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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했더니 애를 망쳤다” 교장선생님의 ‘엄마 반성문’

성령충만땅에천국 2017. 12. 30. 02:28

“이렇게 했더니 애를 망쳤다” 교장선생님의 ‘엄마 반성문’

한겨레 등록 :2017-12-29 17:18수정 :2017-12-29 20:17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엄마반성문> 저자 이유남 서울명신초 교장


“왜 아이들하고 대화가 안 되냐 하면 ‘내가 이만큼 하면 얘가 이만큼 변할 거다’ 하는 기대를 하고 대하니까 그래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 마음의 변화입니다. 코칭 스킬 좀 배워서 애한테 써먹는다고 애들이 절대로 바뀌지 않아요.” <엄마반성문>의 지은이 이유남 서울명신초등학교 교장은 성취 중심적인 부모 세대의 치부를 고백하고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에 누가 되지 않을 방법을 고민한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왜 아이들하고 대화가 안 되냐 하면 ‘내가 이만큼 하면 얘가 이만큼 변할 거다’ 하는 기대를 하고 대하니까 그래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 마음의 변화입니다. 코칭 스킬 좀 배워서 애한테 써먹는다고 애들이 절대로 바뀌지 않아요.” <엄마반성문>의 지은이 이유남 서울명신초등학교 교장은 성취 중심적인 부모 세대의 치부를 고백하고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에 누가 되지 않을 방법을 고민한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아직 멀었다. 변화는 단방에 오지 않는다. 세월호 때도 그랬다. 무고하고 천진한 생명을 품은 배가 거꾸러져 밑창을 드러낼 때, 오랫동안 미봉해온 우리의 밑바닥도 무참히 드러났다. 코앞의 이득과 겉치레 성과에 중독되어, 편법과 얄팍한 요령주의로 연명해온 알량한 성장의 역사. 그 아이들의 영정 앞에 고개 숙여 ‘가만히 있지 않겠다’ ‘이제는 달라지겠다’고 눈물 뚝뚝 흘릴 때 진심이 아닌 자 없었겠지만, 뼈아픈 성찰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희미해지고 우리는 다시 거대한 일상의 회로에 맥없이 끌려다니곤 한다.

다행히 인간의 달력은 우리에게 적어도 일 년에 한 번,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새로운 좌표를 찾아볼 기회를 준다. 지난 한 해 정치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눈에 보이는 작은 변화에 미혹되어 진지한 자기성찰과 더욱 근본적인 변화에 태만했던 것은 아닐까?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보다 나은 존재로 진화하고 있는 걸까? 적폐는 도처에 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내 안의 적폐를 돌아보고 싶었다.

<엄마반성문>은 올해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이다. 9월에 초판을 찍은 뒤 석 달 만에 5만부 이상이 팔렸다. 이 책은 자녀교육 분야의 일반적인 베스트셀러처럼 ‘내 아이 아이비리그 보내기’나 ‘두뇌계발 교육법’같이 총명한 아이 키우기에 방점이 찍혀 있지 않다. 이 책에는 ‘전교 일등 남매 고교 자퇴 후 코칭 전문가 된 교장선생님의 고백’이란 긴 부제가 달려 있다. 지은이는 이유남(55). 현직 초등학교 교장이다. 그는 가난한 산골에서 태어나 못 배운 부모의 한과 기대를 안고 대학을 졸업해서 교단에 선 이후, 죽어라 앞만 보고 달려온 열정적 교사이자 아들딸 남매를 ‘남부럽지 않게’ 우등생으로 키워온 슈퍼맘이었다. 그런 이유남이 ‘반성문’이란 형식으로 성취 중심적인 부모 세대의 치부를 고백하고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에 누가 되지 않을 방법을 고민한다. 그의 고백은 산업화 시대에 태어나 초고속 성장의 신화에 발맞춰 살아남은 중장년 세대 모두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지난 21일 저녁, 이유남을 만나러 서울 창신동에 있는 명신초등학교로 찾아갔다.

못하는 걸 잘하게 하려고 애쓰지 말라

오래된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간 교장실 한쪽 벽면에는 전교생의 사진과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는 전교생의 이름을 다 외우고 있다고 했다. 틈나는 대로 학생들을 조별로 교장실로 초대해서 대화의 시간을 갖는다며, 그가 아이들을 위해 준비해 둔 간식바구니를 내놓았다. 종류도 색깔도 제각각인 젤리며 캐러멜이 빨간 바구니에 가득했다.

―요즘 베스트셀러 작가로 연말 북콘서트에도 자주 등장하시던데요. 자녀교육서는 매달 수십 종이 쏟아져 나오는데, <엄마반성문>이 이렇게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그동안 자녀교육서가 ‘이렇게 하니 아이가 잘되더라’ 하는 이야기 중심이었다면, 제 이야기는 ‘이렇게 했더니 애를 망쳤다’ 하는 얘기라서 그럴까요?(웃음)”

―반성문은 대개 학생들이 쓰는 건데, 교장선생님이 반성문을 쓰셨어요.

“교육자로서, 그리고 엄마로서 저의 반성이 담겨 있어요. 저희 집 아이들이 2007년에 학교를 그만뒀는데 그 후 1년 반을 정말 지지고 볶고 싸우면서, 아이들을 제가 원하는 자리에 빨리 데려다 놓으려고 정말 별별 짓을 다 했거든요. 그런데 갈수록 애들하고 멀어지고 갈수록 애들하고 원수가 되니까,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이 들고, 내가 그동안 옳다고 믿어왔던 것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죠.”

―교사로서의 경력이 굉장히 화려하시던데요. 국무총리상, 교육부 장관상도 받으시고 각종 수업경진대회에서 1등도 여러 번 하시고…. 그런데 교사로서도 반성할 게 많다고요?

“예전엔 성과 중심의 선생님이었죠. 공부 잘하게 만들고 숙제 잘하게 하고. 질서정연하게 자기 할 일 잘하게 만드는 결코 나쁘지 않은 선생님이었어요.(웃음) 그런데 그러다 보니까 숙제 잘 못하고 공부 잘 못하는 아이는 저한테 그렇게 소중한 아이가 아닌 거예요. 그런 아이들은 ‘손이 많이 가는 아이’, ‘나를 힘들게 하는 아이’예요. 그런 아이일수록 더 많이 챙겨야 한다고 생각해서 숙제 안 해오면 수업 끝나고 남게 해서 기어이 숙제 하게 만들고 구구단 외게 하고 리코더 다 불 수 있을 때까지 끝까지 검사하고….”

―엄마들은 무척 좋아했겠어요.(웃음)

“제가 담임선생 되게 해달라고 새벽기도 하는 엄마도 계셨대요.(웃음) 대신 아이들은 제 반이 되면 ‘올해는 죽었구나’ 이러고 들어오죠. 저는 철저하게 애들이 어디로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게 교사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아이들이 잘 못하는 걸 잘하게 하는 거, 그게 교사 역할이라고.”

―그게 잘못인가요?

“저도 나중에 깨닫게 된 건데, ‘못하는 걸 잘하게 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잘하는 걸 더 잘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더라고요. 그동안 우리는, 아이가 못하는 걸 더 잘하도록 해서 팔방미인을 만들려고 애쓰는 교육을 했잖아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농담처럼 ‘너네 나라는 신이 안 준 능력을 개발하려고 애쓰는 이상한 나라다. 왜 신도 안 준 걸 인간이 개발하려고 하냐?’ 그랬대요. 아이가 가진 능력을 끌어내주는 게 제일 중요한 건데, 그동안은 ‘얘가 뭘 못하나?’만 신경 쓰면서 지적질을 하고 있었던 거죠.”

―이번 방학에도 ‘부족한 과목 보완하기’를 목표로 삼는 부모나 아이들이 많을걸요.(웃음)

“2차 산업혁명 시대에서 4차 산업혁명 시대로 넘어가는 시대에, 우리가 배웠던 전근대적인 사고를 강요해선 안 돼요. 2차 산업혁명 시대 대량생산을 향해 달려가던 시기에 성장한 우리들이, 다양성과 개성을 중시해야 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아이들을 획일적으로 키우려고 하는 건 모순이죠. 제 책은 저 개인의 반성문이기도 하지만, 시대가 바뀌는 시점에서 우리 세대가 함께 고민하고 같이 반성문을 쓰자고 권하는 책이에요.”

교육자이자 두 아이 엄마로서
‘내 안의 적폐를 고백한다’
‘성공 지향’ 부모세대 반성문
출간 석달 만에 베스트셀러
애들과 싸우면서 삶 되돌아봐

농사꾼 집 5남매 중 둘째딸
여상 나와 은행 취직하라는
부친 뜻 거역하고 명문고 진학
가정형편 탓 서울교대 들어가
교사이자 주부로 고군분투

“한 번도 아이들을 칭찬해준 적 없이 늘 다그친 것 같아요. 놀러 갈 때조차도 차에 책이랑 문제집 싣고 ‘빨리 해!’ 들볶고요.” <엄마반성문>의 지은이 이유남 교장이 지난 21일 자신이 근무하는 서울 명신초등학교 교장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한 번도 아이들을 칭찬해준 적 없이 늘 다그친 것 같아요. 놀러 갈 때조차도 차에 책이랑 문제집 싣고 ‘빨리 해!’ 들볶고요.” <엄마반성문>의 지은이 이유남 교장이 지난 21일 자신이 근무하는 서울 명신초등학교 교장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슈퍼맘 분투기

그의 말대로, 이유남의 삶은 산업화 시대 베이비붐 세대의 한 표본이다. 전북 임실의 전주 이씨 집성촌에서 5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난 그는 아들을 보기 원하는 부모의 바람을 담아 ‘유남’이라 이름 지어졌다. 가난한 농사꾼으로 못 배운 한이 많았던 아버지는 얼마 안 되는 논밭을 팔아 자식 교육을 위해 전주로 이사한 뒤 건설현장 노동자로 밥벌이를 했지만 유달리 총명하고 리더십 강한 유남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다. 그가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아버지와 크게 다투기 전까지 유남은 아버지의 큰 자랑거리였다.

―아버님과 왜 부딪친 거죠?

“아버지는 제가 실업계 고등학교 가기를 원하셨어요. 여자는 여상 나와서 은행에 취직하는 게 최고라고요. 제 밑의 남동생들을 줄줄이 대학 보내려면, 제가 빨리 졸업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고 여기신 거죠. 제가 우겨서 전주여고에 원서를 넣었는데 아버지 말을 거역했다고 엄청 야단맞았어요. 믿었던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에 화가 나고 서러웠어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명문 전주여고에 입학했지만, 대학 갈 길은 요원했다. 성적은 전교 상위권을 다툴 만큼 우수했지만, 이유남은 가정 형편과 딸에 대한 차별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없었다. 당시 2년제이던 서울교대에 입학한 건 국비지원이 되고 빨리 직업을 얻을 수 있다는 경제적 이유가 컸다.

―스스로는 교대에 들어간 것에 만족을 못 하셨나 봐요?

“내 점수면 서울의 4년제 명문대에 갈 수도 있었는데, 집안 형편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는 데 대해서 무척 자존심이 상했죠. 전주에선 돈이 있든 없든 명문여고에 다닌다는 이유로 목에 힘주고 살았는데(웃음) 그런 자존감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렸으니까.”

―자존감의 원천이 학교예요?

“그렇죠. 그땐 자존감의 원천이 일류 대학 가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전공이 중요한 게 아니고.”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게 있었을 것 아녜요?

“당시 저한텐 대학을 갈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했어요. 언젠가 우리 딸이 ‘엄마는 꿈이 뭐였어?’ 묻는데, ‘엄마는 꿈 같은 거 가질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고 말한 적 있어요. 서울교대가 정말 훌륭한 학교이고 수재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는데도 입학 초기엔 정말 다니고 싶지 않았어요. 오고 싶어 온 게 아니고 차선책으로 왔다는 생각에.”

교직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건 교생실습을 나가면서부터였다. 참신한 방식으로 시범수업을 한 것이 극찬을 받으면서, 가르치는 일이 적성에 맞는다는 자각이 들었다. 1982년 교대를 졸업하고 교사로 부임을 한 이후에도 그는 계절학기를 이용해서 4년제로 바뀐 서울교대 학과과정을 자발적으로 이수했고, 덕분에 96년 학사졸업을 할 때는 전체 수석으로 총장상을 받았다. 새로운 교육방식에 대한 호기심과 실험정신이 강했던 그는 마인드맵, 소그룹 토론, 역할극 같은 다양한 교수법을 개발하고 활용했다. 승승장구 촉망받는 교사였다. 교직 생활을 하며 88년 결혼해서 89년에 아들을, 91년에 딸을 낳아 엄마로, 주부로 정신없이 바쁜 생활을 이어갔다. 시부모님과 시가 식구들이 육아를 도와주긴 했지만 학교에서 퇴근하면 곧바로 저녁식사 준비하고 아이들 공부 가르치고 악기 연습시키고 독서지도까지, 그는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슈퍼맘으로 살았다.

―어려운 조건에서 자립적으로 자기 길을 헤쳐 온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평가할 때도 자신을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많아요.

“그렇죠. 난 환경이 안 됐는데도 이만큼 해냈다…. 그래서 칭찬에 인색해지고.”

―사회적으로 잘나가는 부모일수록 자녀에겐 훈육형 독재자가 되기도 쉽고요.

“늘 바쁘게 살았으니까요. 언제나 성과 중심으로 빨리빨리 성취를 해내야 하니까 깊이 생각해볼 여유가 없었어요. 내가 애들한테 뭘 잘못하고 있단 생각은 추호도 해보지 않았죠.”

아이들은 엄마가 기대하고 요구하는 대로 잘 따라주었다. 성적이 우수했고 온갖 상을 휩쓸었으며, 음악과 무용대회에서도 두각을 드러냈고, 학교 임원도 도맡아 했다. 매년 봄방학이 되면 학급회장 선거를 위해 두 아이에게 회장 소견 발표문을 미리 쓰게 하고 몇 차례씩 엄마의 수정을 거친 뒤 원고 없이 연설할 수 있을 때까지 달달 외우게 했다. 전교 임원이 되게 할 때는 아예 한 달 전인 2월 초부터 준비를 시켰고 아들은 ‘전설적인 득표율’로 전교회장이 되었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크게 기울어졌을 때에도 그의 열성은 식지 않았다. 오히려 가정 형편이 어려워졌으니, 더욱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초조함으로 아이들을 다그쳤다. 공부 잘하고 칭찬받는 자녀들은 이유남 인생의 가장 큰 자랑거리이고 삶의 보람이었다.

―그래서 행복하셨나요?

“아니요.”

―교사로서 큰 상도 여러 차례 받고 자식들도 남들이 부러워할 ‘엄친아’로 키우셨는데?

“늘 더 높은 걸 바라보고 있었던 거죠. 아이들 더 잘하게 만들어야 하고 저도 더 잘해야 하고… 이런 걸 항상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행복하다는 생각은 거의 못 해봤어요.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 더 좋은…. 늘 이런 세속적인 출세와 성공이 저한테 중요했으니까요.”

빈곤과 결핍과 차별에 한이 맺힌 베이비붐 세대는 성취를 향해 직진하는 게 그 모든 고통의 해결책이라고 여겼다. 성공을 향한 수직줄에 악착같이 매달려서 맨 꼭대기로 기어오르는 애벌레들처럼,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행복은 현재가 아니라, 일등으로 남들 머리 위에 올랐을 때 주어지는 영전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꿈틀꿈틀 기어오르는 동안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몸에 새겨지는 상처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불행은 예고되었지만 자각하지 못했고, 어느 순간 위기가 닥쳤을 때 그것은 날벼락 같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가장 큰 자랑이자 보람은
공부 잘하고 칭찬받는 자녀
기대에 부응하며 잘 자라던
아들·딸 갑자기 자퇴선언
방문 걸어잠그고 대화 거부

열심히 해도 칭찬 못하고
계속 소리치고 야단치던
과거의 내 모습 떠올랐다
관계 회복까지 시간 걸려
“무엇보다 내가 변해야 한다”

예고된 불행

―그렇게 잘나가던 아들이 고3 여름에 갑자기 자퇴를 하게 되었어요. 그때까지 아무 낌새도 못 느끼셨나요?

“중2 때 아이가 학급 회장을 하고 있었는데, 걔가 장난기 많고 유머가 많은 아이예요. 담임 선생님이 보시기에 그런 아이가 좀 못마땅했나 봐요. 회장이나 되는 애가 무게 없이 군다고. ‘똥인지 오줌인지 가리질 못한다’는 말까지 하셨대요. 애가 그때 꽤 상처를 받았는지 전학을 시켜 달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제가 그랬어요. ‘세상에 나가면 그보다 심한 일들도 많아. 네가 거기서 못 이겨내면 앞으로 사회 나가서도 견디지 못해. 참아.’ 아이 얘기를 차분히 들어줘야 했는데 제가 그렇게 애를 눌러버린 거죠.”

―속상해도 하소연할 데가 없었겠군요?

“고등학교 가서도 학교 비리 문제로 안팎이 어수선해서 아이가 학교나 선생님에 대한 신뢰를 많이 잃었어요. 그래도 고3 때까지 모의고사 성적도 잘 나왔고 내신 1등급 유지하면서 전교 임원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부턴가 자꾸 자퇴한 친구 얘길 하더라고요. 자퇴하고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친구가 있는데 너무 편하다고 한다고.”

―그래서 뭐라셨어요?

“그런 애들하고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했죠.”

그때 아들이 공황장애 증세까지 겪었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학교만 가면 숨이 막히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창문을 보면 문득 떨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아들은 훗날 말했다. 결국 대학입시를 몇 달 앞두고 아들은 자퇴를 했다. 한 달 뒤, 고2에 재학 중이던 딸도 자퇴를 선언했다. ‘잘나가던 오빠도 학교를 그만두는데 내가 학교를 다녀야 할 이유를 못 찾겠다’면서.

―믿었던 아들, 딸이 연이어 자퇴를 하니 충격이 크셨겠어요?

“이제 내 인생은 끝났다 싶더라고요. 남편 사업 부도났고 아들, 딸 자퇴하고…. 난 이제 그만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 신이 원망스러웠어요.”

남매는 등교만 거부한 게 아니었다. 공부를 접고 친구도 잘 안 만나고 방문을 걸어 잠근 채 두문불출, 종일 게임만 해댔다. 딸은 학교를 그만두고 폭식을 하면서 체중도 80킬로그램까지 불어났다.

―막막하셨겠어요.

“하도 속이 상해서 제가 야단치다가 ‘그럴 거면 밥도 먹지 마!’ 하니까 ‘엄마가 해주는 밥은 먹기 싫다’면서 집밥을 안 먹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러곤 할머니한테 용돈 타다가 피자, 치킨 같은 것만 잔뜩 시켜 먹으면서 한 달에 5~6킬로씩 찌기 시작했어요. 그때 사진 보면 얼굴에 잔뜩 독이 올라 있어요. 난 아이가 나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살이 찐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인스턴트식품 때문에 살이 쪄서 스트레스 받는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원인이 나일 거라곤 상상도 못했죠.”

그러던 어느 날 더 끔찍한 사건이 터졌다. 출장 갔다가 맥없이 돌아오는 길에 집 근처에서 대성통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동네 사람들 몇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딸아이의 통곡 소리였다. 황급히 집에 달려 들어가 보니 살림은 엉망으로 어질러져 있고 딸은 장롱 문을 부수고 옷을 갈기갈기 찢고 책을 사방에 흩트린 채 산발을 하고 짐승처럼 울고 있었다. 공포가 엄습했다. ‘저러다 아이가 죽으면 어떡하지?’ 정신이 아뜩해졌지만 딸은 엄마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거부했다. 딸은 자기 방에서, 엄마는 안방에서 목 놓아 펑펑 울었다.

엄마가 달라져야 아이가 산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걸까 모르겠더라고요. 근데 어느 날 문득, 우리 아이들 어렸을 때부터 있었던 일이 영화 필름처럼 쫙쫙 떠오르면서 죽 회상이 되는 거예요. 전 계속 아이들을 야단치고 소리치고 애들은 주눅 들어 있고…. 애들이 진짜 힘들었겠구나, 그때 처음 실감했어요. 우리 집에는 ‘에스케이에스케이’(sksk)란 말이 법도처럼 있었어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란 뜻이죠.”

―부모도 마음의 여유가 없고 행복하지 못했으니까.

“나한테 대화는 사치였죠. 밥 먹고 자기도 바쁜데 무슨 대화야. 한 번도 아이들을 칭찬해준 적 없이 늘 다그친 것 같아요. 놀러 갈 때조차도 차에 책이랑 문제집 싣고 ‘빨리 해!’ 들볶고요. 내가 정말 인생을 잘못 살았구나. 내가 뭘 위해서 이렇게 달려왔나. 근데 막상 어디부터 새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애들은 문 꽁꽁 걸어 잠그고 한집에 살아도 한 달 내내 얼굴 보기도 힘들고. 그때부터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교육을 듣기 시작했어요.”

그때 이유남에게 새로운 용기를 준 것이 한국코칭센터의 교육이었다. 일방적인 지시나 가르침이 아니라,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아이 스스로 답을 찾아낼 수 있게 대화하는 방법. “모든 사람은 온전하며 모두가 특별하다” “모든 사람은 해답을 내부에 가지고 있다”는 전제 아래 ‘인정, 존중, 지지, 칭찬’을 통해서 아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게 하는 소통의 기술이다.

부모가 자식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두려 할 때 자식과 ‘원수 되는 말’을 쏟아낸다. “너는 잘하는 게 뭐야?” “너는 왜 맨날 그 모양이니?” 하면서…. ‘맨날, 언제나, 한 번도, 절대로, 결코’가 들어가는 모든 말들. 그것이 당사자들에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는 걸 이유남은 뼈저리게 깨달았다.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서서히 아이들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뒤틀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일은 시간이 걸렸지만 어느 날 아이들 방문의 잠금장치가 풀린 걸 발견했다. 마음의 잠금장치도 그렇게 천천히 해제되어 갔다.

―코칭 방법을 배운다고 애들과의 관계가 갑자기 달라질 순 없겠죠. 부모가 대화를 시도한다고 애들이 다 받아주는 것도 아니고.

“왜 아이들하고 대화가 안 되냐 하면, ‘내가 이만큼 하면 얘가 이만큼 변할 거다’ 하는 기대를 하고 대하니까 그래요. ‘코칭을 배워서 내가 원하는 뭔가를 애들한테 얻어낼 거야’ 생각하면 애들이 금방 알아요. ‘왜 그러세요? 그냥 하던 대로 하세요’ 하지.(웃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 마음의 변화입니다. 내가 변해야 돼요. 코칭 스킬 좀 배워서 애한테 써먹는다고 애들이 절대로 바뀌지 않아요.”

―마음이 어떻게 달라지셨는데요.

“우리 애들이 자퇴하고 양쪽 방문 닫아걸고 있을 때,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면 ‘너희 엄마들은 진짜 좋겠다. 이렇게 학교를 잘 다녀주고 있으니’ 싶더라고요. 학교 와주는 것만 해도 참 고마웠어요. 그러고 보니, 우리 집 애들도 학교 잘 다녀준 적 있는데, 나한테 칭찬받으려고 그렇게 몸부림치던 때가 있었는데, 생각이 들면서 제가 너무 미안해지는 거예요. 아이들 닫힌 문 바깥에 서 있으면 정말 확 부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는데, 정작 소리가 안 나면 걱정되잖아요. 가만히 귀 기울이면 안에서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나요. ‘살아 있구나’ 싶으면 안 죽고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어요. 너희들 칭찬 한 번 못해주고 열심히 해도 인정해주지 않은 거 진짜 미안하다. 그런 생각에 아이들 방문 앞에서 눈물 줄줄 흘린 게 한두 번이 아녜요. 제가 반성하기 시작한 거죠.”

행복한 부모가 되는 법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아이들은 10년 전 엄마가 목표했던 스카이(SKY)대나 아이비리그엔 가지 못했다. 자기가 오래전부터 하고 싶은 일이라며 아들은 드럼을 배우기 시작했고, 딸은 제과제빵을 배웠다. 자신감을 얻은 아들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지금은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있고, 딸은 살을 뺀 뒤 미국에 가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왔다. 남편의 사업 실패 후 풍족하지 못한 형편이라 이유남이 할 수 있는 건, 1년에 천만원의 융자를 내서 학비를 보태준 것뿐이지만 남매는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며 불평 없이 자기 앞길을 헤쳐 나갔다.

―책에 자녀분들 ‘흑역사’를 다 공개한 셈인데, 부담스러워하지 않아요?

“‘엄마가 너희들 얘기 하는 거 괜찮아?’ 하니까, 딸은 흔쾌히 ‘뭐 어때? 옛날 엄마 같은 엄마들 없애려면 해야지’ 하더라고요.(웃음) 자기는 그나마 용기가 있어서 학교 그만두고라도 나왔지만 용기 없는 친구들은 정신과 약 먹으면서 지내기도 한다고요. 아들도 이 책에 추천사를 써줬어요. ‘실제로 우리 어머니는 많이 달라지셨고 그 덕분에 제 삶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하고요.”

―이렇게 해피엔딩이니까, 책도 쓰고 강연도 하시는 거 아녜요? 또 다른 의미의 자녀교육 성공수기 아닙니까?

“우리 애들 얘기를 하기 위해서 책을 쓴 게 아녜요. 칭찬하고 존중하는 코칭을 통해서 우리 사회 문화를 바꾸자는 얘길 하기 위해서 저의 체험을 양념으로 넣은 거죠. 우리 애들도 여전히 갈등하고 고민해요. 지금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고 아들도 철학 공부를 계속할지 고민 중이고요. 근데, 인생이 원래 그렇게 헤매는 거잖아요. 어느 쪽이 자신을 행복하게 할지 스스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찾아나갈 수밖에 없고요.”

―선생님은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으셨어요?

“전 요즘 행복해요.(웃음) 아직 갚아야 할 빚도 많이 남았지만, 조금씩 돈을 떼서 저희 학교랑 제가 다닌 모교에 수학여행 못 가는 아이들을 위한 기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제가 돈 때문에 수학여행을 못 가서 한이 많았거든요.(웃음) 나중에 빚 갚고 돈 생기면 해야지 생각하면, 평생 못 할 것 같더라고요.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제가 공부한 것 같은 부모교육을 평생교육 프로그램으로 기획해서 진행하는 일을 하고 싶어요.”

이유남은 그 어느 때보다 요즘이 행복하다고 했다. 자녀가 행복해지길 바라다가 결국 자신이 행복해지는 길을 찾은 사람. 새해엔 더 많은 이들이 그처럼 행복해질 수 있기를.

녹취 심지연


■ 이유남을 만든 시간들

1978년 전주여고 2학년 시절의 나.
1978년 전주여고 2학년 시절의 나.
1996년 2월 서울교대 학사학위 받던 날. 1980년 입학 당시 서울교대는 2년제였던지라 졸업 이후 3년간 방학 때마다 계절학기 강의를 수강해 4년제 졸업장을 받았다.
1996년 2월 서울교대 학사학위 받던 날. 1980년 입학 당시 서울교대는 2년제였던지라 졸업 이후 3년간 방학 때마다 계절학기 강의를 수강해 4년제 졸업장을 받았다.
1999년 8월 서강대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수여식 날.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1999년 8월 서강대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수여식 날.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2002년 10월 서울 노량진초등학교에서 교무부장으로 일할 당시 학예회 사회를 보는 모습.
2002년 10월 서울 노량진초등학교에서 교무부장으로 일할 당시 학예회 사회를 보는 모습.
2011년 6월 교회 권사 취임식 날. 관계가 많이 회복된 두 아이와 함께.
2011년 6월 교회 권사 취임식 날. 관계가 많이 회복된 두 아이와 함께.
2017년 현재 재직 중인 서울명신초 교장실에서.
2017년 현재 재직 중인 서울명신초 교장실에서.

▶ 이진순 풀뿌리정치실험실 ‘와글’ 대표. 언론학 박사. 새로운 소통기술과 시민참여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연구하는 것을 주업으로 삼는다. 사람 사이의 수평적 그물망이 어떻게 거대한 수직의 권력을 제어하는지, 평범한 사람들의 따뜻함이 어떻게 얼어붙은 세상을 되살리는지 찾아내는 일에 큰 기쁨을 느낀다.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825607.html?_fr=mt1#csidxbca847db9490d0383bf44fc2c4333a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