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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동호 목사 Facebook. 2017. 11. 2. 목요일

성령충만땅에천국 2017. 11. 3. 06:32


김동호 목사 Facebook. 2017. 11. 2. 목요일


생사를 건 교회개혁 읽기 (11)


목사상을 정립하라.

한국 교회를 위해서 개혁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정리이다. 목사는 누구이며, 장로는 누구인가? 목사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고 장로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를 명확하게 구별하여 정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역할 정의 (job description)가 정확하게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1.
목사와 장로의 정확한 역할 정의 (job description)가 필요하다.

목사와 장로의 역할 정의가 정확하지 않음으로 인해 교회 안에서 목사와 장로 사이에 쓸데없는 갈등이 생겼고, 그 갈등으로 인해 한국 교회는 침몰 직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난국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이 어떠한 개혁 못지 않게 어렵고 미묘한 것이어서 섣불리 잘못 다루다가는 단칼에(?) 목회 생명이 끝날 수도 있기에 필요성을 느끼면서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은 마치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과 같이 위험한 일이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이 문제를 다루어 보려고 한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면 내가 하고 언젠가 해야 할 일이라면 지금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과 판단이 꼭 옳은 것이라고 보증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생각과 판단에 아무런 개인적인 욕심과 사심이 없다는 것은 보증할 수 있다. 나름대로 이 문제를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과 연결하지 않고 양심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2.
목사만 성직자는 아니다.

사람들은 목사를 성직자라고 부른다. 맞다. 목사는 성직자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목사만 성직자는 아니다.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신앙에 거리낌없이 수행하는 모든 직업은 다 성직이다. 목회만 성직이라하고 목회 외의 모든 직업을 세속적인 것이라고 딱지 붙이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사상이 아니다.

성경은 목사만 성직자라고 말씀하지 않는다. 성경은 예수 믿는 우리 모두가 다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하신다. (벧전 2:9) 뿐만 아니라 골로새서 3:23에도 보면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같이 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주께 하듯 하는 일, 즉 주를 위하여 하는 일은 모두가 다 성스러운 일이고 그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은 다 성직자인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목회만 성직이라고 하는 잘못된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목회 외에는 어떤 직업도 성직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성스럽게 감당해야 할 자기 직업을 세속화하여 단순히 돈을 버는 수단과 도구로 여기게 되었고, 뿐만 아니라 돈을 버는 수단과 방벋도 하나님의 식과 법을 따르지 않고 세상을 따르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교회 교인들이 지닌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는 신앙과 삶의 불일치는 바로 목회만 성직이라는 잘못된 인식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직업을 소명으로 보는 것이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이었다. 예전에는 우리는 하나님께 헌신하려면 꼭 신학을 전공해서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은 생각이었다. 음악을 잘 하는 사람은 음악 대학에 가는 것이 옳고, 미술을 잘 하는 사람은 미술 대학에 가는 것이 옳다. 자기의 전공과 직업을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사용하기만 한다면 그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헌신이 되는 것이다. 모든 직업이 성직이 되어야만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 질 수 있다. 목사의 목회만이 성직이라는 의식을 가지고는 복음이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설 수 없다.

전에 섬기던 교회의 대학생 한 명이 상담을 요청해 왔다. 법대 학생으로 고시를 준비하고 있는 학생이었는데 하기 봉사를 나가서 전도를 하다가 성령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룹으로 나간 5,6명이 함께 그와 같은 체험을 하게 되었는데 교회로 돌아 온 후에도 예배 후 자기들끼리 모여 열심히 기도를 하곤 했었는데, 어느 날 기도 하다가 모두 가 다 선교사가 되겠다고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하였다. 고시가 바로 몇 달 앞으로 다가 왔는데 선교사가 되겠다고 덜컥 서원 기도를 하였으니 고시를 포기하고 신학교를 가야하나 고민이 되었던 것이다.

그 청년은 나를 찾아와 아주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서원을 기도를 하고 어기면 하나님께 벌 받지요?"라고 물었다. 나는 그 청년에게 네가 생각하고 있는 선교의 개념이 좁다고 이야기해 준 후 목사만 선교사가 아니고 아프리카나 방글라데시와 같은 곳만 선교지가 아니라 설명해 주었다. 우리나라 법조계도 매우 중요한 선교지이며 그와 같은 곳에 선교사가 되려면 고시에 패스를 해야 한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청년의 얼굴이 밝아졌다. 고시를 패스하여 법조인이 되어도 선교사가 될 수 있다는 말에 고마워하며 자기는 꼭 그런 선교사가 되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을 하고 내 방을 나갔다.

나는 개인적으로 목사를 특별한 사람인 양 생각하고 취급하는 일에 찬성하지 않는다. 목사만을 성직자라고 생각한다든지, 목사만을 주의 종이라고 특별대우를 하는 일은 옳지도 않고 좋지도 않다.

갈라디아서 6:6에 보면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는 말씀이 있다. 목사는 역할상 가르치는 일을 맡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가르침을 받는 교인의 입장에서 목사를 존경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사탄이 쓰는 전략 중에 하나가 목사와 교인의 사이를 나쁘게 하여 목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데 문제가 생기게 하는 것이다. 아주 효과적인 방법 중에 하나라 할 수 있다.

목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잘 하기 위해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일 수 있다. 그래서 옛날 어른들이 주의 종을 잘 섬겨야 복을 받는다고 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고하며 스승을 존경하는 것과 같은 차원의 이야기이어야 한다. 존경심이 지나쳐 목사를 마치 하나님이라도 되는 양 여기는 것은 좋지 않다.

나는 목사를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모든 직업을 성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목사를 직업이라고 생각한다고해서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삯꾼 목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직업이 성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목회도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교인과 목사는 평등하다. 나는 그래서 일반 교인을 평신도라고 부르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평신도라는 말은 계급적인 언어로서 성경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해 전 장로교회 안에서 목사와 장로 사이에 성직 논쟁이 일었다. 장로도 성직자냐, 아니냐를 놓고 정말 살벌한 공방이 오갔었다. 그것은 무익하고 부끄러운 싸움이었다. 차별적인 개념으로 성직을 논하고, 성과 속을 구별하는 개념으로 성직을 논하는 것은 다 성경적이지 않다. 목사만 성직자가 아니다. 장로도 성직자다. 그러나 목사 장로만 성직자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평신도라고 부르는 모든 교인이 다 성직인 것이다. 모든 직업과 그 직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은 다 성직이요, 성직자이다.

3.
목사는 전문직이다.

어느 장로님이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
목사는 월급을 받고 봉사하고, 장로는 월급을 받지 않고 봉사를 하니 장로가 더 순수한거지요?'


나는 숨도 쉬지 않고 이렇게 대답해 드렸다.
'
그러니까 장로님은 아마츄어고 나는 프로지요.'

나는 목사를 유일한 성직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목사를 목회 전문가 즉 프로로 생각한다.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 갈라디아서 3:28에서 하나님은 분명히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러므로 어떤 이유에서든지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기독교적인 정신과 자세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셨지만 구별하셨다. 하나님은 각기 다른 은사를 사람들에게 주셔서 어떤 사람은 음악을 잘하고, 어떤 사람은 미술을 잘하고, 어떤 사람은 사업을 잘하고, 어떤 사람은 가르치는 것을 잘하게 하셨다. 각기 다른 은사를 주신 까닭은 각기 다른 직업을 갖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직업적인 다양성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차별이 아니라 구별이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구별로 주신 은사를 가지고 차별 논쟁을 벌였었다. 어떤 은사가 더 높은 은사인가를 가지고 교회가 위험하리만큼 쓸데 없는 싸움을 하였었다. 사람들은 구별을 차별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본능이 있다. 그와 같은 것에 반대하여 모든 사람은 차별이 없고 평등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런데 저들은 차별을 반대하다가 구별까지 무시하는 오류를 종종 범하곤 한다.

'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라는 말이 구별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구별성은 전문성을 의미한다. 차별을 없이한다고 하다가 사람의 전문성까지 무시해서는 안 된다. 교회 안에서 목사와 교인이 서로 평등하다고 하다가 목사의 목회적인 전문성까지 무시하려 해서는 안 된다.

목사는 유일한 성직자요 주의 종은 아니지만, 목회와 교회의 사역을 위하여 부름 받고 훈련받은 전문인이다. 목회의 전문 영역을 허물어 버리고 아무나 목회적인 사역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위험하다.

나는 목회를 하는 동안 주일 강단을 신학을 하지 않은 비전공자에게 맡긴 적이 없다. 그것은 차별이 아니라 구별이었다. 그 때문에 옹졸하고 편협한 목회자 취급을 받기도 했었지만 양보하지 않았다. 가끔 사람들이 '목사님은 설교 준비를 몇 시간 동안 하세요?'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
신학교 들어가면서부터요'

외과 의사가 맹장수술을 한다. 옆에서 지켜보면 간단해 보일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을 눈여겨 보고 익힌 사람이 자기도 맹장수술을 하겠다 나서면 안 된다. 그 의사는 그 간단해 보이는 맹장 수술 하나를 하기 위하여, 그 자격을 따기 위하여 최소한 6년 이상의 전문적인 그리고 혹독한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설교도 마찬가지다. 목사가 설교 한 편을 준비하기 위하여 목사는 전문적인 신학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이 알게 모르게 설교 한 편에 다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무난한 설교 몇 편 쯤이야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비전문인에게 강단을 맡기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 될 수 있다.

나는 당뇨환자다. 장로님 한 분이 당뇨에 좋다는 약이란 약은 다 구해다 주셨다. 물론 민약들이었다. 나는 의사가 처방해 준 약 외에는 절대로 먹지 않는다. 민약들도 혈당을 낮추는데는 꽤 유용하지만 다른 어떤 사이드 이팩트 즉 부작용이 있는지에 대하여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조건 혈당한 낮춘다고 이것 저것 막 먹다보면 대개 신장을 상하고 간을 상하게 되어 심각한 부작용에 직면하게 될 수 있다.

장로님이 이런 저런 약을 주시면 '고맙습니다' 인사를 받았다. 그러나 먹지는 않았다. 결국 그것을 그 장로님이 아시게 되었다. 섭섭하셨는지 나에게 '의사도 오진해요'라고 말씀하셨다. 그 장로님에게 나는 이렇게 대답해 드렸다.

'
저도 압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의사가 어쩌다 오진하면 돌팔이라고 하고, 돌팔이가 어쩌다 맞추면 명의라고 합디다'

의사도 물론 오진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퍼센테이지가 높다. 나도 안다. 그래도 나는 내 건강을 의사에게만 맡긴다. 의사의 오진 확률이 그렇게 높은데 의학을 전공하지 않은 비전문인의 오진 확률은 얼마나 높을까?

목사도 오진한다.
그래도 목회를 아무나 하려고 손대는 것은 좋지 않았다.
목사의 목회의 전문성은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일은 중요한 일이다.

(
생사를 건 교회개혁 p53부터 p64까지)


출처 : 삶과 신앙
글쓴이 : 스티그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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