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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주권’ 넘어서 ‘을의 민주주의’로 / 진태원 지음 [을의 민주주의-새로운 혁명을 위하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7. 12. 15. 18:09

국민주권넘어서 을의 민주주의

한겨레 등록 :2017-12-14 19:36수정 :2017-12-14 20:05

 

정치철학자 진태원 첫 단독 저서
서양 현대철학으로 현실 해부
궁극적인 민주주의 도달 위한
새로운 혁명, 을의 민주주의

을의 민주주의-새로운 혁명을 위하여
진태원 지음/그린비·2만원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종을 깔보자/ 종이 주인의 모가지를 베어 버리더라/ 바로 그 낫으로.(, 김남주)

서양의 현대 정치철학을 파고드는 학자가 민중시인김남주의 시를 다시 꺼내어 읽고, 이렇게 말한다. 슬라보이 지제크가 최근 일련의 저작에서 제창하는 메시아적 폭력, 신적 폭력을 김남주만큼 가장 정확하게 구현한 시인이 있을까?그러나 해방의 주체로서 민중에 대해 깊은 신뢰를 지녔던 김남주는, 한편으론 환상이었다 그것은이라며 민중에 대한 배신감을 토로하기도 했다. 직관적인 비유의 수준을 넘어, 이제 고민은 더 깊은 정치철학적 물음들에 닿는다. 주인과 지배자의 목을 베어야 할 민중이 다른 민중의 목을 겨누는 메커니즘은 무엇인가? 이후의 김남주들은 민중의 이런 양면성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번역과 논문 저술로 왕성한 학문 활동을 펼쳐온 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가 첫 단독 저작을 펴냈다. 자크 데리다의 <법의 힘> <마르크스의 유령들>, 에티엔 발리바르의 <스피노자와 정치> <우리, 유럽의 시민들?> <정치체에 대한 권리> <폭력과 시민다움>, 자크 랑시에르의 <불화-정치와 철학> 등의 역서, 그리고 <알튀세르 효과> <스피노자의 귀환>, <포퓰리즘과 민주주의> 등 편역서 목록을 보면 알 수 있듯, 그는 서양 현대철학, 특히 프랑스 정치철학을 깊숙하게 연구해온 학자다.

서양 현대철학 연구자인 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는 ‘을의 민주주의’란 화두를 천착해왔으며, 최근 낸 첫 단독 저서의 제목도 ‘을의 민주주의’라고 붙였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서양 현대철학 연구자인 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는 을의 민주주의란 화두를 천착해왔으며, 최근 낸 첫 단독 저서의 제목도 을의 민주주의라고 붙였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책은 그가 오랫동안 벼려온 서양의 정치철학 속 갖가지 논의들을 도구로 활용해서 지금-여기의 현실을 적확하게 읽어내고, “‘새로운 혁명이라 부를 만한, 정치에 대한 혁명적 개조를 요구하는데에 집중한다. 김남주에 대한 논의를 첫 장에 배치하거나,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일궈낸 정치철학적 고민, 최장집과 발리바르의 민주주의론 비교, 갑을관계을 민주주의의 주체 자리에 새롭게 놓아보는 실험 등에서 이런 큰 그림을 엿볼 수 있다. 서문에서 지은이는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에 오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한국이라는 준거에 대한 고민 없이 추상적인 보편성 위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2009~2017년 계간지·학술지 등에 발표했던 글들 가운데 책의 주제인 을의 민주주의를 포괄하고 있는 글들을 추려 묶었다.

기본적으로 지은이의 사유는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를 지적하며 바깥의 정치를 제기하는 서양의 급진적 정치철학자들의 문제의식과 공명한다. 이들은 현대 정치의 대표적 모델인 자유민주주의 정치체를 오히려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를 억압하거나 배제하는 지배의 체제로 본다. 포퓰리즘을 민주주의의 조건으로 사유한 라클라우, 치안에 맞선 몫 없는 이들정치를 주창하는 랑시에르, 해방의 새로운 주체로 다중개념을 제시하는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 등 다양한 정치철학자의 이론들이 소환되어 치열한 대거리가 이뤄진다.

프랑스 정치철학자 자크 랑시에르. 한겨레 자료사진.
프랑스 정치철학자 자크 랑시에르. 한겨레 자료사진.


특히 지은이가 관심을 쏟는 것은 정치적 주체의 문제라 할 수 있는데, 5무정부주의적 시민성?은 그 고민의 결을 잘 드러내는 장이다. 한나 아렌트가 제기한 인권의 역설에서 보듯, 인간의 모든 정치 공동체는 내부와 외부를 구별하고 배제하는 아르케(질서, 지배, 통치)로부터 형성됐다. 제도로 구현된 근대 민주주의 정치체도, 인간의 보편적 권리란 관념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민주주의가 아르케 없는 정치체라 한다면, 우리는 민중이 또다른 민중의 목을 겨누는배제의 메커니즘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정치 공동체의 울타리를 넘는 무정부주의적 시민성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떻게 구축해야 하는가? 랑시에르의 말처럼 몫 없는 이들의 몫을 찾기 위한 봉기가 민주주의라면, 그 뒤에는 과연 무엇이 놓여야 하는가? 인민의 힘은 일회적 봉기를 넘어 어떻게 구조적·제도적 역량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프랑스 정치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 한겨레 자료사진.
프랑스 정치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 한겨레 자료사진.


정치적 주체의 자리에 국민도, 민중도, 인민도 아닌 을 놓는 을의 민주주의, 이런 물음에 대해 지은이가 내놓는 종합적이지만 조심스러운 답이자 새로운 질문이다. 이것은 국가라는 검은 구멍을 드러낸 세월호 참사를 겪은 뒤 촛불혁명을 통해 새로운 정부를 탄생시킨 지금-여기의 상황과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촛불혁명은 국민주권이란 말을 다시금 일깨웠지만, 현대 정치철학의 논의들이 한목소리로 지적하듯 주권자로서의 국민이라는 범주에는 갑의 위치에 있는 국민과 을의 위치에 있는 국민의 차이가 기입되어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감춘다.갑을은 뒤바뀌어도 갑을이며, 을 또한 병과 정에겐 갑이다. 때문에 절실한 것은 갑을이 뒤바뀌는 것이 아니라, 갑과 을 사이의 구조화된 위계 관계를 어떻게 평등한 민주주의적 관계로 바꿀 것이냐, 더 나아가 민주주의를 새롭게 발명해 무정부주의적 시민성을 구축하는 길을 어떻게 닦을 것이냐 하는 고민이다. 이것이 서양 현대철학을 웅숭깊게 연구해온 학자가 말하는 새로운 혁명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23592.html?_fr=mt0#csidx6b6a358855fb09d8700e5e90732b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