위해) 지들도 뭔가 해야 될 거 아냐. 그래서 정권 초창기엔 강력하게 남북관계 개선을 하고 싶어 했어요. 근데 위기가 온 게 금강산에서 초병에 의해서 관광객이 총격당해 죽는 사고가 났잖아요. 그 사건으로 남북관계가 완전히 닫혀버렸거든. 그냥 두면 이런 경색국면이 계속 가겠다 싶어서 걱정스럽던 차에, 김대중 정부 때부터 몽골이 제안해온 게 생각난 거예요. 북한 노동력하고 남한의 자본과 기술로 동몽골을 개발해달라는 거였지. 동몽골이 우리 한반도 전체의 1.8배 되는 넓이인데 거기 3만명이 살아요. ‘남북문제를 군사 정치적으로 풀려고 하지 말고 경제 문화적으로 풀자. 그럼 그게 통일의 1단계가 되지 않겠나.’ 그런 얘기를 술자리에서 했더니 그걸 듣던 김용태나 성유보, 최열, 조성우 같은 이들이 나더러 그걸 엠비한테 직접 제안해 보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제안서를 써서 보냈지. 엠비가 당장 만나자고 하더니, 그거 자기가 서울시장 때부터 꿈꿔온 거라고 자기가 하겠다는 거예요.”
-북한도 동의했나요?
“내가 20장짜리 긴 편지를 김정일한테 써 보냈는데, 내가 방북했을 때 김일성이 ‘느슨한 연방제’ 얘기한 걸 썼지. ‘당신 아버지가 못다 이룬 거 당신이 해야 된다’고 하면서… 김정일이 곧바로 하겠다고 했어요. 그러고 나니까, 갑자기 불이 붙은 거야. 남북 접촉이 시작되고 정상회담까지도 하려고 했어요. 그 무렵에 청와대에서 중앙아시아 순방을 가는데 나더러 같이 가자고 한 거예요. 자기들 입장에선 나를 한 화면에 넣어 활용해 먹겠단 생각이었겠지만 나도 이 정권을 활용해야겠단 생각이 있었으니까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거지.”
-그게 ‘알타이연합’ 프로젝트죠. 근데 왜 성사가 안 되었죠?
“2010년 8월에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초원문화제를 열고 ‘알타이 문화경제연대’를 발족하기로 했는데 그해 2월에 갑자기 청와대에서 날 보자더니 초원문화제에서 북한을 빼라는 거예요. ‘그럼 이거 왜 시작했냐? 난 그럼 빠지겠다’ 그랬죠. 그러곤 3월에 천안함 사건이 딱 터졌어요.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마치 예정되어 있던 것처럼. 그러곤 완전히 없던 얘기가 된 거야.”
-당시 유라시아 특임대사로 내정되셨다는 기사도 나왔는데.
“그거 거짓말이에요. 유라시아 특임대사라는 직책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제안을 받은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어요.”
-그러니까 선생님이 재야인사들이랑 논의하다가 청와대에 먼저 ‘알타이연합’ 제안을 하신 거고 그 제안을 엠비가 받아서 북한하고도 교감을 가지고 추진하기로 했던 건데 어느 날 갑자기 청와대가 말을 뒤집었다? 그 이유나 과정에 대해선 들은 바가 없으세요?
“난 알 수가 없죠. 북한도 아마 벙쪘을 거야. 몽골 주재 대사도 바꾸고 초원문화제에 사람도 150명이나 보내겠다고 했었는데.”
-그 얘기들은 이번 자전에서 빠져 있던데 아직 마음 정리가 덜 되어서인가요?
“방북 20주년을 그냥 넘길 수 없다는 개인적 조급성으로 너무 성급히 이명박 정부를 믿었다는 게 내 불찰이고, 정치적으로도 큰 과오였다, 이렇게 정리를 하고 있어요. 그러나 나로선 억울하지.(웃음)”
지난달 8일 황석영은 서울 종로구 한 식당에서 자전 <수인> 출간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나에겐 문학이 힐링
-이번 자전에서는 유년기부터 1998년 출소할 때까지, 20년 전까지의 상황만 다뤘어요. 에필로그에 이번 촛불항쟁 얘기가 실리긴 했지만요. 언젠가 <수인>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증보해서 다시 낼 기회가 생긴다면 어떤 얘기를 더 담고 싶으세요?
“아유, 난 지나간 작품을 돌아본 적이 없어요. 한번 지나고 나면 그냥 저 뒤에 머물러 있는 거야. 최인훈 같은 사람은 <광장>을 수십 번 고쳐 썼다고 하고, 조세희나 황순원 선생도 평생 자기 작품을 고쳤다는데 난 그럴 생각이 없어요. 당시 시간대에 그냥 놔두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이번 책에서 선생님 일대기가 아주 세밀하게 묘사되었는데, 유난히 뚝뚝 끊기는 느낌이 드는 대목이 있어요. 가족사와 관련된 부분에서 생략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게… 내가 상실한 부분입니다.”
인터뷰 시작하고 처음으로 그가 짧게 답했다. 유별나게 자신을 편애했던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회한, 두 번의 파경 뒤에 현재의 아내를 만나기까지의 우여곡절, 세 아이의 성장과정을 온전히 함께하지 못한 아버지로서의 자책감이 그의 씁쓸한 침묵 위로 배어나왔다.
-이번 자전을 통해서 선생님 개인사의 부침과 그때 쓴 작품을 연결해 볼 수 있었던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내면적인 방황이 극에 달해서 자살 시도까지 하다가 등단작인 ‘입석 부근’을 탈고했고, 월남전 트라우마로 시달리다가 ‘탑’을 쓰고, 긴 징역살이 후유증을 겪다가 <오래된 정원>을 쓰셨지요. 남들은 안 써져서 죽고 싶다고 하는데 (웃음) 선생님은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울 때마다 명작을 남기셨네요.
“잘 보셨네요.(웃음) 난 글쓰기를 통해서 자기 치유를 하고 극복을 하는 거 같아요. 내가 문학지상주의자도 아니면서 문학을 (내가 돌아갈) 집으로 삼았던 건, 바로 그런 점 때문이에요. 글을 쓰면 제가 달라져 있는 거예요. 글을 쓰면서 자기 치유도 되고 저 자신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거 같아요.”
-황석영 소설을 읽으며 성장한 독자 입장에서 보자면, <객지>, <무기의 그늘> 같은 작품과 <오래된 정원>, <바리데기> 같은 작품 사이에 상당한 간극이 느껴집니다. 황석영 문학을 흔히 전기문학, 후기문학으로 나누는데, 그 분기점이 뭔가요?
“<객지>나 <무기의 그늘> 같은 전반기 작품은 아주 전형적인 서구식 리얼리즘이에요. 객관적인 문체, 단문, 형용사 잘 안 쓰고 아주 냉정한 하드보일드 스타일… 그런데 망명생활 중에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는 걸 봤어요. 장벽이 무너질 때 내가 느낀 건, ‘아, 이제 세계체제의 이행기가 되겠구나’ 하는 거였죠. 제국주의나 사회주의, 냉전질서 모두 서구 300년의 근대성, 현대성의 산물입니다. 사회주의가 끝나서 우리가 이긴 게 아니라, 대립물 중 하나가 없어졌으니 사실은 위기가 시작된 거예요.”
-어려운데요. 그게 문학과 무슨 관계죠?
“괴테가 세계문학을 얘기할 때 거기 아시아문학, 아프리카문학 같은 건 없었어요. 유럽문학이 세계문학의 전부였지. 서구문학이 일본의 개화라는 필터를 거쳐 우리 땅에 들어오면서 신소설, 신시 ‘해에게서 소년에게’ 이런 게 한국 현대문학의 시작점이 되었거든요. 저는 이걸 ‘단절’이라고 봅니다. 토박이성, 토박이의 말하는 법, 구성하는 법, 이런 우리의 문학적 전통이 끊겨버린 거야. 우리에겐 19세기까지 쌓여온 문학형식과 서사가 있었어요. <홍길동전>이나 <춘향전>이 이미 17세기에 시장바닥에 나왔고 19세기엔 방각소라는 출판사를 통해서 인쇄된 책들이 장터 ‘책전’에 즐비했거든요. 베를린장벽의 붕괴는 주변부 토박이를 억제하는 걸로 번성했던 세계체제나 세계문학의 시대가 저무는 걸 의미하죠.”
-단순히 냉전의 해체가 아니라 서구 중심 모더니즘의 쇠퇴다?
“그렇죠. 그럼 나는 어떻게 할 거냐? ‘내 목소리’로, 내가 가진 전통의 방법과 형식으로 이야기해야겠다는 거예요. <장길산>이나 마당극을 하면서 그런 훈련을 해뒀기 때문에, 그런 형식에 자신이 있었어요. 이걸 소설에서 해야겠다, 결심한 게 베를린이죠.”
그렇게 해서 나온 작품이 그의 후기작인 <손님>, <심청>, <바리데기>, <낯익은 세상> 같은 작품이다. <오래된 정원>이나 <여울물 소리>처럼 여성화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작품이 많아진 것도 새로운 특징이다. 그의 문학은 안전한 성취에 머무르지 않고 시대의 변화와 호흡하며 끊임없이 변모하고 진화해왔다.
-우여곡절이 많은 인생이셨지만 그래도 선생님을 부러워하는 사람이 많을 거예요.
“누가 나를?”
-예.(웃음) 어떤 의미에선, 평생 하고 싶은 거 다 해보고 하고 싶은 말 다 해보고, 가고 싶은 데 다 가보고 그렇게 사신 분 아닌가요? 그래도 여전히 못다 이뤄서 아쉬운 게 있으세요?
“음… 없습니다. 난 운이 좋은 사람이었고 사람들 사랑을 많이 받았으니까. 내가 그걸 전혀 의식 못 하다가 이번에 자전을 쓰면서 알았어요. 그리고 내가 얼마나 철딱서니 없나, 생각도 들고. 남들이 나한테 준 관심이나 도움, 지원 이런 걸 난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거야. 옛날 자료들 뒤져보고 옛날 생각 하다 보니까 하나하나 기억이 나는 거죠. 그런 면에서 굉장히 후회스러워요. 아, 나도 좀 주고받고 했으면 좋았을걸. 재승박덕(才勝薄德)이라고 그러나? 그걸 아주 통절하게 느끼고 있어요.”
황석영은 흠결이 적지 않다. 그러나 투명하다. 그는 때로 경솔하고 성급하고 자기중심적이었으나 위선으로 가리기보단 스스럼없이 허물을 드러내고 욕을 먹었다. 그는 고고한 지사나 과묵한 협객은 아니었으나, 늘 우리와 함께 있었다. 도포 자락 휘날리며 선비들이 말 타고 지나간 자리, 흙먼지 속에서 이쑤시개 물고 좌판을 기웃거리는 동네 감초처럼. 황석영만큼 평생을 지치지 않고 끈질기게, 구질구질한 삶의 현장에 밀착해서, 영웅도 호구도 아닌 민초들의 인생 가닥가닥을 치밀하게 사랑한 사람도 흔치 않을 것이다.녹취 심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