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 및 개혁신앙 교리

삼위일체의 삶 속에서의 성령 / 스탠리 그렌즈(Stanley J. Grenz) 교수

성령충만땅에천국 2018. 1. 3. 12:46

삼위일체의 삶 속에서의 성령

                                   저자 스탠리 그렌즈(Stanley J. Grenz) 교수

 

앞 단원에서 우리는 구원사의 여러 단계들 속에서의 성령론의 발전과정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고대 히브리인들 가운데서의 성령에 대한 예비적인 이해에서 시작하여, 예수의 지상 생애의 특징을 이루고 있던 그리스도 중심의 성령론을 살펴본 후에, 오순절 사건 이후에 하나님의 계획의 종말론적 완성을 향하여 가고 있는, 성령을 수여받은 교회에서의 성령의 임재를 살펴보는 것으로 우리의 연구를 마감하였다.

이 시점까지 우리는 성령의 정체성을 구원사라는 맥락 속에서, 즉 성경에서 발견되는 점진적인 계시를 토대로 살펴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성령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오로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의 성령의 역할이라는 측면으로부터만 도출해내어서는 곤란하다. 성령이 누구인가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삼위일체 내에서의 성령의 위치도 아울러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며 이제부터 우리는 구원사로부터 역사의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논의의 방향을 옮겨보고자 한다. 그렇지만, 앞으로 보게 되듯이, 이러한 관점을 취하자마자, 또다시 즉각적으로 세상 속에서의 하나님의 사역이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게 된다.

이 논의를 우리는 영원한 삼위일체 하나님, 즉 성령을 세계와 결부시키지 않는 가운데 내재적 삼위일체라는 맥락 속에서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세상 속에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경세적 삼위일체)에 참여하는 자로서의 성령에 초점을 맞추어서 구원사를 훑어보아야 한다.

 

내재적 삼위일체 속에서의 성령론의 토대

기독교 신학의 역사 전반에 걸쳐서 하나님의 백성이 만들어낸 신앙고백들은 삼위일체적이었다. 이러한 신앙고백들은 한 분 하나님이라는 실체 속에서 성령을 성부 및 성자와 결부시킨다. 그 결과 성령의 정체성은 영원한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그 일차적인 준거점을 발견한다. 그러나 한 분 하나님 안에서 성령은 과연 누구인가?

 

성령의 기본적 정체성.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삼위일체에 관한 논의(2)에서 도달한 결론들을 먼저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관계의 영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러면 이러한 이해의 배경 및 그 함의(含意)들을 다시 한 번 짤막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영원한 하나님 안에서의 일차적인 운동(movement)은 교부들이 성자의 영원한 발생(generation)”이라 불렀던 바로 그것이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성자는 성부로부터 그의 생명을 가져오고, 성부는 성자와 그의 생명을 공유한다. 삼위일체의 제1위는 성부이고, 2위는 성부의 성자이다.

이런 식으로 구별되는 제1위와 제2위는 한데 결합되어 있다. 우리는 이 결합 또는 유대를 성부와 성자가 공유하는 상호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 안에서의 두 번째 운동은 성령의 영원한 출현또는 발출(procession)”이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 간의 사랑의 영이다.

우리의 기본적인 공리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상호적 사랑이다 는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의 성령의 근본적인 정체성을 설명해준다. 그 영원한 관계의 영으로서 성령은 온전하게 하나님이자 인격이다.

 

성령의 신성과 인격성. 2장에서 말했듯이, 주후 4세기의 신학 논쟁에서 성령의 신성에 대한 주장은 예수의 신성에 대한 신앙고백보다 한층 더 논란이 되었다. 이러한 정통적인 입장을 반대했던 주요한 인물은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Arius)였다. 교회는 니케아 공의회(주후 325)에서 그의 첫 번째 명제 성자는 성부의 첫 번째 피조물이었다 를 거부하였는데, 이는 옳은 결정이었다. 그렇지만 콘스탄티노플의 마케도니우스(Macedonius)를 비롯한 수많은 동방정교회의 사상가들은 성령의 지위에 관한 의심을 여전히 품고 있었다. 아리우스의 또 하나의 명제 성령은 성자의 첫 번째 피조물이었다 는 옳은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 후에 벌어진 논쟁 속에서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는 이 문제의 정곡을 정확히 집어내었다.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온 성령이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나님과 진정한 공동체를 이룰 수가 없다. 마케도니아 논쟁 후에 교회는 아타마시우스의 주장을 받아들여 결국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주후 381)에서 성령의 인격성을 교리로 채택하였다.

고대 교회는 성령의 신성을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필수불가결한 것인가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우리는 성령의 완전한 신성에 대한 주장이 내재적 삼위일체 속에서의 성령의 일차적인 정체성에 대한 이해로부터 생겨난다는 것을 논증할 것이다. 성부와 성자의 유대는 영원한 두 위격 간의 관계이기 때문에, 그것은 영원한 유대(bond)이다. 성부는 영원한 사랑으로 성자를 사랑하고, 성자는 영원히 그 사랑에 화답한다. 이러한 고찰은 사랑이 하나님의 본성을 규정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성경의 선언을 위한 신학적 배경이 된다. 성부와 성자의 관계 그들이 공유하는 영원한 사랑 가 바로 성령이다. 이것은 성령 자신이 하나님의 본성 , 사랑(성부와 성자의 영원한 사랑) 임과 동시에 영원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은 성부 및 성자와 함께 완전한 하나님이다. 이런 이유로 사랑으로서의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위임과 동시에 한 분 하나님의 본성을 규정하는 존재이다( 4:24; 요일 4:8).

성부와 성자의 관계로서의 성령은 또한 인격이기도 하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에게는 자명해 보일지 모르지만, 신학사 전반에 걸쳐서 수많은 사상가들에 의해 의심과 심지어는 직설적인 부정을 거듭거듭 불러일으켜 왔다. 성부 및 성자 예수의 인격성은 쉽게 수긍이 된다. 그러나 성령이 인격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을 비인격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 더 쉽다고 본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성령은 성부 및 성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격이라기보다는 힘 신비한 신적인 힘 이다.

성령이 인격이라는 주장은 삼위일체 하나님 속에서의 성령의 기본적인 정체성과 삼위일체의 처음 두 위격의 인격성으로부터 도출되어 나온다. 성부와 성자가 인격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공유하는 관계는 친밀하고 인격적인 사랑이다. 이러한 관계의 영은 성부 및 성자와 마찬가지로 인격 이외의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또한 성령의 인격성은 하나님의 인격성으로부터 나온다. 성부와 성자를 묶는 사랑은 한 분 하나님의 본성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은 인격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성 사랑 도 마찬가지로 인격이다. 또한 이 본성은 삼위일체의 제3위인 성령이고, 성령은 하나님의 본성의 구체화로서 인격일 수밖에 없다.

성령의 인격성은 단순히 추상적인 신학적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신앙에 있어서 중요성을 지닌다. 사실 신앙의 영역에서 성령이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 인격이라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성령이 인격이기 때문에, 살아계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킨다.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와 주님의 연합을 중재하기 때문이다.

 

성령과 경세적 삼위일체

4장에서 말했듯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동력은 신적 생명의 영원성 안에서 자족하지만 흘러넘쳐서 창조의 행위로 들어간다. 세상을 향한 그의 계획이라는 맥락 속에서 한 분 하나님은 경세적 삼위일체이다 창조와 관련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활돌하는 성부, 성자, 성령. 따라서 성령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이러한 맥락 속에서의 성령의 정체성을 포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이제부터 경세적 삼위일체의 세 번째 지체로서의 성령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기본적인 이해. 간략히 말하자면, 경세적 삼위일체라는 맥락 속에서 성령은 하나님의 계획을 완성하기 위하여 세상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신론에서 살펴보았듯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위격은 한 분 하나님의 하나의 경륜 속에서 특정한 역할을 수행한다. 성부는 원천 또는 기원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이런 역할 속에서 성부는 성자와 성령을 파송한다. 성자는 성령의 파송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세상에 성부의 주장을 행사한다. 성령의 역할은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완성함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의 종말론적 공동체가 완전한 모습으로 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경세적 삼위일체 속에서 성령의 특정한 역할 하나님의 계획의 완성자로서 은 내재적 삼위일체 속에서의 성령의 기본적인 정체성에서 나온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세상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획과 활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성 속에 있는 동력의 유출(流出)이라는 것을 상기하여야 한다.

4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종말론적인 새로운 공동체에서 절정에 달하는 창조와 구속의 드라마 전체는 성부와 성자의 영원한 관계로부터 흘러나오는 산물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주시는 사랑, 즉 성령 자체인 성부와 성자가 공유하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자원하여 세상을 창조하였다. 성자는 그가 성부와 함께 누리고 있는 영원한 관계 속에 다른 이들도 참여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17:24), 성부를 대신하여 세상에 구원을 가져오는 일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 하나님은 이러한 신적인 관계의 영이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그와 교제케 하기 위하여, 즉 성자와 성부의 교제 속에 들어오게 하기 위하여 그의 영을 보내셨다.

달리 말하면, 성령은 종말론적 공동체를 탄생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완성하기 위하여 활동하는 하나님의 동력이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성부와 성자의 영원한 사랑의 관계에 참여케 하는 자이다. 이 신적인 능력의 본질은 사랑이며, 사랑은 성부-성자 관계의 성격이자 한 분 하나님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세상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서의 성령의 정체성의 여러 측면들. 세상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능력으로서의 성령의 정체성은 창조에서 구속으로, 그리고 다시 창조로 움직이는 중요한 신학적 운동(movement)을 따른다.

이 모든 것의 토대에 놓여 있는 것은 생명의 토대로서의 성령의 정체성이다. 창조자 영으로서의 성령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전면적으로 연루되어 있다.

성령은 모든 생명 속에 내재해 있는 하나님의 편만한 능력이다. 그러나 또한 성령은 초자연적인 생명의 수여를 촉진시키고, 하나님의 임재를 그의 백성 가운데 중재하는 초월적이고 돌입하는 동력이기도 하다. 성령의 역할에 이러한 차원이 더해짐으로써, 우리는 성령의 정체성이 구속적 차원을 포함하기 시작하는 것을 본다. 메시야가 오심으로써 성령은 예수의 사역에 권능을 부여하는 자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지니게 된다. 높이 들리우신 주님은 그의 백성에게 성령을 수여한다. 여기에서 구속과 관련된 성령의 정체성의 측면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오순절 사건 이후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동체 속에서 하나님의 역동적인 능력으로서의 성령을 본다. 그러나 이 역할은 생명을 전달하는 일을 포함한다 우리 몸에 장래 생명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과 함께 우리의 속사람에게 생명을 전달하는 일. 따라서 이것은 성령의 정체성이 구속의 영역에서 창조의 영역으로 움직여가는 단초를 보여주는 것이다.

언젠가 성령은 다시 한 번 완전한 의미에서 생명의 창조자가 될 것이다. 종말론적 갱신이 있을 때에 성령은 온전한 생명을 가져올 하나님의 능력이다.

 

종말론적 창조자 영으로서의 성령의 정체성. 구원사 속에서의 성령의 정체성은 창조와 구속이라는 두 주제의 상호작용을 잘 보여준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러한 흥미로운 상호작용은 종말론적 새 창조 속에서의 성령의 역할에서 절정에 달한다. 이러한 관찰로부터 우리는 경세적 삼위일체 속에서의 성령의 궁극적인 정체성은 종말론적 창조자 영이라는 정체성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칭호를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는 것으로 우리의 논의를 끝맺고자 한다. 삼위일체의 세 번째 지체를 종말론적 창조자 영으로 규정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삼위일체의 제3위를 종말론적 창조자 영으로 규정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을 좀 더 분명하게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이러한 칭호에서 종말론적이라는 용어가 지니는 의미를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간단히 말해서, 경세적 삼위일체 속에서 성령은 완성자이기 때문에 종말론적이다. 궁극적으로 성령의 목표는 하나님의 통치를 완성하고, 종말론적 공동체의 수립을 완성함으로써 성자로 말미암아 성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을 완성하는 자로서의 성령은 함축적으로 종말론적이다. 성령의 사역은 창조와 관련된 하나님의 계획의 궁극적인 목표를 이루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령은 경세적 삼위일체의 사역도 완성하게 된다.

성령의 정체성의 종말론적 차원은 성경의 이야기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종말론적인 성령의 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그때를 기다렸다. 이렇게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주심으로써 구속받은 공동체가 탄생할 것이고, 하나님의 통치도 시작될 것이다.

이러한 구약의 예언을 배경으로 신약성서는 종말의 때가 동텄다고 주장한다. 나사렛 예수는 자신의 사역을 완수한 후에, 높이 들리우신 주님으로서 성령을 세상에 부어주었다. 기나긴 세월 동안 기다려 왔던 시대가 이제 드디어 도래하였고,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성령의 임재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종말의 완성은 여전히 미래에 있다는 말을 덧붙인다. 언젠가는 구원의 계약금이자 약속인 성령이 성자로 말미암아 우리를 성부와 온전하게 교제하게 할 것이다.

성령의 정체성의 종말론적 성격은 결국 그것의 창조적차원으로 귀결된다. 창조와 관련된 하나님의 계획을 완성하기 위한 하나님의 활동의 대리인으로서 성령은 창조자 영이다. 일차적으로 성령은 인류 가운데 새로운 창조 구원 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창조적이다. 전체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구원은 종말론적 사건이다. 왜냐하면,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의도한 계획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건을 향한 노정(路程) 중에 성령은 여전히 활동한다. 믿는 자들 각 사람 속에 내재하는 분으로서의 성령은 우리의 삶 속에서 활동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만든다.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를 중재하는 자로서의 성령은 공동체에 내주하면서 우리를 변화시켜 새로운 인류의 맛보기(foretaste)이자 선조(forbear)가 되게 한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세상 속에서의 그의 역할에 있어서도 창조적이다. 하나님의 계획을 완성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성령은 만유에 새로운 창조를 가져온다. 궁극적으로 성령은 오직 종말에 가서야, 즉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룰 때에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는 자로 활동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까지 성령은 계속 세상 속에서 활동한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새 땅에서의 조화로운 인간의 실존의 특징을 지니게 될 종말론적 공동체를 맛보게 한다.

그러므로 종말론적 성령은 창조자 영이다.

4장에서 우리는 삼위일체의 세 지체는 모두가 하나의 창조 행위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였다. 성부는 그러한 창조 행위의 원천이자 근원이기 때문에, 궁극적인 의미에서의 창조주이다.  로고스’ (logos, 창조의 원리)로서의 성자는 창조의 중간 행위자인데, 하나님은 성자로 말미암아 만물을 창조하셨다. 성령은 창조 속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이 피조물을 존재케 할 때에 사용한 동력이다.

또한 우리는 창조는 단순히 먼 과거에 관한 진술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도리어 이 한 창조 행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 완성될 미래에 속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이 한 행위는 본질적으로 삼위일체적이다. 삼위일체의 삼위 모두가 종말론적인 새로운 창조를 이루는 데 참여한다. 성부는 궁극적인 의미에서의 창조주이다. 성부는 만물을 새롭게 하는 자다( 21:5). 로고스로서의 성자는 새로운 질서에 참여하는 모든 자들이 따라야 할 모범이다(요일 3:2). 그리고 성령은 우리의 부활을 포함한 새 창조를 가져오기 위하여 활동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8:11). 이렇게 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종말론적 창조 사건을 이루어내는 것이다: 성부는 성자로 말미암아 성령을 통하여 창조하신다.

그때까지 성령은 새 창조의 보증(保證)이다. 종말론적 창조자 영으로서의 성령은 이미 신자들에게 생명을 주는 사역을 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령은 우리가 종말론적 하나님의 공동체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는 것이다(8:16-17; 1:13-14). 이 종말론적 창조자 영은 그리스도의 공동체, 즉 교회 안에서 활동한다. 우리 가운데서의 성령의 임재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 속에서 새로운 인류 사회의 완성을 보증한다. 마지막으로, 종말론적 창조자 영은 피조물 속의 생명의 원천이다. 성령은 자연계를 끊임없이 새롭게 함으로써, 새 하늘과 새 땅을 통한 우주의 종말론적인 갱신을 보증한다.

종말론적 창조자 영이라는 삼위일체의 제3위의 정체성은 경세적 삼위일체에서 내재적 삼위일체로 넘어가는 연결고리를 제공해준다. 성령은 피조물을 하나님의 교제, 곧 참된 공동체로 이끄는 일을 하는 하나님이다. 성령은 우리를 공동체로 끌어들임으로써, 성부와 성자의 영원한 관계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을 중재한다.

그러므로 성령이 완성하는 경세적 삼위일체의 사역은 피조세계가 내재적 삼위일체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을 그 목표로 삼는다. 성령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 한 사역 속에서 수행하는 실제적인 과제들은 이하에 나오는 세 장, 넓게는 우리가 서술하고 있는 조직신학의 나머지 부분의 구체적인 주제들이다.

 

 

스탠리 그렌즈 STANLEY J. GRENZ

Carey Theological College에서 침례교의 유산,

신학, 윤리를 담당한 교수이자, 캐나다의 Vancouver

있는 Regent College에서 신학과 윤리를 담당하고 있는

교수이다. A Primer on Postmodemism

비롯한 많은 저서가 있다.

 

역자 신옥수

전남대학교 독어독문학과 졸업(B. A.)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M. Div.)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졸업(Th. M.)

 

조직신학 : 하나님의 공동체를 위한 신학 / 스탠리 그렌즈 [지음];

신옥수 옮김. 고양 :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원서명 : Theology for the community of God

원저자명 : Grenz, Stanley J.

 

4부 성령론

13장 성령의 정체성 543 page

<삼위일체의 삶 속에서의 성령> 전문을

     인용(引用) 전재(轉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