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보연
정책금융팀장
정책금융팀장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차명계좌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건 지난 5월이었다. 경찰이 대기업 총수들의 집 인테리어 시공업체에 대한 조세포탈 혐의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이 회장의 한남동 집 공사비도 도마에 올랐다. 공사비로 지급된 수표의 출처가 불분명하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삼성전자 관계자는 “이전에 특검에서 밝혀진 계좌에서 발급된 것”이라고 했다. ‘회삿돈’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려던 삼성 쪽 해명이 세간의 관심에서 잊혔던 이 회장 ‘차명재산’을 다시 끄집어낸 것이다.
2008년 조준웅 특검이 찾아낸 이 회장 차명재산은 전·현직 임원 486명의 이름으로 된 계좌 1199개에 분산돼 있었다. 그해 4월 삼성은 대국민 사과문을 내면서 문제가 된 차명계좌를 이 회장 실명으로 바꾼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당시에도 이 회장의 차명재산 실체가 온전히 밝혀진 것인지, 드러난 차명계좌들이 적법한 절차를 거쳐 실소유주인 이 회장 계좌로 전환된 것인지 등에 대한 의문은 말끔하게 풀리지 않았다. 이후 재판 과정에서 삼성이 양도소득세 3071억원과 증여세 4515억원, 종합소득세 464억원을 냈다는 사실이 확인됐지만, 세부 내역은 알 길이 없었다.
지난달 국정감사에서 이 회장 차명계좌의 실명전환 실태와 누락된 세금이 공개된 것은 이런 의문들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기에 가능했다. 우선 차명계좌 1021개(2008년 금융감독원 검사 뒤 제재받은 계좌) 가운데 은행계좌 1개만 임원 명의로 실명전환된 사실이 처음 드러났다. 나머지 계좌에 든 4조4천억원어치의 예금·주식은 실명전환 없이 모두 빼 간 것이다. 인출 과정에서 물어야 할 이자·배당 소득세를 최소 1천억원 이상(추정) 납부하지 않은 사실도 새롭게 확인됐다. 금융실명법 5조에 따라 비실명재산에서 나온 이자·배당 소득에는 세율 90%를 매겨야 했지만 일반 소득세율(당시 최고 38%)만 적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사실이 밝혀지는 동안, 정작 소관부처인 금융위원회가 보인 태도는 ‘유감’이다. 8년여 동안 뒷짐만 지고 있던 금융위는 뒤늦게나마 국감에서 의혹이 제기됐을 때도 면피할 논리 찾기에만 급급해 보였다. 2009년 경제개혁연대가 이 회장 차명재산의 실명전환과 관련한 질의를 했을 때도, 지난달 16일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같은 문제를 제기했을 때도 금융위는 ‘차등과세’ 조항(금융실명법 5조)의 존재를 알고는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무반응’이었다. 금융위 쪽은 “(징수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 과징금 징수에 대한 것이 주된 질의 아니었느냐”거나 “금융회사가 원천징수를 했어야 할 일”이라며 책임을 미뤘지만,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일었던 사건에 대한 관리감독에 소홀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금융위 쪽 기류가 전향적으로 바뀐 건 지난달 25일을 전후해 당정청 차원에서 들여다본 뒤인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와 여당 쪽에서 관심을 보인 뒤에야 움직이기 시작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금융위는 30일 종합감사에서야 “(이 회장의 계좌처럼) 검찰 수사 등에 의해 밝혀진 차명계좌는 차등과세 대상이 된다”고 밝혔다.
금융실명법은 특히 차명재산과 관련해서 구멍이 많다. 2014년 불법재산 은닉이나 자금세탁 등에 쓰이는 차명거래를 금지하는 법개정이 이루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차등과세와 관련해서도 정작 과세 대상인 ‘비실명자산’의 개념은 법 조항에서 빠져 있어 논란이 벌어지기 일쑤다. 소관부처의 적극적인 유권해석과 법 집행 의지가 그만큼 중요한 영역이란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