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변호사가 간다]
어느 날, 한눈에 봐도 초조함이 얼굴에 묻어나는 사람이 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떤 사건으로 인해 회사가 내린 징계의 효력을 다투고 있었는데, 그는 징계가 무효라고 주장하며 법원에 징계 무효와 함께 거액의 손해배상액을 청구했다고 했다.
나를 찾아온 건 1심과 2심에서 거푸 패소한 뒤였다. 위자료 청구 금액은 무려 50억원이었다. 50억원이면 법원에 내는 인지대만 1심에서 1800여만원(50억×0.35%+55만5천원)이고 항소심은 그 1.5배인 2700여만원이었다. 만약 대법원까지 간다면 1심의 두 배인 3600여만원을 내야 했다. 인지대만 모두 합쳐 8100여만원을 쓰는 셈이었다.
그냥 버리는 돈이었다. 나는 징계나 해고가 무효이고 그것이 불법행위라며 위자료를 청구한 사안에서 이긴 적이 없다. 예외적으로 인정되더라도, 징계 사유가 아닌 것을 알면서 일부러 징계한 사안에서 위자료가 1000만원을 넘긴 사례를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에게 대법원에 상고할 때는 위자료 청구 부분은 빼고 징계 무효만을 일단 다투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결국 난 사건을 수임하지 않았다. 그 억울한 심정이야 충분히 이해하지만 무모한 소송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가끔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청구 금액을 크게 부풀려 소송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나는 그들에게 이 나라 법원의 문턱이 얼마나 높은지 이야기를 해주고, 그 많은 금액을 청구했다가 패소하면 변호사 비용 또한 얼마나 많이 드는지도 설명해준다.
만약 10억원을 청구했다가 전부 패소하면 상대방 변호사 비용까지 물어줘야 하는데, 한 심급당 최대 1230만원씩, 대법원까지 간다면 합계가 3690만원이다. 거기에 인지대 합계액 1820만원도 더해진다. 만약 소송 과정에서 어떤 감정을 했다면 수천만원씩 들어가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
이 나라 민사 법정은 인지대의 상한액이 없다. 소송가액에 따라 일정한 비율로 법정화된 인지대를 납부해야만 소송이 시작된다. 물론 법원은 재산이 없는 사람들에게 소송구조를 해주는 제도가 있다고 반박하겠지만, 그 요건이 너무나 엄격해 실효성이 별로 없다.
체불임금이 많으면 당연히 청구 금액이 높아지는데, 인지대도 덩달아 올라간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인지대를 마련할 길이 없어 받아야 할 돈의 전부를 청구하지 못하고 일부 청구를 하는 경우도 있다.
박훈 변호사
앞서 소개한 사례처럼 무모하게 청구액을 부풀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정당한 청구 금액조차 인지대가 부담되어 청구하지 못하는 것은 재판받을 권리가 침해되는 것이다.
법원은 그동안 위자료 산정에 대해 별다른 기준이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인정해오다, 2016년 10월 대법원이 △교통사고 △대형재난사고 △소비자·일반시민에 대한 영리적 불법행위 △명예훼손 4가지 유형에 대해서는 기준금액을 제시한 바 있다. 5000만~3억원 사이에서 중대한 피해인 경우 특별 가중해 2배 범위에서 인정하는 기준을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3억원을 청구한다 하더라도 법원 인지대만 3심 합쳐 540만원이고, 패소할 경우엔 상대방 변호사 비용 2340만원(780만원×3)을 지불할 각오를 하고 소송을 시작해야 한다. 물론 승소하면 상대방에게 돌려받을 수 있지만, 소송에 들어가는 비용은 여전히 지나치게 높다. 미국은 우리나라 인지대에 해당하는 비용을 최소 15달러에서 최대 455달러(51만원)로 정액화해서 소송비용이 우리나라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다.
현재 대한변호사협회는 이런 사정을 고려해 법원에 인지대 인하를 거세게 요구하고 있다. 다만, 변호사 비용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있다. 변호사 비용도 지나치게 높다. 박훈 변호사
연재밥&법
- ① 밥&법
- ② 한 문장이 바꾼 세상
- ③ 동네변호사가 간다
- ④ 판결 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