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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루 밖 용산의 마지막 하늘엔 별도 달도 떠있었다. 다큐 영화 <공동정범>

성령충만땅에천국 2017. 12. 31. 09:23

망루 밖 용산의 마지막 하늘엔 별도 달도 떠있었다

한겨레 등록 :2017-12-30 16:16수정 :2017-12-30 17:04

 

[토요판] 특집
다큐 영화 <공동정범> 연출한 김일란·이혁상


경찰특공대원들의 법정 진술과 영상 등을 통해 용산참사의 참혹함을 재구성한 다큐멘터리 영화 <두 개의 문>에서 각각 연출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았던 김일란(오른쪽)·이혁상 감독은 지난 5년 동안 용산참사 생존자인 철거민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공동정범>을 함께 연출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경찰특공대원들의 법정 진술과 영상 등을 통해 용산참사의 참혹함을 재구성한 다큐멘터리 영화 <두 개의 문>에서 각각 연출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았던 김일란(오른쪽)·이혁상 감독은 지난 5년 동안 용산참사 생존자인 철거민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공동정범>을 함께 연출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다시 돌아오는 120일은 용산참사 9주기입니다. 망루에서 살아남아 범법자가 된 철거민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2018년 새해를 앞두고 30일 문재인 정부는 용산참사로 처벌받은 철거민들 25명을 특별사면·복권 명단에 포함시켰는데요. 다큐멘터리 영화 <공동정범>에는 참혹했던 그날의 기억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새해의 시작, 1월을 영영 지우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2009119일 서울 용산 재개발 지역에서 생계 대책을 요구하며 한강로 남일당 건물 옥상 망루에 올랐던 이들이다. 용산 철거민과 비슷한 처지였던 다른 동네 철거민들도 함께였다. 점거농성 불과 25시간 만인 이튿날(20) 새벽, 대테러 전담 경찰특공대가 투입된 진압 과정에서 불길이 일었다. 화염은 철거민 5, 경찰특공대원 1명의 목숨을 덮쳤다. 참사에 대한 책임은 그들조차 예상치 못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살아남은 철거민들 몫이었다. 검찰은 농성자 가운데 한 명이 던진 화염병으로 불이 난 것으로 보고 망루 4층에 끝까지 남았던 농성자들에게 책임을 물었다. 경찰을 숨지게 한 특수공무방해치사 등의 공모공동정범혐의로 기소된 11명은 모두 범법자가 된다. 무리한 진압작전 논란을 빚은 경찰 지휘부에는 형사적 책임을 묻지 않았다.

2013131일 옥살이를 하던 이충연 용산4구역 철거대책위원장을 비롯해 김창수(성남 단대동 철거민)·김주환(서울 신계동 철거민)·천주석(상도4동 철거민)이 세상 밖으로 나온다. 지석준(서울 순화동 철거민)은 큰 부상을 입어 평생 장애를 안게 된 까닭에 구속 수감은 면했다. 이들 다섯 명은 각자가 품어온 그날의 참혹했던 기억을 곱씹으며 후회와 원망·자책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을 집요하게 마주한 사람들이 있다.

경찰특공대원들의 법정 진술과 영상 등을 통해 용산참사의 참혹함을 재구성한 다큐멘터리 영화 <두 개의 문>에서 각각 연출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았던 김일란(45)·이혁상(43) 감독이다.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이하 연분홍치마) 소속 활동가이기도 한 두 사람은 2013년부터 용산참사 생존자 철거민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 영화 <공동정범>을 함께 연출했다. 영화적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 이 다큐는 용산참사 9주기 즈음인 내년 125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지난 26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연분홍치마 사무실에서 김일란·이혁상 두 사람을 만났다. 한영희·변규리·넝쿨 감독까지 5명의 활동가와 고양이 두 마리의 일터이자 삶터인 이곳은 2004년 발족한 연분홍치마가 10여년간 활동가들이 사는 반지하방과 옥탑방 등을 전전하다 올해 초 처음 독립적으로 마련한 사무실이라고 했다. 지난 10월 일란에게 수여된 구본주예술상을 비롯한 갖가지 상패 사이로 5만원짜리 지폐가 박혀 있는 플라스틱이 눈에 띄었다. 다급할 때 깨서 비상금으로 쓰라며 지인이 준 개소식 선물이었다.

국정원이 영화 상영 말라고 했다더라

연분홍치마는 인권운동 단체이면서도 <두 개의 문> <종로의 기적> <노라노> 등 주목받는 다큐를 제작해 왔는데요. 처음 어떻게 시작된 단체인가요?

혁상 2003년 초였나.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화이론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같은 전공 선배인 일란 소개로 여성주의자, 성소수자 몇몇이 함께 페미니즘과 섹슈얼리티를 공부하는 모임에 들어가게 됐어요. 활동가로서 여러가지 기획을 해보자며 단체를 만들었는데, 처음엔 영상을 할 거라는 생각은 못했어요. 첫 다큐인 <마마상>(2005)을 하겠다고 했을 때 내부적으로 운동으로서 그 방식이 최선인가를 놓고 많은 논의가 있었고요. 영화를 전공한 우리에겐 영상이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일란 2002년에 단체를 만들기 위한 준비모임을 시작했고, 20046월에 정식으로 연분홍치마 발족식도 했어요. 2003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주한 기지촌 혼혈인 실태조사에 참여하면서 인터뷰했던 분 이야기를 다큐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게 글로 이야기될 때와 이미지로 이야기될 때가 너무 다르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까 고민하다, 극영화는 부담스럽고 다큐가 수월해 보였던 거 같아요. 단체 초기엔 활동가들의 드나듦이 계속되다 다큐 작업을 마친 뒤인 2006년에 5명으로 추려졌어요. 20151월 활동가 2명이 나가면서 시즌1이 끝났고, 변규리·넝쿨이 들어오면서 다시 5명이 됐죠.

두 분이 함께 활동한 지 15년이나 된 거네요.

혁상 1993년부터 알고 지내긴 했어요. 아이고, 이게 몇년이야. 당시 서울지역 대학교 영화동아리들이 모인 서울지역 대학 영화패 연석회의라는 단체가 있었는데 거기서 저런 애가 있구나서로 알았죠. 영화과에 가고 싶었으나 현실과 타협하며 영화 동아리에 들어간 경우였어요.

일란 혁상하고 저하고 비슷한 또래인데, 1980년대 홍콩 누아르나 스필버그 영화를 보고 자란 세대거든요. 대학을 졸업할 즈음 영화를 하고 싶더라고요. 그 당시 민중영화 제작 단체 장산곶매같은 조직이 있긴 했는데, 왠지 그런 단체에 들어가면 불안정하게 살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극영화 감독이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고, 영화이론을 배우러 대학원에 갔죠.

결국 영화를 만들게 됐는데 박근혜 정권 시절 국가정보원과 청와대가 각각 작성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두 분 이름이 있더라고요. 피해는 없었나요?

혁상 이명박 정권 시절인 2011년 제가 연출한 <종로의 기적>을 개봉했는데 황당한 일이 있었어요. 관객 수가 나쁘지 않았는데, 어느 날 서울 소재 한 극장에서 더 이상 상영을 못하겠다고 하더라고요. 국정원으로부터 상영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들어왔다는 거예요. 결국 그 극장에선 상영이 중단돼버렸죠.

(지난 9월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 적폐청산 티에프 조사 결과, 이명박 정권 때도 국정원이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퇴출 압박 활동을 한 것이 밝혀졌다. 이름이 올라간 82명 가운데 52명이 영화감독이다.)

일란 박근혜 정권 들어오면서 영화진흥위원회에 제작지원 신청한 것이 거의 다 떨어지긴 했어요. 실력이 없어서일 수도 있지만.

모든 독립 다큐 감독과 미디어 활동가들이 그렇듯, 연분홍치마도 늘 쪼들렸다. 활동가 5명이 매월 활동비 120만원을 가져가기로 했지만, 그마저 지급되지 못하는 달이 부지기수였다. 살림살이가 빠듯해 현장기록 활동과 다큐 제작을 하는 틈틈이 영상제작 알바를 뛰었다. 제작에서 개봉까지 5년이 걸린 <공동정범>의 경우 인건비를 아끼고 아껴 총 16천만원을 들여 완성했다. 외부에서 일부 상환을 조건으로 한 투자지원금 9900만원을 받았는데 진짜 많은 지원을 받은 편이라고 했다. 모자라는 제작비는 또다시 알바로 충당했다. 그렇게 버텨나가던 연분홍치마는 최근 매월 활동가들에게 지급할 최소한의 활동비 600만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월 계좌이체 후원 목표액을 600만원으로 한 당기다600프로젝트를 했다. 12월 현재 후원회원은 딱 600명이다.

―7만명이 넘는 관객들이 <두 개의 문>을 봤는데 수익이 많지 않았나 봐요.

일란 저희가 멍청했던 게, 연출·편집·제작 등 연분홍치마 활동가들이 맡은 일에 대한 인건비를 제작비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그래서 <두 개의 문> 총제작비가 얼마냐고 물으면, 정확하게 몰라요. 사운드 믹싱이나 음악 등 후반 제작 과정에 들어가는 비용 3천만원 정도로 예산을 짰어요. 그 예산을 적어 외부기관에 지원 신청을 하러 갔는데 심사를 보던 선배 감독한테 혼났어요. 당신들이 상상하는 사이즈면 적어도 1억원 넘어가는 규모인데 이렇게 예산을 짜는 게 말이 되느냐고요. <두 개의 문>으로 돈을 벌긴 벌었어요. 주로 빚 갚는 데 썼지만.

―<두 개의 문>에 이어 다시 한번 용산참사를 다룬 <공동정범>을 제작하게 된 배경이 궁금했습니다.

혁상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와 연대 활동을 해왔는데 이충연씨가 출소하던 날에도 현장 기록을 위해 카메라를 들었어요. 2013년 가을, 진상규명위와 함께 망루에 올랐던 용산지역 철거민과 다른 지역 철거민분들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영화화 계획이 구체화됐어요. 일란이 다큐를 함께 만들어보자고 꼬셨죠. <두 개의 문>만으론 아쉽지 않냐면서. 일란의 경우엔 이충연의 아내이자 유가족 며느리로 평생 살아갈 수밖에 없는 친구 정영신을 위해서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야겠다는 마음이 나름 중요한 이유가 됐던 것 같았어요.

일란 용산참사 유가족들이 길거리에 나와 진상규명을 호소할 때는 사회적인 응답이 없었는데 <두 개의 문>이 상영되면서 상황이 달라졌어요. 구속 수감자들에 대한 특별사면을 촉구하는 여론을 만드는 데 기여한 부분이 있고요. 영신씨가 너무 좋은데 서글프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유가족들과 함께 활동을 했으니까 그 마음이 전해졌고. 충연씨가 출소를 하니, 전작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영화로 해야겠단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인권단체 활동가이자 다큐 감독
불타는 망루에서 살아 돌아온
철거민들의 삶 집요하게 담아
5년간 제작과정 거쳐 내년 개봉

처음엔 용산 철거민이 극의 중심
다른 지역 철거민 아픔이 보였다
세월호 참사 뒤 작품 방향 바뀌어
마음의 참사, 관계의 참사에 주목 
 

10여년간 쌍용차·세월호 등
사회 아픈 곳곳 찾아 영상기록
늘 부족한 재정 채우기 위해
다큐 제작하면서 알바도 병행
 

지난 7월 김일란 감독 위암 진단
수술 다음날 함께 활동해왔던
박종필 감독 암으로 세상 등져
활동가들도 삶을 고민하게 됐다

처음엔 진실에 가까워질 줄 알았다

<공동정범>은 망루에 함께 올랐던 이충연 위원장과 다른 지역 철거민들 사이에 일어난 갈등에 주목한다. 쉽사리 드러낼 수 없는 아픔이다. 두 사람은 영화를 공개하기 전 주인공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용산참사 이야기를 다시 할 수만 있다면 괜찮다고 했다.

공동 주인공5명을 내세운 계기가 있었던 건가요?

혁상 처음엔 망루에서 살아남은 분들이 출소를 하면 진짜 진상규명을 시작할 수 있겠구나그런 기대감이 있었어요. 그래서 <두 개의 문> 철거민 버전을 만들어보자, 이충연을 중심으로 한 영화를 만들어보자, 그런 마음으로 시작을 했죠. 다른 지역 철거민들은 보조 출연자로 등장했는데 이들 사이에 어마어마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단 걸 알게 됐어요. 그러면서 팩트를 찾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2014년 말부터 작품 방향이 달라졌는데, 같은 상처를 안고 있는 철거민들이 서로 감정적으로 할퀴고 토해내는 감정을 보면서 아, 저 사람들은 여전히 불타는 망루안에 있구나, 그게 바로 국가폭력 피해로 인한 마음의 참사, 관계의 참사아니겠느냐 싶었어요. 동지였던 사람들이 서로 칼을 겨누고 휘두르고 있는데, 정작 그런 상황을 만든 국가는 책임을 외면하는 모습에 주목을 하게 된 거죠.

일란 시각이 바뀐 결정적인 계기는 2014년 세월호 참사 영향이었던 것 같아요. 그해 세월호 유가족 집회 영상을 계속 만들었는데, 인권활동가 친구들이 마지막 한 사람도 놓치지 말고 끝까지란 표현을 항상 썼어요. 희생자뿐 아니라 일반인 생존자 고통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며 실태조사도 하고 그랬거든요. 그 과정에서 다른 지역에서 용산으로 연대를 왔던 분들 고통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시야가 확장된 거 같아요. 이충연씨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받는 분들의 아픔이 보이기 시작했던 거죠. 그분들이 우리한테조차 소외받으면 안 된다, 그런 마음이었어요. 세월호 참사의 본질은 단순히 배가 침몰했다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에 인간적 존엄과 안전에 대한 질문을 던진 것이라고 보거든요. 용산참사의 본질은,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어떻게 다뤘는가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런 부분에서 국가가 해야 할 일을 다하지 않았을 때 피해자들은 어떤 피해를 입는가. 재산상 손해나 장애를 얻는 것뿐 아니라 믿었던 사람을 의심하고, 스스로를 의심하게 된 것도 국가폭력 피해라고 생각했어요.

경찰특공대원들이 맞닥뜨린 두 개의 문은 무리한 진압작전을 보여주는 구실을 했는데요. 굳이 <공동정범>이라는 어려운 제목을 단 이유가 궁금합니다.

일란 공동정범(같은 범죄를 계획한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 죄를 지었을 때, 이들 모두에게 범죄 책임을 인정하는 법 논리)으로 기소된 것이 철거민들 간 갈등의 시작 지점이었어요. 용산참사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사법 체계에 대한 문제제기를 같이 하고 싶었던 게 있었고요. 또 공동정범이란 논리가 노동조합이나 운동권을 와해시키는 데 많이 활용되기도 했고요.

<두 개의 문>에 이어 <공동정범>을 연출한 김일란 감독은 지난 7월 암 수술을 받고 현재 회복 중이다. 그는 “무리한 진압이 왜 일어났는지 진상규명이 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두 개의 문>에 이어 <공동정범>을 연출한 김일란 감독은 지난 7월 암 수술을 받고 현재 회복 중이다. 그는 무리한 진압이 왜 일어났는지 진상규명이 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연분홍치마는 여성주의 인권운동을 지향하는데, <공동정범>은 어떤 면에서 여성주의와 연관이 있을까요?

혁상 저는 여성주의가 이분법적으로 젠더를 나누는 태도에 저항하고 주어진 성역할을 뛰어넘어 사고할 수 있는 시선이라고 생각해요. 이러한 부분은 공동연출이란 제작과정에서도 녹아들어갈 수 있다고 봐요. 수직적 관계가 아닌 서로 대화와 논의를 통해서 작업을 하는 거니까요. <두 개의 문>의 경우 철거민은 피해자고 경찰은 가해자라는 이분법적 구도에서 벗어나 경찰도 피해자로 볼 수 있다는 시각의 전환이 있었어요. 이러한 점은 <공동정범>에서도 이어진다고 생각해요. 신성한 피해자로서만 철거민을 유형화시키는 게 아니라, 피해자와 가해자를 넘나드는 모습을 담은 거죠.

일란 저에게 여성주의는 여성 인권뿐 아니라 일종의 철학이고, 삶의 태도이고 사유의 방식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어떤 공간에서 누군가를 배제하는 힘의 논리는 무엇인지, 결국 배제되는 사람은 누구인지. 이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중 하나는 전형적으로 그려지는 피해자 모습에 대한 거였어요. 국가로부터 피해를 당했으니까, 세상을 폭넓게 볼 거야. 품이 넓을 거야같은 모습을 그려놓고 그것을 강요한 게 아닌가란 생각을 했어요.

생존자들의 증언을 들으면서 망루의 마지막 모습을 그려봤을 것 같습니다.

일란 망루 안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모든 분들을 인터뷰했는데,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마지막 순간이 너무 생생하게 전해져요. 특히 소리부분이 그런데. 망루에 쓰인 철판이 되게 얇잖아요. 거기에 물대포를 계속 쏘고 있으니까. 철판에 막 물이 부딪히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웠대요. 그래서 경고방송 하는 것도 안 들렸고 그냥 윙윙거리는 소리. 물포 소리가 크게 천둥처럼 들렸다고 하더라고요. 어떤 분은 마지막 순간 망루와 망루 사이 틈으로 하늘이 잠깐 보였는데 별도 달도 보이더래요. 그 순간을 다큐 안에서 너무 표현하고 싶었어요. 영화에서 재연 장면이 들어가기 애매한 부분이 있고 예산 문제도 있어서 미처 표현을 못했지만 망루 안에서 그분들이 본 마지막 장면이 슬프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마지막 순간, 별도 달도 보였다

2009년 새해 벽두부터 서울 도심에서 용인된 폭력적인 공권력 행사는 그해 여름, 경기도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 옥상으로 번졌다. 참사와 비극이 잇따랐던 지난 9년 동안 주류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하면서 독립 다큐 감독과 미디어 활동가들이 찾아야 할 현장은 늘어만 갔다. 4·16연대 미디어위원회,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 미디어팀에서 현장 영상기록을 병행하던 일란은 지난 75년 만의 건강검진에서 위암 진단을 받는다. 위와 림프절을 모두 들어내는 큰 수술을 받은 다음날, 4·16연대 미디어위원회에서 함께 활동해온 박종필(향년 49) 감독이 간암으로 생을 마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20여년간 장애인과 빈민 등 사회적 약자를 카메라에 담아오던 그였다.

―<공동정범>을 완성하기까지 지난 5년은 일란 감독님에게 어떤 시간이었을까요?

일란 2012년 건강검진을 했을 땐 굉장히 건강했어요. 2013년부터 2017년 사이에 병이 난 건데. 그 시간이 나한테 어떤 시간이었을까 생각을 해봤어요. 2013년엔 연분홍치마 내부의 어려움이 극에 달해 있었어요. 다큐 <노라노> 제작이 진행되고 있었고, 연대해야 할 현장 활동이 쏟아졌고. 재정적으로 힘드니까 활동가들을 서로 착취하는 구조가 최고조로 치달은 거죠. 2014년 본격적으로 <공동정범> 촬영에 들어갔는데, 그때가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면서 바로 미디어팀 활동을 시작했고, 알바도 뛰어야 했고요. 그해 12월엔 성소수자 차별 반대를 위해 서울시청 농성에 합류하고, 올해엔 제 인생에 쓰나미가 온 느낌이 있거든요. 가지도 부러지고 열매도 막 떨어지고 거의 꺾인 느낌이긴 한데. 주변 활동가 친구들이 저를 꽉 잡고 있어서 뿌리는 상하지 않은 느낌, 상처가 크긴 하지만 뿌리는 뽑히지 않아서 잘 회복하면 될 것 같아요.

몸이 아프고 난 이후 가장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요?

일란 예전엔 하루에 두세개 스케줄을 소화해도 조금 피곤하다 말았는데, 예전 에너지의 30%밖에 못 쓰는 것 같아요. 그걸 효율적으로 잘 쓰는 게 필요하겠구나, 그런 부분이 가장 큰 변화고요. 산책하면서 봤던 책 가운데 엄기호씨가 쓴 <단속사회>가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접속을 끊는 고독한 순간을 만드는 게 휴식이고 현대인들한텐 그런 순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와닿는 거예요. 후원회원들 덕분에 월급이 나오니까 마음이 편하고. 제가 돌아갈 공간도 있고 기다리는 사람도 있고. 아픈 것만 빼놓고는 마음이 편하니까 이런 게 휴식이구나, 예전에 왜 못했을까 그런 생각도 들고요.

일란 감독님이나 종필 감독님 일이 다른 활동가들에게도 충격이었을 것 같아요.

혁상 모든 다큐 하는 사람들, 활동가들이 자신의 삶을 고민하는 계기가 됐어요. 앞으로 점점 쇠약해지고 병이 들 텐데, 연분홍치마는 이를 어떤 방식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직접적으로 하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올해부터 연분홍치마 통장에서 활동가들에게 건강검진비를 지원하기로 했어요. 우리는 사회문제 이슈가 있을 때 정말 아무것도 안 돌아보고 현장으로 달려갔는데, 그런 부분이 오히려 꾸준한 활동을 못하게 하는 건 아닌가란 고민이 생겼죠. 에너지를 비축할 지혜나, 지혜가 없다면 제도적 장치라도 필요하지 않을까 해요.

여러모로 연분홍치마 활동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만두고 싶은 적은 없었나요?

일란 그런 생각 진짜 많이 했어요. 그런데 본질을 흔들 정도는 아니었어요. 연분홍치마는 그만둘 수 있을지 몰라도, 모여서 뭔가를 하는 건 그만둘 수 없겠구나 싶었거든요. 지금까지 함께 모여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의 연속이었어요. 모여 있어서 힘든 것도 맞지만, 모여 있으니 재정적 어려움도 조금 해결한 부분도 있고요. 그리고 저는 혼자선 잘 못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혁상 제 성정체성을 깨달은 뒤부터 소수자로 살고 있는데요. 소수자로서 다수의 사람들이 만든 조건에 순응하면서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건 너무 나를 부정하면서 살아야 하는 거니까. 거창하게 활동가가 아니라 성소수자로서 내가 잘 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활동하게 된 거 같아요. 성소수자로서 내 이야기를 영화를 통해 할 수 있다면, 그게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닐까. 지금 연분홍치마 활동을 하는 게 나를 긍정하면서 사는 길인 거죠.

2009년 용산참사로 숨진 이상림씨 외투는 새까맣게 타버렸지만, 품고 있던 용산구청 공문은 그을린 채로 남아 있다. 고인은 2007년 말 세입자 보상 합의 없이 용산4구역 관리처분 계획을 인가하지 말아달라는 민원을 용산구청에 제기했으나 ‘보상 협의가 없다고 해서 관리처분 인가를 중단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는다. 이러한 사연을 모티프로 <공동정범> 티저 포스터가 만들어졌다.
2009년 용산참사로 숨진 이상림씨 외투는 새까맣게 타버렸지만, 품고 있던 용산구청 공문은 그을린 채로 남아 있다. 고인은 2007년 말 세입자 보상 합의 없이 용산4구역 관리처분 계획을 인가하지 말아달라는 민원을 용산구청에 제기했으나 보상 협의가 없다고 해서 관리처분 인가를 중단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는다. 이러한 사연을 모티프로 <공동정범> 티저 포스터가 만들어졌다.

2016년 초여름 <공동정범> 편집이 안 풀리던 어느 날이었다. 일란은 여느 날처럼 집회 영상을 만들어 시청 앞 광장엘 갔다. 사회를 보던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가 구호를 외쳤다. 이 영화가 보고 싶다!광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도 모두 함께 외쳤다. 완전 부끄럽다고 생각한 순간 잠에서 깼다. 꿈이었단다.

무리한 진압이 왜 일어났는지 진상규명이 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어요.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그의 바람은 이뤄질 수 있을까.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25668.html?_fr=mt1#csidxb08fe8a4c66e354baa9f3d2dcc5d31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