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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목사 Facebook. 2018. 1. 3. 수요일 / 생사를 건 교회개혁 읽기 (22)

성령충만땅에천국 2018. 1. 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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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목사 Facebook. 2018. 1. 3. 수요일

생사를 건 교회개혁 읽기 (22)

7. 동안교회와 높은 뜻 숭의교회에서의 전문목회.

82년 1월 영락교회 부목사가 되었다. 84년 6월 승동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88년 말 다시 영락교회 목사가 되었다. 그 때 영락교회는 협동목회를 시도하였었는데 협동목회란 내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전문목회와 같은 개념이었다.

임영수 목사님이 담임목사, 이성희 목사님이 행정목사, 내가 교육목사였는데 협동목사의 대우를 담임목사와 똑같이 해 주셨다. 협동목회에 대한 제안을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목회의 새로운 대안이 되리라는 나름의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여러가지 문제들이 있었다. 협동목회와 전문목회에 대한 완벽한 설계도가 없이 그냥 급히 집을 지으려 하는 것 같았다. 교회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협동목사로 부름을 받은 우리도 준비되지 않았다.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영락교회에 대하여 지금도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결국 영락교회에서의 협동목회는 완성을 보지 못하고 이성희 목사는 연동교회의 담임목사로 그리고 나는 동안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영락교회에서의 협동목회 시도는 그냥 끝이 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전문목회(협동목회)에 대한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그런 시도가 옳은 것이라는 나름의 확신이 있었다.

동안교회가 수적으로 어느 정도 부흥하면서 나는 다시 협동목회에 도전하였다. 동안교회 부목사 출신으로 다른 교회에서 담임목사를 하던 박은호 목사와 오대식 목사를 선교담당과 행정담당 협동목사(전문목사)로 초청하였다.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제일 큰 문제 중의 하나가 부목사들의 거부반응이었다. 담임목사와 자신들 사이에 갑자기 협동목사(전문목사)가 끼어 듦으로 무언가 강등당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일은 내가 영락교회 협동목사로 갔었을 때에도 있었던 일이었고 좋은 일은 아니었으나 나름 이해는 되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91년 10월 높은 뜻 숭의교회를 개척하게 되면서 두 협동목사도 함께 나오게 되었다. 높은 뜻 숭의교회에서의 협동목회는 영락교회와 동안교회에서처럼 부목사들의 거부반응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협동목사가 먼저 자리 잡고 있는 상황에서 부목사들이 부임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바라고 꿈꾸는 나름 완벽한 전문목회(협동목회)에 대한 그림은 잘 그려지지 않았다. 담임목사의 역할과 권한 그리고 협동목사의 역할과 권한 그리고 부목사들의 역할과 권한이 잘 자리를 잡지 못하고 뭔가 엉성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후에 생각해 보니 당연한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점점 협동목회가 조금씩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선교와 행정과 교육에 대한 당회장의 권한을 전문목사들에게 위임하였다. 부목사들은 담임목사인 나와 협력하지 않고 자신들이 소속되어 있는 협동목사와 협력하게 하였다. 나는 설교와 당회만 책임졌고 늘 생각하고 이야기하는바와 같이 병원장과 학교 총장과 같은 역할을 하려고 하였다. 그래야만 교회가 전문성과 통전성을 유지할 수 있겠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동안교회와 높은 뜻 숭의교회는 당회와 제직회의 역할과 권한이 분리되었고 타 교회에 비하여 제직회의 권한과 비중이 높았던 교회였다. 재정의 집행과 결제에 대한 권한을 장로가 아닌 안수집사와 권사들이 맡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제직회의 의장은 내가 아니었다. 행정담당 협동목사였다. 나는 제직회장 역할과 권한을 협동목사에게 이양하고 오로지 당회장(역할과 권한이 다른 교회에 비해 많이 축소된 당회의) 역할만 감당하였다.

전문목사들은 점점 총장과 병원장의 역할은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학장과 많은 인턴과 레지던트들을 거느리고 자신의 전문 영역에서 나름 막강한 자리와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힘있는 의대교수의 역할은 감당하게 되면서 나름 협동목회의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8. 전문목회의 뜻하지 않은 효과.

전문목회가 완벽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담임목사 한 사람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어 점점 담임목사가 제왕적 목회를 하는 것은 어느 정도 막게 해 주었다. 교회가 커지고 대형화 되어 감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권한을 담임목사 혼자서 다 갖게 되면서부터 우리 한국 교회는 부패하기 시작하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요즘 한국교회에 새롭게 큰 잇슈가 되고 있는 대형교회의 담임목사 부자세습도 결국은 담임목사의 제왕적 목회와 무관하지 않다.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사회적인 교훈은 교회 안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고 실제로 그렇다.

우리 한국교회의 근본적인 문제 중에 하나는 담임목사와 장로들의 역할과 권한이 비정상적으로 커져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교회의 권한이 목사와 장로로 구성되어 있는 당회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형교회의 담임목사의 권한은 대형종합병원과 종합대학의 병원장과 총장의 역할과 권한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심지어는 한 나라의 대통령과도 비교할 수 없다.

그러니 목사도 장로도 사람인데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한국교회의 개혁은 목사와 장로에게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는 권력을 분산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나는 그것이 당회의 민주화와 목회의 전문화로서 가능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09년 1월 높은 뜻 숭의교회는 가히 역사적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분립을 단행하였다. 본 교회요 모 교회라고 할 수 있는 높은 뜻 숭의교회를 해체하고 교회를 넷으로 완전히 분립하는 것이었다. 높은 뜻 숭의교회도 대형교회로 질주하는 교회 중 하나였다. 개척 7년 만에 주일 출석 5천 명에 육박하였으니 말이다. 교회의 성장은 해마다 가속이 붙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럴 때 화분 분갈이를 하듯 한 화분안의 교회를 네 화분의 교회로 분립한 셈이었다. 그것이 높은 뜻 숭의교회의 대형화를 막았고 점점 대형화를 향하여 질주하고 있는 몇몇 교회들에게 새로운 모델이 되게 되었다. 실제로 몇몇 대형교회들이 우리 높은 뜻 교회의 분립을 모델로 삼으려고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내 보기에 쉬워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전문목회의 부재 때문이다. 높은 뜻 숭의교회가 그와 같은 분립에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나는 협동목회(전문목회) 때문이었다고 확신한다.
모세의 성공적인 은퇴는 여호수아와 같은 차세대 리더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회에는, 특히 대형교회에는 모세만 있지 여호수아 급(?)의 목사가 없다. 자리도 없고 키우지도 않는다.

높은 뜻 숭의교회에는 교인들에게 인정받고 있는 전문목사들이 있었다. 교회가 분립될 때 그 전문목사를 중심으로 교회가 분립되었다. 그 때문에 쉽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교회분립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하나만으로도 나는 전문목회에 대한 거의 평생의 씨름이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대형교회들이 건강하고도 안정적인 교회분립을 원한다면 어느 날 갑자기 준비 없이 시행하려 해서는 안 된다. 성공하기 어렵다. 최소한 먼저 교회 안에서의 권력 분산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준비되어져야만 한다. 그 가장 효과적인 권력 분산의 방법 중 하나가 나는 전문목회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