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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와 중도정치 [박원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7. 11. 24. 05:34

중도와 중도정치 [박원재]

                         보낸사람

다산연구소 <dasanforum@naver.com> 보낸날짜 : 17.11.24 03:45                
제 480 호
중도와 중도정치
박 원 재(강원대 삼척캠퍼스 강사)

  그것이 무엇이든 ‘극단’은 매혹적이다. 선명하기 때문이다. 열흘 붉은 꽃이 없다지만 바로 그 열흘의 붉음이 지니는 치명적인 매력을 무기로 꽃은 다음 생을 잉태한다. 현실의 링 위에서 ‘역사의 종말’이라는 선언까지 들으며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지만, 유토피아를 꿈꾸는 이들이 마음 한켠에서 마르크시즘을 여전히 떠나보내지 못하는 이유도 그 이데올로기적인 선명함 때문일 터이다. 어디 ‘극좌’만 그런가? 제3 제국에 열광했던 히틀러 치하의 독일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그리고 지난 세기 초반 길고 긴 군국주의의 터널을 지나왔던 일본 역시 일정 부분 해당 국민들의 자발적인 지지가 ‘극우’정권의 핵심적인 기반이었음을 역사는 증명한다. ‘국민’의 선택은 언제나 위대하다는 상투적인 정치적 수사(修辭)를 머쓱하게 만드는 대목들이다.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음

   이것이 ‘열흘 붉은 꽃’이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끌어당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게 만드는 이유이다. 색과 향이 치명적인 매력을 지녔음은 알지만, 그 맹목과 속절없음을 엎어지고 자빠졌던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우리는 경험적으로 안다. 아니, 좀 더 솔직하자면, 그 ‘극단’의 선명함을 ‘감당할 수 없음’이 부담스러움의 더 중요한 이유일 수도 있겠다. 이를테면, “한때는 젊어 전태일이나 게바라 같은 죽임당한 생을 흠모했는데/ 덜덜 떨던 순수의 시절은 죽고/ 전날 밤 술자리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흐리멍덩한 인간 덩어리로 늙고”(이영광, 「극단적인 바람」) 있는 자신을 한탄하는 시인의 자조(自嘲)가 그런 경우일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양의 동서와 때의 고금을 막론하고 ‘극단’을 경계하는 가르침들이 ‘인류의 스승’들을 통해 약속이나 한 듯이 강조되어 왔음은 이상할 일이 아니다. 인간 욕망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그것의 완급을 이성을 통해 조절하는 습관을 기를 것을 요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행복한 삶=중용의 삶’을 보증하는 철학자의 권고로 회자되어 온 지 오래다.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는’ 이른바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삶을 강조한 공자의 충고 또한 우리에게 속담만큼 익숙해진 사실이 이 점을 잘 말해준다.

   이 가운데 공자에서 시작된 유학의 해당 담론, 즉 ‘중용(中庸)’에 대한 생각은 문화적 친연성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더욱 각별하게 다가온다. 두말할 필요 없이, ‘중용(中庸)’은 동양인의 의식세계를 관통해온 강력한 문화 유전자이다. 사서삼경의 하나로서 이 유전자를 집대성하고 있는 바이블인 『중용』은 이 덕목의 가치에 대해 공자의 입을 빌려 이렇게 설명한다.

공자가 말했다. “순(舜)임금은 위대한 지혜의 화신일진저! 순임금은 묻기를 좋아하시되 일상과 가까운 말들을 살피기를 좋아하셨도다. 그렇게 하여 사람들의 허물은 덮어주고 선행은 드러내었으니, 양극단이 어디에 치우쳐 있는지를 잘 살펴 그 중간을 늘 백성들에게 시행하였다. 이것이 바로 순임금이 순임금이 되신 까닭이다.”

  요(堯)임금과 함께 태평성대를 연 상징으로 꼽히는 순임금이 이상정치를 펼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정치를 시행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이에 대해 주희는 뒤에 이 구절에 주를 달면서 순임금이 행한 중용 정치의 요체를 어떤 사안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맹신하지 않고 주위 여러 사람의 의견을 경청한 후 방향을 결정한 것이라고 부연하였다. 즉 자기만 옳다고 하는 독단의 정치를 지양했다는 말이다.

  말은 쉽지만,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를 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삶이란 것을 조금이라도 살아 본 사람이면 누구나 안다. 특히 작든 크든 권위를 누리거나 권력이라는 것을 휘둘러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불문가지일 터이다. 그러니 “중용의 덕은 지극히 고매해서 보통사람들은 이를 실천한 경우가 드문 지 오래다”(『논어』「옹야」 29)라고 한 공자의 발언도 이런 맥락에서 들으면 결코 과장이라고 할 수 없다.

매이지 않음

   그런데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삶을 생각할 때 동양에는 이와 관련된 또 하나의 중요한 전통이 있다는 점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불교의 ‘중도(中道)’이다. ‘중용’과 ‘중도’는 외견상으로 다름보다 같음이 더 많은 덕목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불교 이론의 출발점은 연기설(緣起說)이다. 모든 것은 선행하는 인연의 산물이라는 이 교설이 불교의 출발점을 차지하는 이유는 그 어떤 것의 영향으로부터도 독립적인 절대적 존재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이것은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연기설은 불교적인 문제의식의 알파요 오메가인 ‘고(苦)’로부터의 벗어남이 얼마든지 가능함을 보여준다. ‘고’ 또한 난공불락의 절대적인 사태가 아니라 그것에 선행하는 인연이 만들어낸 조건적인 산물임을, 다시 말해 그 조건을 제거하거나 해소시키면 ‘고’는 자동적으로 사라진다는 점을 연기설은 가르친다.

   불교에서 볼 때, 이 조건들 가운데 가장 질긴 것이 자신은 천만 년 살 것이라는 심정적인 착각과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대상 또한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항상 곁에 있을 것이라는 맹목적인 염원이다. 연기설은 이것이 집착임을 일깨운다. 그런데 연기설의 묘미는 그렇다고 이것이 삶을 허망함으로 이끌지 않는다는 점이다. 연기설이 부정하는 것은 나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절대성이지 그 존재 자체는 아니다. 연기의 이법이 지배하는 한 삼라만상은 영원불변의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바로 그 연기의 이법에 입각할 때, 그것들은 결코 허상이 아니다. 그것들을 이루는 인연의 조건들이 결합되어 있는 한 하나의 존재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행복한 삶은 이 두 극단, 즉 자신을 포함한 삼라만상의 절대성과 찰나성이라는 두 극단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때비로소 가능하다. 이것이 ‘중도’이다.

진정한 중도는 매임이 없을 때 열려

   이 점에서 ‘중용’이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음을 지향한다면 ‘중도’는 어디에도 매이지 않음을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용’과 다른 ‘중도’의 중요한 특징 하나가 드러난다. 매이지 않으려면 자신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매이고자 하는 대상의 실상을 끊임없이 비판하고 폭로해야 한다. 그것은 양극단을 절충하여 가운데에 선을 긋고 그 길을 걷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양극단의 장점을 살려 절충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무너뜨려 왜 그것이 길이 아닌지를 드러낼 때, 그리고 그럴 때에만 어느 순간 ‘가운데 길[中道]’이 선물처럼 열린다.

  경제가 어려운 때라는 말만큼이나 식상한 표현인 정치의 계절이 다가온다고들 한다. 가까이로는 차기 국회의원 선거, 멀리로는 20대 대선의 마중물이 되는 지자체 선거가 얼마 있으면 카운트다운에 들어가는 까닭이다. 이에 따라 언제나 그렇듯 정치권의 이합집산이 시작되었고, 또 그에 걸맞게 전가의 보도처럼 ‘중도’라는 브랜드를 선점하기 위한 노력들이 목하 진행 중인 듯하다. 이에 부쳐 정치인들이 말하는 ‘중도’가 부디 양극단의 좋은 점만 자의적으로 골라 섞는 비빔밥 식 절충이 아니라 그것들의 문제점을 극단까지 밀어붙여 그 실상을 여실하게 드러내는 속계산 없는 ‘중도’이기를 바란다. 그렇게 하여 열리는 ‘가운데 길’이라야만 본인들이 오매불망하는 표심의 지지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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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원재

· 강원대(삼척캠퍼스) 강사
· 전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 중국철학

· 저서
〈유학은 어떻게 현실과 만났는가〉예문서원, 2001
〈철학, 죽음을 말하다〉 산해, 2004 (공저)
〈근현대 영남 유학자들의 현실인식과 대응양상〉
한국국학진흥원, 2009 (공저)
〈500년 공동체를 움직인 유교의 힘〉글항아리, 2013 (공저)

· 역서
〈중국철학사1〉간디서원,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