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8 ‘위안부’ 합의 과정
이 전 비서실장이 한-일 고위급 협의 주도
고위급 협의 개시 2개월 만에 합의 도출
‘한-일 관계 정상화’ 미국 압박 작용?
이 전 비서실장이 한-일 고위급 협의 주도
고위급 협의 개시 2개월 만에 합의 도출
‘한-일 관계 정상화’ 미국 압박 작용?
이병기 전 국가정보원장이 11월13일 오전 '국정원 특수활동비 상납 의혹'의 피의자 조사를 받으러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 들어서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 전 원장은 박근혜 정부 때인 2014년 7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국정원장이었고 그 뒤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다. 검찰은 박근혜 정부 때 국정원이 40억원이 넘는 특수활동비를 박 전 대통령 쪽에 건넸다는 의혹을 수사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27일 외교부 ‘한·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 태스크포스(TF)’가 발표한 검토 결과 보고서에는 2015년 12월28일 한국과 일본 정부의 ‘위안부 합의’가 어떻게 이뤄졌는지 자세히 담겨있다. 이 합의는 외교부가 아닌 이병기 전 국가정보원장(이후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이동)이 일본 쪽과 고위급 협의를 통해 주도한 것으로 드러났다.
■ 이병기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한-일 고위급 협의 주도
2014년 3월24일∼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핵안보정상회의가 열린 것을 계기로 한-미-일 3국 정상회담이 개최됐다. 이 자리에서 한국과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다룰 국장급 협의를 열기로 합의했다. 한국 외교부 동북아국장과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은 2014년 4월16일부터 이듬해 12월28일 위안부 합의 결과 발표 하루 전인 27일까지 서울과 도쿄를 번갈아 가며 모두 12차례 이상 걸쳐 한-일 국장급 협의를 했다. 공개적인 협의 중간에는 비공개 협의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국장급 협의를 개시한 뒤에도 양쪽이 기존 입장을 되풀이하며 교섭에 진전이 보이지 않자, 두 나라는 2014년 말 국장급 협의에 더해 각 나라 정상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고위급 인사들 간의 협의를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이병기 당시 국정원장이 위안부 합의에 개입한 것도 이때부터다. 일본은 이 고위급 협상 대표로 야치 쇼타로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국장을 내세웠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이병기 당시 국정원장이 고위급 협의 대표로 나설 것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국장급 협의가 시작된 지 10개월만인 2015년 2월 처음으로 이 전 실장이 주축이 된 고위급 협의가 열렸다. 이 전 실장은 국가정보원장을 지내다 2차 고위급 협의가 열리기 직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됐다.
한-일 두 나라는 2015년 12월28일 합의 발표 직전까지 모두 8차례의 고위급 협의를 진행했다. 이 협의 과정에서 외교부는 배제됐다. 외교부는 청와대에서 고위급 협의 결과를 전달받은 뒤 이를 검토하고, 청와대에 의견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 협의 개최 2개월 만에 굴욕적인 ‘이면합의’ 도출
2015년 12월28일 타결된 한-일 위안부 합의에는 두 나라 외교장관의 공동 기자회견 발표 때 공개되지 않은 ‘이면합의’가 존재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2015년 2월 이병기 당시 국정원장(이후 대통령 비서실장)을 주축으로 한 첫 고위급 협의가 열리기 직전인 1월 열린 국장급 협의에서 일본은 ‘이면 합의’를 요구했다. 티에프 조사 결과를 보면 문제가 되는 이면합의는 일본 정부의 요청에 따라 이병기 전 실장이 참여한 고위급 협의에서 이뤄졌다.
두 나라는 고위급 협의를 시작한 지 2개월 만인 2015년 4월11일 4차 고위급 협의에서 일본 정부의 책임, 사죄, 금전적 조치 등 세 가지 핵심 사항을 포함해 △(합의를 통한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불가역적 해결 △한국 정부의 소녀상 문제 해결 노력 △국제사회에서 상호 비난·비판 자제 등의 내용을 잠정 합의했다. 두 나라는 이때의 잠정 합의 내용에 대해 양국 정상의 추인을 받았고, 최종 합의 내용과도 거의 같다.
이번에 티에프가 공개한 이면합의, 곧 비공개 내용에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등 피해자 관련 단체 설득 △주한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문제 해결 △제3국에서의 위안부 피해자 관련 기림비 설치 문제 △성노예 용어 표현 등 국내적으로 민감한 사항이 포함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일본은 고위급 협의에서 “이번 발표로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이니 정대협 등 단체 등이 불만을 보이면 한국 정부가 동조하지 말고 설득해주기를 바란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또한 일본은 한국에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소녀상 이전 계획 등을 묻고 제3국에 설치되는 위안부 관련 기림비 설치의 부적절성에 대해 강조한 뒤, 한국 정부가 ‘성노예’ 단어 사용을 지양할 것 등을 요청했다. 티에프 조사 결과, 이러한 일본 쪽의 요청을 한국 정부는 대체로 받아들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합의로 다시 위안부와 관련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최종적·불가역적 해결), 정부 소관이 아닌 소녀상, 기림비 등에 대해서도 정부가 해결을 노력하겠다는 취지로 이야기 한 것이다. 티에프는 한국 정부가 “일본 쪽의 희망을 사실상 수용했다”며 “외교부가 비공개 합의 내용이 부작용을 불러올 수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 “한-일 관계 회복하라”는 미국 압박 작용한 듯
이같은 2015년 4월 한-일 고위급 협의로 사실상 위안부 합의의 주요 사항은 결정됐지만, 10월까지 양국 협의는 교착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11월2일 한-일 정상회담에서 두 나라 정상이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이라는 점을 감안해 빠른 시일 안에 위안부 합의를 타결하기로 하면서 합의가 급속도로 진전됐다. 티에프는 보고서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2015년) 연내 타결에 강한 의욕을 보였으며 2015년 12월23일 제8차 고위급 협의에서 합의가 최종 타결됐다”고 밝혔다. 양국은 5일만인 28일 공동기자회견을 열어 합의 내용을 발표했다.
박 전 대통령이 위안부 합의 타결을 서두른 데에는 대외적으로는 한-일 관계를 정상화하라는 미국 정부의 압박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2015년 4월 이후 위안부 합의 자체가 교착상태에 빠지고, 6월 군함도 등 일본 근대산업시설의 유네스코 세계 유산 등재 문제로 양국 간 갈등이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10월16일 박 전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해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고, 2주 뒤인 11월2일에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한-일 정상회담을 열고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감안해 빠른 시일 안에 위안부 문제를 타결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티에프는 보고서에서 “한일관계 악화는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지역전략에 부담으로 작용함으로써 미국이 양국 사이의 역사 문제에 관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외교 환경 아래서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와 협상을 통해 위안부 문제를 조속히 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맞았다”고 밝혔다.
노지원 기자 zon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