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11월22일 텍사스주 댈러스를 방문해 부인 재클린과 함께 리무진을 타고 카퍼레이드를 하던 케네디 전 대통령이 암살 당하기 직전의 모습. AP/연합뉴스
수많은 음모론을 낳아온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 암살 비밀을 풀 열쇠의 공개는 이번에도 미뤄졌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2800여건 문서를 공개했지만 음모론은 오히려 더 커질 전망이다.
미국 정부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승인에 따라 26일(현지시간) 케네디 전 대통령 암살과 관련한 기밀문서 2891건을 공개했다. 하지만 모든 문서의 완전한 공개를 여러차례 공언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국가안보 우려 등을 이유로 기밀 해제를 연기해달라는 미 중앙정보국(CIA)과 연방수사국(FBI)의 건의를 막판에 받아들여 약 300건의 문서 공개를 미루고 180일 동안 공개 여부를 재검토하기로 했다고 미국 언론들이 보도했다.
공개된 비밀문서들은 암살과 관련해 FBI국장의 메모, 현장에 있었던 시민들의 인터뷰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암살을 둘러싼 의문들에 답할 ‘폭탄급’ 폭로는 없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기밀 해제된 2891건의 문서는 이날 미국 국가기록보관소 사이트(https://www.archives.gov)에 공개됐지만, 완전히 새로 공개된 것은 53건뿐이고 나머지는 이전에 편집된 형태로 공개된 적이 있는 문서들이라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새로 공개된 내용들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케네디를 암살한 하비 리 오즈월드가 나이트클럽 주인 잭 루비에게 살해되기 하루 전날 한 남성이 연방수사국(FBI)의 댈러스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차분한 목소리로” 오즈월드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는 에드거 후버 당시 연방수사국장의 발언을 담은 문서(1963년 11월24일치)라고 <시엔엔>은 보도했다. 후버는 이 메모에서 오즈월드가 범인라는 증거가 있으며, 오즈월드가 쿠바, 소련과 통화하는 것을 감청한 기록이 있다고도 말했다.
CIA가 작성한 메모는 오즈월드가 암살 2달 전 멕시코시티를 방문해 6일간 머물면서 멕시코 주재 소련대사관에 전화를 해 KGB 요원인 발레리 블라디미로비치 코스티코프와 “어눌한 러시아어로 통화하는” 것을 감청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 내용은 1993년에도 공개된 적이 있었으며, 이번에 공개된 문서에서도 재확인됐다.
해병대 출신으로 한때 소련에 망명하기도 했던 당시 24살의 오즈월드는 케네디 대통령을 저격한 뒤 체포됐고, 사건 이틀 뒤 이송되던 중 나이트클럽 주인 잭 루비에 의해 살해됐다. 루비도 감옥에서 숨졌다. 사건의 주요 용의자들이 모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점은 음모론이 끊이지 않는 주요 근거다. 오즈월드가 KGB 요원과 접촉했다는 것은 소련 배후설의 근거로 거론됐으나, 소련이나 쿠바가 암살의 배후라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으며, 오히려 오즈월드가 자신은 소련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마피아에 이용당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정황도 있다고 <폭스뉴스>는 보도했다.
후버 국장은 케네디 암살 얼마 뒤 백악관에 보낸 메모에서 “소련은 케네디 암살이 미국 극우파들의 조직적인 음모이자 실질적인 쿠데타라고 판단하고 있다”고 언급했다는 메모도 새로 공개됐다.
이 밖에도 케네디 행정부 초기에 미 중앙정보국(CIA)가 쿠바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를 암살하기 위해 시칠리아계 마피아인 샘 지안카나를 고용했었다는 내용, 쿠바 공산정권을 무너뜨리려는 공작을 계속하던 CIA가 쿠바로 향하는 비행기 부품 운송을 차단하려 했다는 것, 쿠바 정보원으로 추정되는 남성이 “오스왈드를 알고 있다”고 발언했다는 등이 새로 공개된 내용이다.
26일 기밀해제돼 공개된 케네디 대통령 암살 관련 문서 중 범인 오스왈드가 멕시코 소련대사관의 KGB 요원과 접촉했다는 내용을 담은 FBI 문서. EPA 연합뉴스
‘음모론 애호가'로 알려진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기밀 해제에 대한 기대감을 여러 차례 드러낸 바 있다. 문서 공개 전날까지도 “오랫동안 기대했던 JFK(존 F. 케네디) 파일들이 내일 공개될 것이다. 매우 흥미롭다”는 글을 직접 트위터에 올렸던 트럼프 대통령은 공개 뒤 메모에선 “우리나라의 안보에 돌이킬 수 없는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는 정보의 공개를 허용하는 것보다는 그런 수정편집 작업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고 밝혔다. 왜 그가 막판에 CIA와 FBI의 요구로 주요 문서 공개를 미뤘는지를 둘러싸고 의문과 음모론은 더 증폭될 전망이다.
케네디 전 대통령은 1963년 11월22일 미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부인 재클린과 함께 카퍼레이드를 하던 중 암살범 리 하비 오즈월드가 쏜 총탄에 맞아 숨졌다. 당시 사건을 조사한 워런 위원회는 이듬해 “오즈월드의 단독 범행이며 배후는 없다”는 보고서를 내고 사건 조사를 종결했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범 오즈월드가 총을 들고 있는 사진. FBI가 오즈월드가 범인이라는 증거로 공개했으나, 그림자와 몸의 각도 등을 볼 때 조작됐다는 의문이 제기됐다. EPA 연합뉴스
하지만 케네디 암살을 둘러싼 음모론은 끊이지 않았다. 서거 50주년이던 2013년 여론조사에서 미국민의 60%가 ‘오즈월드의 단독 범행이 아니고 거대 배후가 있다’고 응답했다. 쿠바 또는 소련 배후설, CIA 개입설, 오스왈드 외 공범의 존재 가능성, 후임자인 존슨 대통령 관련설 등 여러 가지가 제기됐다.
당시 현장에서 오스왈드가 총탄 세 발을 발사하고 케네디 전 대통령과 존 코널리 전 텍사스 주지사를 맞혔는데, 두 발은 빗나가고 한 발이 동시에 두 명을 저격한 것으로 나타나 ‘마법의 총탄’이라는 의혹이 제기됐고, 당시 현장 사진을 보면 화창한 맑은 날에 우산을 앞으로 펴 무언가를 숨긴 듯한 남성(‘엄브렐러 맨’)이 포착됐으며, 붙잡힌 암살범 오즈월드를 호송 도중 저격해 숨지게 한 잭 루비의 살해 동기도 불분명하다.
이번 문서 공개는 1991년 공개된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와 관련이 깊다. 오즈월드 단독 범행이란 공식 조사 결과에 의문을 가진 검사가 사건을 다시 파헤치면서 ‘누가 케네디 암살로 이익을 얻었는가’에서 다시 사건을 봐야한다는 내용의 이 영화로 암살 사건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졌고, 미 의회는 1992년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기록 수집법’을 제정해 그로부터 25년 뒤인 2017년 10월 26일까지 모든 문서를 공개하도록 했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