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예술사회학 연구자
혼자 식당에서 짜장면을 먹을 때였다. 중년 남자 셋이 탕수육과 짬뽕 국물을 놓고 소주를 마시며 나누는 대화가 쩌렁쩌렁 울렸다. 대화의 핵심은 ‘노래방에서 도우미 부르고 양주를 마시느니 차라리 룸살롱에 가는 게 더 경제적이다. 룸살롱에서는 마음대로 만질 수 있지만 노래방 도우미는 막 만질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누군가는 “집에 가면 공짠데”라고 했다. 또 다른 남자는 어느 날 술 먹고 후배 집에 갔는데 다음 날 아침 후배가 직접 아침을 차려줬다며 열을 내고 있었다. “어떻게 남편 선배가 왔는데 여자가 아침도 안 챙겨주냐. 그 자식 참 불쌍하게 살더라.” 이들을 뭐라 불러야 좋을까. ‘악부’일까. 사전에는 있지만 일상에선 잘 쓰이지 않는 말이다.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 그리고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야. 이들은 무려 세계 3대 악처로 꼽히는 인물들이다. 이 여성들은 경제적으로 무책임한 남편들에 비하면 생활력 있고, 특히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야의 경우는 톨스토이 작품을 교열하는 역할까지 했다. 여자가 악처로 불리기는 남자가 애처가로 불리기만큼이나 쉽다. 악처가 아님을 증명하지 못하면 악처가 된다. 악처 만들기는 나름 역사가 있는 세계적 오락이며 남성을 피해자화하는 보편적 방식이다. 신화로 거슬러 올라가면 헤라도 악처이며 아프로디테는 문란하다.
정말 입도 뻥끗하기 싫었던 주제, 가수 김광석의 죽음을 둘러싸고 쏟아내는 말들에 이제는 몸서리가 쳐진다. 아무리 뒤져봐도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는 시각이 ‘합리적 의심’을 가장하고 있다. 무너뜨릴 수 없는 한 음악가의 신화와 그의 악처를 처단하겠다는 잔인한 무책임이 지금의 사태를 초래했다. 심지어 김광석의 아내를 ‘공인’이라 칭하기까지 한다. 김광석도 공인이 아니며 아내는 더욱 공인이 아니다.
‘합리적 의심’이라 주장하는 목소리 밑바닥에는 남자가(일부 아내의 도움을 받아) 번 돈이 그 남자의 원 가족에게 가지 않고 ‘정숙해 보이지 않는’ 아내에게 갔음에 대한 분노가 깔려 있다. 이를 정의와 진실을 위한 투쟁으로 둔갑시킨다. 남편 죽은 여자답지 않게, 자식 잃은 엄마답지 않게, 고통스러워 보이지도 않고, 남편 죽었는데 다른 남자랑 살고, 죽은 남편이 남긴 재산으로 호의호식한다! 시‘댁’이랑 (감히) 싸우고!
남의 고통의 진정성을 파악하려는 태도야말로 얼마나 폭력적인가. 배우 안재환의 자살을 두고 개그우먼 정선희에게 대중이 벌인 여론재판은 끝도 없었다. 전 국민이 시‘댁’이다. ‘남편 잡아먹은 여자’라는 서사에 이미 익숙한 사회에서 남편 죽고 자식 죽은 죄인이 너무 당당하니 점점 더 가혹한 말을 쏟아붓는다. ‘악마’라는 말을 쉽게 뱉는 그 입들이 원하는 진실에는 이미 모범답안이 있다. 진실을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진실을 규정하려는 욕망이다.
과도한 확신은 모든 사실을 잠식시킨다. 의혹 제기와 어떤 사람을 의혹만으로 ‘악마의 얼굴’을 가졌다고 단정짓는 무책임한 행동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영화가 저널리즘을 대신하는 상황의 심각성에 언론조차 둔해졌다. 2012년 개봉한 영화 <부러진 화살>을 다시 생각한다. 사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해도 감독의 개입도 있기 마련인 영화에서 어떤 이들은 사실을 확신했다. 한 언론에 실린 이 영화에 대한 시민의 리뷰는 마지막을 아예 이렇게 끝맺는다. “이 영화 대박 나야 해. 사회정의를 위해서!”(2012년 2월2일 <오마이뉴스>)
진실이 아니라, 진실을 추적하는 ‘나’에 대한 나르시시즘은 자신이 무슨 폭력을 저지르고 있는지 결코 볼 수 없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