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文化); 책과 생각; 건강

[윤이상 윤동주 박정희] 세모(歲暮)에 백 년 전 1917년생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이만열]

성령충만땅에천국 2018. 1. 1. 17:43

세모(歲暮)에 백 년 전 1917년생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이만열]

                        보낸사람

다산연구소 <dasanforum@naver.com> 보낸날짜 : 17.12.29 03:43                
제 485 호
세모(歲暮)에 백 년 전 1917년생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이 만 열(숙명여대 명예교수)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자연스럽게 한 해를 되돌아보게 된다. 2017년, 올해는 어떤 해였을까. 다사다난했다는 말로 상투적으로 평가하기에는 아쉬움이 많은, 매우 의미 있는 한 해다. 무엇보다 한국 민주화운동사에서는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해로 기억될 것이다. 나라 안팎에서는 종교개혁 500주년이라 하여 그것을 기념하느라 많은 행사가 치러 졌지만, 우리 역사에는 그 못지않게 민초들에 의한 ‘촛불민주혁명’의 해로 간주될 것이다. 한국 근현대 민족민주운동사에서 동학농민혁명, ‘3·1대혁명’, 4·19혁명, 광주민주화운동이 거봉(巨峰)으로 꼽히듯이, 2017년의 ‘촛불민주혁명’도 세계사에서 유례를 발견하기 어려운, 평화롭게 진행된 변혁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1917년생, 윤이상·윤동주·박정희

   이 해를 보내기 전에 출생 100주년을 맞는 몇 사람을 우연히 떠올리게 되었다. 이곳저곳에서 윤이상(尹伊桑 1917.9.17~1995.11.4), 윤동주(尹東柱 1917.12.30~1945.2.16)가 올해 출생 100주년을 맞는다며 그 행사를 알려주었다. 두 분과 직접적인 대면을 할 수 없었던 필자는 두 분의 흔적을 접한 적이 있다. 윤이상 선생의 함자는 내 고등학교 교가의 작곡자이기에 일찍 들었다. 그러다가 10여 년 전 필자가 문화재위원으로 있을 때 선생의 유작(遺作) 악보를 근대문화재로 등록하는 문제를 두고 문화재청 담당자와 베를린 윤 선생의 고 댁을 방문, 그 악보를 모두 조사한 적이 있다. 윤동주 시인에 대해서는 필자의 종로구 필운동 거주지에서 멀지 않은 누상동 근처 시인의 하숙집을 찾은 적이 있고, 시인이 한때 시상을 가다듬었을 인왕산 길은 지금 산복도로로 변했지만, 그 길의 창의문 끝자락에는 서시(序詩)를 새긴 바위가 있어 손아들과 함께 그 앞에서 읊조리기도 하고, 그 아래 자리한 윤동주문학관으로 인도하기도 했다. 일제 말기 윤동주 시인의 육필 원고가 보존되었던 광양의 정병욱 고가는 필자 등이 수차례 방문, 근대문화재로 등록하는 문제를 협의한 적이 있다.

   필자는 두 분의 출생 100주년을 맞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또 한 분의 1917년생을 떠올렸다. 촛불혁명이 아니었더면 올해 어떤 형태로든지 거창하게 기념행사를 치렀을 박정희(朴正熙 1917.11.14~1979.10.26) 전 대통령이다. 두 분과 함께 그를 대화의 테이블에 올려놓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100년 전에 출생한 이들을 꼽고 보니, 윤동주가 늘 자신보다 한발 앞선다고 부러워했던 그의 고종형 송몽규와 박 전 대통령 밑에서 국무총리를 역임한 정일권도 이 해에 출생했음을 알게 되었다. 한 두해 뒤에 태어나 이들 세 분과 함께 활동한 이들도 있다. 윤이상에게는 정윤주·김춘수·김상옥이 있었고, 박정희에게는 백선엽·강문봉이 있었으며, 윤동주에게는 문익환이 있었다.

   이렇게 100여 년 전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넓이다 보니, 한국 근현대 시기에는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랄까, 동시대에 같은 목적을 가지고 활동했던 이들이 적지 않다. 1870년대 개항기에는 이승만(1875)·김구(1876)·안창호(1878)·신채호(1880)·김규식(1881)이 출생, 애국계몽 및 항일독립운동 지도자로 활동했다. 이들을 이어 여운형(1886)·조소앙(1887)·안재홍(1891)·정인보(1893)·김원봉(1898)이 나타났다. 1900년 언저리에는 공교롭게도 기독교 지도자들이 다수 출생하는데, 1897년에는 주기철·최태용·박형룡이, 1901년에는 김교신·김재준·이용도·최덕지·한상동·함석헌이, 이어서 손양원(1902)·한경직(1902)·정경옥(1903)·박윤선(1905)이 태어나 일제 강점기 기독교의 신앙·신학 수용과 영적 고양에 힘을 쏟았다. 이들 중 주기철·최덕지·한상동·손양원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투쟁, 순교와 투옥을 불사했고, 박형룡·김재준·정경옥·박윤선은 신학 수용과 교수에, 최태용·김교신·이용도·함석헌은 한국적 기독교 수립에 각각 힘을 기울였다.

   100년 전, 같은 해에 태어난 윤이상·박정희·윤동주는 삶의 정향과 이력이 달랐다. 윤이상은 음악으로, 박정희는 군인·정치인으로, 윤동주는 시인으로 살았다. 윤이상은 통영 출신,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릴 때부터 음악적 자질을 보여, 1935년부터 두 차례나 일본에 유학했고, 해방 전후에는 교편을 잡기도 했으나 한때 일제 경찰에 체포, 고난을 당하기도 했다. 1956년 이후 프랑스와 독일에 유학, 동서음악 융화에 창발성을 발휘했고 방북을 빌미로 ‘동백림사건’에 연루,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심한 고문을 받았다. 박정희는 대구사범을 졸업, 한 때 교편을 잡았으나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진학, 만주국 장교가 되어 항일세력을 ‘소탕’하는 데에 투입되었고, 해방 후에는 5·16군사쿠테타로 집권, 유신독재로 끝막았다. 윤동주는 길림성 화룡현 명동 출신, 숭실학교와 연희전문 및 릿교대학을 거쳐 도시샤 대학 재학 중 사상범으로 연루, 해방을 앞두고 후쿠오카 감옥에서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시어(詩語)의 힘과 음악 혼, 분단을 넘어 평화통일로

   윤동주의 단명(短命)이 세 사람의 삶과 사상을 평면적으로 비교하는 데에 애로를 준다. 그래서 윤동주 대신, 그와 사상적 맥락이 닿을 수도 있는, 1918년생의 문익환이나 장준하를 대입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1917년생 세 분은,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관점에서도 우리에게 다양성을 제시해 주고 있다. 아직도 청산되지 않아 한국 사회 적폐의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하는 친일잔재와, 그와 대조되는 독립운동의 관점에서 이들은 어떻게 평가되고 있을까. 해방 후 민주주의 관점에서는 어떠하며, 남북분단과 통일평화운동의 관점에서는 어떻게 평가될까. 묻지 않아도 답이 이미 나왔을 이런 평가기준들은 그들을 향한 질문만은 아니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를 향한 질문이다.

   윤동주는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사랑한, 연약해 보이는 시인으로 부드러움을 통해 생명의 힘을 일깨웠다. 그의 시 세계가 민족의 범주를 넘기에 세계인의 시인으로 칭송된다. 모국어를 통해 빚어지는 그의 시어(詩語)는 인간의 순수가 정갈한 언어로 나타날 때 그것이 곧 시임을 입증했고, 순수한 것이 가장 강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독립운동을 행동으로 보인 적이 거의 없지만, 무장독립운동에 비할 바 아니었다. 일제가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그가 발하는 시어의 강력 때문이었다. 그는 행동 없이도 강력한 저항을 할 수 있다는 전범을 보여주었고, 침략강권주의에 맞설 수 있는 힘이 시에도 있음을 보여주었다.

   윤동주가 후쿠오카 감옥에서 죽어갈 무렵, 다카끼마사오(박정희)는 일본군 장교로 ‘천황’에게 충성을 맹서하며 항일세력 ‘토벌’에 나섰다. 해방 후 그는 민주정부를 전복하고 유신독재의 길로 줄곧 다름질쳤다. 그가 보릿고개를 면케 하고 경제부흥으로 산업화를 이룩했다고 칭송되나, 비판자들의 목소리는 다르다. 18년 동안의 군정독재가 민주주의를 철저히 망가뜨렸기 때문에 산업화라는 말로 그를 미화하는 것은 민주파괴에 대한 변명일 수 있다. 민주화없이 산업화는 불가능하다. 오늘날 대결적 남북관계의 터전이 그의 장기집권기에 이뤄졌다면, 그와 그의 추종자들이 민족사에서 져야 할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다.

   윤이상은 동양의 음악 혼으로 세계 음악에 도전한 예술인이다.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있을 때 감행한 그의 방북은, 어리석은 선택같이 보였지만, 고구려 혼을 그의 음악세계로 승화시키고자 한 간절함과, 뼈저리게 느낀 통일열망 때문이었다. 국보법이 쳐 놓은 그물망이 그의 통일음악·평화통일의 열망을 짓누르려 했지만, 그의 음악은 승화되어 세계를 움직였고 그의 통일열망은 해내외 한국인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고 있다. 그가 군사정권이 철통같이 얽어놓은 분단의 덫을 뛰어넘으려 했을 때, 아직 현실화되지는 않았지만 분단극복·평화통일의 길은 이미 터지고 있었다.

▶ 글쓴이의 다른 글 보기
글쓴이 / 이만열

· 숙명여대 명예교수
· 사학자(전 국사편찬위원장)

· 저서
〈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 지식산업사, 2014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지식산업사, 2010
〈역사의 중심은 나다〉 현암사, 2007
〈한국 근현대 역사학의 흐름〉 푸른역사, 2007
〈역사에 살아있는 그리스도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3
〈한국기독교의료사〉아카넷, 2003
〈우리 역사 5천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바다출판사, 2000
〈단채 신채호의 역사학 연구〉 문학과지성사, 1990
〈한국 기독교 수용사 연구 〉 두레시대,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