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고 박환성·김광일 피디는 <교육방송>(EBS)에서 방영될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떠났다가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열악하기 짝이 없는 제작환경 때문에 운전사를 고용하지 못하고 직접 차량 운전까지 맡았다가 변을 당했다. 독립피디들은 두 피디의 죽음이 외주제작사를 쥐어짜는 방송사의 ‘갑질’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 사건이 계기가 돼 방송사 외주제작 문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요구가 터져 나왔다. 5개월 만인 19일 정부가 방송사의 외주제작 불공정 관행 개선책을 내놓았다.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촬영지인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지난 7월 교통사고로 사망한 박환성(왼쪽)·김광일 피디. 이들은 제작비 부족으로 보조 인력 없이 촬영 현장에 갔고, 운전도 직접 했다. 한국독립피디협회
이번에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방송제작 인력의 안전 강화와 인권 보호 △합리적인 외주제작비 산정과 저작권 배분 △외주시장 공정거래 환경 조성 △방송분야 표준계약서 제정·확대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그동안 외주제작자들이 줄기차게 요구해온 것을 대폭 반영한 대책이어서 평가할 만하다.
1991년 외주제작 의무편성제도가 처음 도입된 뒤 국내 외주제작사는 44개사(1991년)에서 532개사(2015년)로 급증했다. 외주제작사가 만든 콘텐츠 가운데 상당수가 국외로 진출해 한류를 개척하기도 했다. 외주제작사의 편성비율은 방송사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50%를 넘는다. 이렇게 방송 콘텐츠의 절반 이상을 외주제작사가 맡고 있는데도 이들의 처우는 20여년째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이익은 방송사가 독식하다시피 한다. 외주제작자는 제작비 부족으로 적자에 허덕이는가 하면, 저작권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내가 만든 프로그램 영상을 쓰려니 방송사가 사용료를 내라 했다”는 한 독립피디의 말은 이들이 처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정부는 방송사들이 개선책을 준수하지 않을 경우 재허가 때 불이익을 주고, 심하면 재허가를 받지 못하게 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정도 대책으로 ‘방송사 갑질’이 사라질지 걱정하는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재허가 심사가 3~4년에 한번씩 이뤄지는데다 ‘조건부 재허가’ 방식으로 면죄부를 줄 수도 있어 실효성을 보장하기 힘들다는 지적도 있다. 정부는 외주제작 근로환경 범부처 실태조사를 분기별로 실시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약속대로 실행해 규정을 지키지 않는 방송사들에는 강력한 처벌을 안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