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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열장 속 추억 아닌 온전한 ‘그날’의 기억, 영화<1987>

성령충만땅에천국 2017. 12. 31. 07:27

진열장 속 추억 아닌 온전한 ‘그날’의 기억, 1987

한겨레 등록 :2017-12-30 13:24수정 :2017-12-30 18:19

 

[토요판]한동원의 영화 감별사
1987

영화 <1987>의 한 장면. ‘불순’한 교도관 삼촌을 둔 연희는 같은 학교의 ‘운동권’ 선배에게 끌리면서 자신의 내면과 충돌하게 된다. 씨제이엔터테이먼트
영화 <1987>의 한 장면. ‘불순’한 교도관 삼촌을 둔 연희는 같은 학교의 ‘운동권’ 선배에게 끌리면서 자신의 내면과 충돌하게 된다. 씨제이엔터테이먼트


영화 <1987>을 본 관객들은 두 부류로 나뉠 것이다. 영문 제목의 부제인 ‘웬 더 데이 컴스’(When the Day Comes), 즉 ‘그날이 오면’이라는 동명의 노래의 멜로디를 떠올릴 관객과 그렇지 않은 관객으로. 하지만 <1987>이라는 제목에서 가장 먼저 떠올릴 정서가 바로 ‘추억’이리라는 점만큼은 비슷할 거다.

실제로 <1987>에는 각종 ‘응답하라’ 시리즈만큼이나 그 당시를 현역으로 살았던 관객의 추억을 돋우는 아이템으로 가득 차 있다. 밀도 높은 고증에 근거한 이 영화의 ‘추억’은 보라색 버스와 주황색 공중전화 같은 소품들, 코리아극장과 명동 미도파백화점 같은 세트들, 그리고 청카바, 스노진, 디스코바지로 대표되는 당시 의상 등 하드웨어에만 머물지 않는다. 영화의 추억 재현은 소프트웨어 면에서도 발군이다. 예컨대 대학 신입생 ‘연희’(김태리)는 갑자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유재하의 노래를 녹음하기 위해서 재빨리 카세트데크에 녹음용 공테이프를 넣고 녹음 버튼을 누른다. 하지만 녹음방지 탭을 막아두지 않아 녹음에 실패해 좌절하는 등 <1987>은 추억을 거의 생태복원급으로 재현했다. 중장년 관객이라면 필시 등장 순간 조용한 탄성을 울렸을 순백색의 ‘월드컵’(왕년의 국산 운동화 브랜드)은 영화의 핵심 모티브로까지 승격되고 있다. 영화 후반부에서 관객들은 이 합성가죽으로 만든 저가 운동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중에서도 이 영화의 핵심을 이루는 ‘추억 아이템’은 아무래도 거리의 시위대, 그리고 그들 앞에 나타난 최루탄, 닭장차, 백골단일 것이다. 번화가의 행인들 사이에서 누군가 선도 구호를 외치면 주위에 퍼져 있던 학생들이 모여들며 시위대를 형성하고, 동시에 주변 상가에서는 일제히 셔터 내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사뭇 전운이 감도는 그 빈 거리에 전경과 닭장차가 나타난다. 이렇듯 <1987>의 추억은 정치적 표백을 거쳐 팬시상품으로 거듭난 진열장용 추억이 아닌 당시에 대한 온전한 기억이다.

하나의 사건, 다양한 이유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1987>이라는 숫자 네 개가 상징하는 것은 다름 아닌 6월 항쟁이 아닌가. 그러니 <1987>이 제목에서부터 안고 들어가는 의미의 규모는 버거울 만큼 크다. ‘탁 치니 억’으로부터 시작돼 넥타이부대를 거쳐 6·29까지 이어지는 그야말로 우리나라를 통째로 들었다 놓았던 이 역사적 사건을 두 시간 안팎의 시간에 담는다는 것은 거의 무모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 규모의 문제에 대해 <1987>이 내놓은 답은 선택과 집중이다. 영화는 6월 항쟁의 도화선에 불이 붙고 타들어가는 과정, 그러니까 박종철이라는 한 청년의 죽음과 이한열이라는 또 다른 청년의 죽음이 괄호처럼 둘러싸고 있는 그 시간에 집중한다. 범위를 좁히더라도 그 방대함과 복잡함은 여전하다.(이하 존칭, 호칭, 비칭 일괄 생략) 박종철과 그의 가족, 그를 고문한 남영동 대공분실 형사들, 박종철의 시신을 처음 본 의사, 박종철의 부검을 명령한 검사, 부검을 실행한 부검의, 그 ‘최초 목격자’들의 입을 막으려는 남영동과 경찰 수뇌들, 그들의 최종 윗선인 청와대, 그들이 감추려는 것을 캐내고 알리려는 기자들과 재야인사들, 대학생들, 이 많은 인물 중 대체 누굴 취하고 누굴 뺀단 말인가? 답은 ‘전원 탑승’이다. 다소 생뚱맞을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가 인물을 다루는 방식은 영화 <러브 액츄얼리>와 비교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인물을 전체 이야기를 작동시킬 부품이 아닌 그 자체로서 하나의 이야기를 담은 캡슐로서 다루고 있다는 면에서 그렇다. 물론 크리스마스의 시즌적 분위기에 묶여 있는 <러브 액츄얼리>와는 달리 <1987>의 인물들은 거대한 역사적 사건에 얽혀 있다는 점에서 전혀 입장이 다르지만. 아무튼 <1987>의 톱스타 캐스팅이 손익분기 돌파를 위한 관객 모으기 전략으로만 보이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1987>은 기본적으로 인물 저마다의 사연이라는 ‘개별’을, 내러티브라는 ‘전체’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러시아 정치인 트로츠키의 유명한 표현을 빌리면 ‘침대에 맞추기 위해 사람의 발목을 자르는 어리석음’).

주황색 공중전화·카세트데크 등
소품부터 닭장차·백골단 등장에
최루탄, 셔터 내리던 소리까지
‘6월항쟁’ 생태복원급으로 재현

박종철·이한열 죽음에 집중해
이야기 풀어냈지만, 가해자를
무조건 ‘악마’로 그리지 않고
저마다 사연 담아 입체적 연출

예컨대 무소불위 권력의 집행자인 남영동 대공분실의 수괴 ‘박 처장’(김윤석) 캐릭터를 보자. 이 영화의 명실상부한 ‘악의 축’인 그에게도 ‘빨갱이’에 대해 거의 사이비종교 수준의 맹목적 적개심을 품게 된 개인적 배경을 이야기할 기회가 주어진다. 박종철을 고문해 살해한 형사들의 리더인 ‘조 반장’(박희순)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는 권력의 사냥개로서 무시무시한 가해자였던 모습뿐 아니라 불리한 국면 돌파를 위해 꼬리를 자르려는 권력에게 버림받은 피해자의 모습도 똑같이 부각시킨다. 즉 <1987>은 가해자들을 ‘뿔 달린 악마’로 그리지 않는다. 그들이 ‘빨갱이’라는 주문으로 행하는 눈먼 단순화를 재탕하지 않는다. 이런 시선은 반대쪽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부검 없이 박종철의 시신을 즉각 화장하라는 남영동의 압박(사실상 지시)에도 불구하고 부검을 밀어붙이는 서울지검 공안검사 ‘최 검사’(하정우) 캐릭터는 망토 두른 정의의 사도가 아니다. 그의 돌출 행동의 가장 큰 동기는 검찰도 밟고 넘어서는 남영동의 월권에 대한 분개다. 이것은 첫 사망진단을 한 의사와 부검의의 양심선언, 그리고 이를 알리려는 기자들의 숨은 노력 못지않게 권력기관 내의 반목과 알력이 박종철이라는 불씨를 살린 핵심고리였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이에 대한 진위 여부를 떠나 <1987>이 취하고 있는 입체적인 태도는 ‘처음부터 결론내고 들어가는 빤한 이야기’라는 함정으로부터 영화를 구해냈다. 영화의 또 다른 3분의 1은 고문 경찰들이 수감된 교도소의 교도관인 ‘한병용’(유해진)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한병용의 동료 교도관과 수감 중이던 재야인사 ‘이부영’(김의성)의 암약으로 교도소 내부에서 얻게 된 정권의 사건 은폐, 축소 시도의 진상을 외부로 알리려는 노력은 당시 일상다반사였던 사복경찰들의 불심검문 등과 맞물리면서 스릴러풍의 긴장감마저 자아낸다. 외부에서 그 정보를 받아 ‘적절한 통로’로 넘겨주는 역할을 맡은 시국수배자 ‘김정남’(설경구)이 등장하면서부터 영화는 은신, 변장, 그리고 형사들의 추적과 따돌림 등을 수반하며 거의 추격액션의 양상까지 띠게 된다. 그리고 영화의 나머지 3분의 1은 교도관 ‘한병용’의 조카인 87학번 대학신입생 ‘연희’라는 캐릭터가 중심이 되어 전개된다.

보통사람들의 청춘, 그 자화상

‘남영동-의사-검사-형사-기자’의 이야기와 ‘교도관-재야인사’의 이야기가 이 영화의 하체라면, 6월 항쟁의 불씨이자 밑불이었던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는 마지막 대목은 이 영화의 가슴을 이룬다. ‘연희’가 우연한 사건을 통해 학교 선배와 만나면서 전개되는 이야기에서 <1987>은 청춘물, 그것도 무척 풋풋하고도 섬세한 청춘물이 된다. 툴툴거리면서도 ‘불순한’ 교도관 삼촌의 ‘불순한’ 심부름을 마다하지는 않는 ‘순수한’ 대학생 연희가 대변하는 것은 사건 안의 내부자들이 아닌 외부자들, 즉 ‘보통사람들’(이 영화의 원래 제목이었다)의 시선이다. 가치 있는 것들을 위해 목숨까지 걸고 싸우는 사람들을 애써 외면하거나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속담으로 냉소하기까지 하는 우리네 보통사람들의 그것 말이다. 물론 영화는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어요? 식구들 생각은 안 해요?”라며 울먹이는 그녀에게, 줄곧 자신과는 다르다 여기던 사람들의 실제 모습을 천천히 알아가도록 한다. 역시나 현미경적 디테일로 재현된, 당시의 청춘이 흔히들 겪었을 법한 일을 통해서 말이다. 그 자체로 영화 한 편은 충분히 만들어질 법한 이야기에는 설익은 건강식을 억지로 입으로 밀어 넣는 우격다짐은 없다. 다른 캐릭터들에게 그랬듯 <1987>은 연희의 침묵 뒤에 숨어 있던 사연을 들려준다. 그것은 우리 보통사람들이 충분히 공감할 법한 것이다. 더불어 그녀가 그 반대쪽에 있는 ‘운동권’ 학교 선배에게 끌리면서 자신의 내면과 충돌하게 되는 이유 역시 그 당시 청춘들이 충분히 겪어봤을 법한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다. <1987>은 그 시절의 청춘들이 싸울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이었던 인간의 체온이라는 핵심을 과장이나 손실 없이 포착해낸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청춘들의 이야기는 우리 안에 잠자고 있던 인간을 일깨우고, 자칫 ‘잘 몰랐던 역사 구경하기’에 머물 수도 있었던 내용을 우리 모두의 드라마로까지 확장시킨다. 물론 무한경쟁의 그림자 짙게 드리운 2017년의 오늘은, 그때 우리가 품었던 ‘그날’과는 꽤 거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적어도 이 영화를 통해 ‘그날’을 품었던 30년 전의 우리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런 우리를 기억한 채 2018년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만으로도 <1987>은 충분히 이유 있는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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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825664.html?_fr=mt2#csidx3c3489413c7603db3dc72c4894c66c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