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바람 불다』의 기독교 세계관적 접근

성령충만땅에천국 2017. 8. 9. 10:53

『바람 불다』의 기독교 세계관적 접근 |성경 말씀 묵상

은혜 | 조회 44 |추천 0 |2017.08.08. 15:42 http://cafe.daum.net/seungjaeoh/J75F/204 

* 이 글은 이번 군산시 근대교육관에서 열린 <제16회 동북아기독교작가회의-8월 3~6일->에서 일본 작품 <바람 불다>를 읽고 이 작품의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소고를 적은 글이다.


 

1. 들어가며

이 작품은 1936년 일본의 중견작가 호리 다쓰오堀辰雄가 그의 지순至純한 사랑을 테마로 발표한 일본의 전형적인 사소설이다. 내가 받은 텍스트는 1938년에 신조사新潮社에서 발행한 호리씨의 작품을 오경환 교수가 번역한 것이다. 먼저 줄거리를 이야기 하고, 나 자신의 기독교세계관을 피력한 뒤 호리씨의 작품 바람 불다의 기독교 세계관적 접근을 시도하고자 한다.

 

2. 바람 불다와 이 작품의 기독교세계관적 접근

2.1 줄거리

바람 불다<바람 불다>, <겨울>, 그리고 <죽음의 계곡 아래서>의 세 소제목으로 씌어져 있다.

<바람 불다> 한 여름, 갈대가 끝없이 펼쳐진 들판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세쓰코節子 자작나무 그늘 아래 누워 그녀를 보고 있는 =저자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불어온 바람으로 그림이 이젤과 함께 넘어지는 소리가 들릴 때 그쪽으로 달려가려는 세쓰코의 손을 잡았다. 이 때 문득 입속에 맴돌던 폴 발레리의 시의 한 구절: ‘바람 불다.살고싶다Le vent se lève,il faut tenter de vivre.'가 떠올랐다. 이것은 작품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듬해 봄이다. 그는 약혼녀의 아버지로부터 폐결핵이 악화되고 있는 딸을 요양원에 보내야겠는데 동행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4월 말 그들은 요양원, 야쓰가타케 산록岳山麓에서 처음으로 단둘이 식사를 한다. 이런 생활은 오래전부터 그의 꿈이었다. 그러나 세쓰코의 병세가 악화되어가자 그는 불안해한다. 여름의 더위와 함께 기침이 심해졌다. 그 때 여행 중에 있던 아버지가 요양원에 들리자 세쓰코는 홍조를 띈다. 아버지는 이·삼일 머물고 떠났는데 그녀는 다시는 아버지를 안 만나겠다고 그에게 미안한 듯 말한다. 언제 죽음의 침상으로 변할지 모르는 침대 위에서 그들의 생의 즐거움은 순간적인 것이 아닐까 불안해하며 그는 자기들 두 사람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서 남기기로 한다.

<겨울> 그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지만 끝을 내지 못하고 있다. 이때부터는 겨울 내내 일기체의 글이 시작 된다. 그는 두 사람이 너무나도 짧은 생애 속에서 얼마만큼이나 서로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고 있는가를 두고 고민한다. 유한한 인간이 영원한 사랑을 말할 수 있을까?

125일 세쓰코는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으로 침대에 누워 밖에 아버지가 보인다고 말한다. 산 왼쪽 끝부분에 비친 햇살이 산 비탈면에 아버지의 환상을 보게 한 것이다. 세쓰코는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바로 미안하다고 덧붙인다. 그는 돌연, 목을 죄는 듯한 공포심이 엄습해 와서 세쓰코 쪽을 향한다. 그리고 얼굴을 덥고 있는 그녀의 양손을 얼굴에서 억지로 떼어 놓자 그녀는 저항하지 않는다. 그는 평상심을 잃고 털썩 무릎을 꿇고 침대 끝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머리키락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세쓰코의 손길에 몸을 맡긴 채. 그것이 세쓰코와의 마지막이었다.

<죽음의 계곡 아래서> 세쓰코와 처음 만난 3년 후 그녀와 함께 했던 장소의 언덕위에 있는 마을, ‘행복의 계곡이라는 곳을 그는 들린다. 그곳은 서양인들을 위한 별장이 이곳저곳 있는 곳이다. 산장을 빌려 들어가면서 이곳은 죽음의 그림자가 머무는 계곡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한 때 그는 나 비록 죽음의 계곡을 걸을지라도라는 희미한 기억 속의 시편 구절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도 공허하게만 느껴진다. 1217일 창가로 다가가 정신 잃은 사람처럼 계곡을 바라보다가 다시 난로 옆으로 돌아와서 라이너 릴케의 <레퀴엠>을 읽는다.

죽음이 세쓰코를 데려갔다. 세상 사람은 죽으면 그곳에 적응하고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쓰코만은 다르다. 그녀는 자기에게 돌아와 자기 곁에 있다. 그녀는 그의 몸을 스치고, 근처를 방황하면서 무엇인가에 부딪쳐 그녀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려 주지 않은가? 그는 이렇게 릴케의 시에서 세쓰코가 살아 자기 곁으로 와 머문 것을 느낀다. 그 시에서 영감을 받아 죽음을 초월해서 새로 함께 사는 삶을 믿으며 릴케의 시를 인용함으로 작품을 마감한다.

 

2.2. 나의 기독교적 세계관

기독교적 세계관이란 예수를 믿는 사람이 세상을 보는 관점을 말한다. 이는 사물을 인지하는 방식이기도 하고 삶에 대한 시각vision of life이기도 하다. 기독교인은 궁극적으로 어떤 세상을 보는가? 하나님은 아름다운 자연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자기와 닮은 인간을 영생하도록 창조하여 천국을 완성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지상으로 추방되었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옛 천국 질서를 회복하고자 독생자 예수를 육신을 입혀 원수들이 지배하는 지상에 보냈다. 인간들은 그를 저주하며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그는 이렇게 인간의 죄를 대속代贖하는 제물로 바쳐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이 붙들어 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육체를 입고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중보仲保,mediate한다. 예수는 부활로 당초의 천국의 실재를 실증하였다. 이렇게 해서 다시 천국은 왔다. 그런데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자.갈라디아 5:1라고 바울은 권하는데 인간들은 죽음과 영생, 세속과 신성, 현실과 믿음의 한계점에서 종의 멍에를 버리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나 자비로우셔서 세상 끝까지 복음전파로 이방인 불신자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로마서11:25 최후의 심판을 유보하고 계신다. 이런 세상을 보는 기독교인의 관점은 무엇인가? 기독교인 각자는 하나님이 설계한 세상을 보되 자기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통해 하나님의 눈으로 본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고 자기는 죽고,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자기를 위해 자신을 버린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가운데 사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갈라디아서 2:20 參照. 이것이 기독교적 세계관이 다른 세계관과 다른 점이다. 즉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가 죽고 거듭나서 새로운 영안靈眼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평범한 인간이 우주에 대하여 새로운 안목을 갖게 되면 그는 전제자나 특권층, 지배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종류의 사람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형제를 미워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모든 인간의 생명은 귀하며 내 생명도 하찮은 것이 아니어서 자살할 수가 없다. 고난도 하나님이 단련하시는 것을 믿기 때문에 순금같이 되어 나올 것을 믿고 인내한다. 이렇게  사물을 인지하는 틀이 완전히 바꾸어지는 것이 내가 보는 기독교적 세계관이다.

2.3. 호리 다쓰오堀辰雄 바람 불다의 기독교 세계관적 접근

호리 다쓰오는 기독교인이 아니다(36/12/13). 그러나 신·불신을 떠나 그의 작품의 곳곳에서 기독교적인 색채를 볼 수 있다. 그가 끝까지 놓지 않은 제목 바람 불다.살고 싶다.’는 프랑스의 시성 폴 발레리가 쓴 <해변의 묘지>10음절 장시의 마지막 6행시의 첫 구절이다. ‘바람 불다는 바람이 탄생하는 순간을 약동적으로 포착한 표현으로 당위가 아닌 욕망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솟게 하는 구절이다. 이것은 예수가 부활하여 제자들이 있는 곳에 와서 실망한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요한복음 20:22.라는 말로 생명을 부어 넣어주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또 라이너 릴케의 시에서 영감을 받고 소설의 대단원에서도 죽은 세쓰코가 살아나 자기와 함께 있는 것을 느끼고 믿는 장면도 부활의 소망을 상징케 한다.

진정한 기독교 작품은 예수를 영접한 거듭난 참 그리스도인이 기독교를 의식하지 않고 만인이 감동하는 소설을 썼을 때 작중 인물의 삶에서 또 그의 말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스며나는 그런 작품이다. 만일 호리씨가 운명을 초극하려는 단애斷崖를 뛰어넘어 예수를 영접했다면 그의 작품을 통해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보석 같은 기독교 세계관을 볼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3. 나오며

호리 다쓰오가 무덤에서 일어나서 자기 작품을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조명했다는 말을 들으면 펄쩍 뛰며 화를 낼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세상에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사도행전2:21.는 사도 바울의 말을 쉽게 믿고 구원의 방주에 평안이 앉아 있는 기독교인이 있는가하면 호리씨처럼 죽음을 초월하고 싶으나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몸부림치는 불신자도 있다. 어느 쪽을 통해 깊이 있는 기독교 세계관을 읽을 수 있는지는 독자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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