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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동호 목사 Facebook. 2018. 1. 4. 목요일 / 생사를 건 교회개혁 읽기 (23)

성령충만땅에천국 2018. 1. 7. 04:22


김동호 목사 Facebook. 2018. 1. 4. 목요일


생사를 건 교회개혁 읽기 (23)


3
부 당회 변혁이 키워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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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도 생사를 건 교회개혁을 쓰고 책에 쓴대로 목회를 하려다 정말 생사가 갈릴 뻔(?) 했었다. 당회와 당회원인 장로를 건들였기 때문이다.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알았기 때문에 '생사를 건 교회개혁'이라고 비장하게 책 제목을 내 걸었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개혁의 핵심 대상은 교인이 아니다. 제직들도 아니다. 저들이 의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저들에게는 개혁할만한 역할과 권위가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교회 개혁의 핵심대상은 목사와 장로라고 할 수 있다.
목사의 개혁을 위하여 몇 가지 제안을 하였었다.
위임목사 하지 말고 6년에 한 번씩 재신임을 받자.
원로목사 하지 말자.
70
세 정년 너무 길으니 정년을 한 5년 줄이자.
전문목사 제도를 도입하여 담임목사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는 역할과 권한을 분산시키자.

그 같은 주장과 이야기를 하다가 선배목사님들에게 욕 많이 먹었다.
노회의 공식석상에서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자식이'라는 막 말까지 들었었다.
많은 목회자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었다.

목사의 개혁만을 주장하지 않고 장로의 개혁을 주장하였다가 혹독한 댓가를 지불해야만 했었다.)

7
장 장로의 역할 규정.

오늘날 세계적으로 볼 때 장로교회는 전체적으로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미국의 경우만 해도 장로교회는 거의 군소 교단 수준으로 전락하기 일보직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매년 감소하고 있는 추세이다. 물론 우리 한국에서는 그와 같은 현상이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지는 않지만 머지 않아 한국에도 그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게 될 것임으로 미리 미리 준비하고 대비하여야 할 것이다.

1.
장로교회의 위기

한국교회의 경우에도 장로교회의 병폐가 힘각하게 우려되는 상황으로까지 악화되어 있다. 그러므로 철저한 자기 비판과 반성이 없다면 머지 않아 한국에서도 장로교회는 쇠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장로교회 뿐만이 아니다. 한국 교회의 경우 교단을 불문하고 정치 스타일은 거의 장로교회와 비슷해져 있어서 장로교회의 병폐는 꼭 장로교회에만 국한 되는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모든 교회에 해당되는 문제가 되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는 비단 장로교회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한국 교회 전체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장로제도와 당회 정치에는 크게 두 가지 정도의 큰 문제가 있다. 첫째는 목사와 장로의 역할 혼돈과 그로 인한 목사와 장로의 갈등이고, 둘째는 당회가 민주 정치를 표방하지 못하고 전제 정치를 표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대부분 목사는 뭐하는 사람이고, 장로는 뭐하는 사람인가에 대한 정확한 구별이 없이 섞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오는 혼동과 그 혼동에서부터 야기되는 갈등이 대부분의 한국 교회의 문제가 되고 있으며 교회와 교단 안에서 힘겨루기와 같은 헤게모니 쟁탈전이 한국 교회의 발전과 성장과 부흥을 저해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가 되어있다.

목사는 뭐하는 사람인가?
장로는 뭐하는 사람인가?
정확한 역할 구분을 하여 놓고 장로는 장로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목사는 목사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여야 할 것이다. 쓸데 없는 충돌을 버리고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며 협력하여 주의 몸된 교회를 섬겨 나가야 할 것이다.

2.
장로는 누구인가?

첫째, 장로는 교인들의 대표이다.

장로교회의 정치원리는 민주주의 정치가 표방하고 있는 대의정치라고 할 수 있다. 국회의원들이 국민들의 대표로 선출되어 국민을 대표하고 대신하여 국회에서 일을 하듯 장로는 교인들의 대표로 선출되어 당회에서 교회의 일을 대신하고 대표한다.

장로는 최소한 세례교인 30명을 대표한다. 세례교인 30명 당 1인의 장로를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목사와 장로는 그 성격이 다르다. 목사도 물론 교인들의 청빙에 의해 그 교회의 목사가 되기는 하지만 장로처럼 교인들의 투표로 선임되지는 않는다.

목사가 되려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개인적으로 응답하여 신학교에 입학하고 소정의 과정을 마치고 자격 시험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장로는 개인적으로 자기가 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장로가 되기 위한 학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수해야 할 학점과 과목이 있는 것도 아니다. 장로는 교인들의 투표에 의하여 선출되는 선출직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목사와 구별된다. 목사는 선출직이 아니다.

장로는 교인들이 자신들의 대표로 세운 사람이다. 그러므로 장로는 교인의 대표이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장로가 교회의 대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장로는 교인의 대표로 선출하고, 목사는 교회의 대표로 청빙한다. 실제로 법적인 교회의 대표성은 목사에게 있다. 그것은 교회법도 마찬가지요, 사회법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의 대표가 높은 건가 교인의 대표가 높은 건가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뭔가 느낌상 교인의 대표보다는 교회의 대표가 더 높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구별과 구분은 누가 더 높은 가에 관한 것이 아니다. job description에 관한 것이다. 목사가 교회의 대표라고 하면 목사들이 착각해서 교회의 주인이 되고 더 나아가서는 왕이 되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럴 위험성이 있다고해서 장로가 교회의 주인이 되려해서도 안된다. 교회의 대표가 되려고해서도 안 된다.

교회의 대표가 교회의 주인이 되고 나아가 왕이 되는 것은 여러가지 안전 장치를 통해 막으면 된다.
그래도 교회의 대표는 목사가 되는 것이 맞다.
장로는 교인의 대표 역할을 하는게 맞다.

둘째, 장로는 목회전문가가 아니다.

장로는 물론 목사의 시녀도 아니고 주수도 아니다. 물론 부하도 아니다. 그러나 장로는 언제나 자신이 목회의 전문가로 헌신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교회 안에서 목사와 동역할 때 일정한 선을 넘어서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목회도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직업이다. 사람들은, 특히 목회자들은 목사를 직업이라 이야기하면 잘 수긍하지 못한다.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목회는 성스러운 것이고, 직업은 속된 것이라는 편견이 심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직업은 성스러운 것이다. 나는 직업이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요, 특히 우리 개신교의 전통이다. 직업은 아마츄어가 아니다. 직업은 프로를 의미한다.
직업은 봉사로 하는 것이 아니다. 목사는 그런 면에서 직업이다. 때문에 그 전문적인 작업(목회)를 위해 고도의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인정을 받아 안수를 받는다.

장로는 직업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장로의 직을 성직으로 알고 장로들이 가지고 있는 직업은 성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소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나는 직업이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교회의 장로가 장로직보다 자신의 직업에 더 충실하고 충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로의 직업은 소명이고, 장로의 직은 봉사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에게는 직업적인 전문성을 가지고 해야 할 일이 있고 봉사로 해야할 일이 있다. 그것은 목사도 마찬가지고 장로도 마찬가지고 모든 사람이 다 마찬가지다. 직업으로 해야 할 일과 봉사로 해야 할 일의 경중을 구별하지 못하고 동일시 하는 건 민주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민주적인 것이라고 착각하고 그것을 평등한 것이라 생각하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셋째, 장로는 세상이라고 하는 선교지에 부름을 받은 선교사요 성직자이다.

장로에게는 교회에서의 장로직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그것은 장로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직업이다. 앞에서 이야기 했지만 직업은 단순히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다. 속된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에게 직업은 소명이다.

이제까지 교회의 장로들은 자기의 직업적인 소명에는 소홀히하고 오직 교회의 장로직에만 충성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장로직에 충성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자기의 직업적인 소명을 소홀히 여기고 그 소명을 잘 감당하지 못한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도 사랑하신다. 아니 하나님은 세상을 더 사랑하실는지 모른다. 하나님은 교회를 위하여 세상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하여 교회를 만드신 것이 틀림없다.

이랜드의 사목으로 평생을 헌신하신 방선기 목사께서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
선교와 하나님 나라'라는 연극을 공연하는 무대가 둘이 있다.
하나는 교회고 또 다른 하나는 세상이다.
교회라는 극장이 있고, 세상이라는 극장이 있다.
교회라는 극장에서 공연되는 연극의 주연과 조연이 있고, 세상이라는 극장에서 공연되는 연극의 주연과 조연이 있다. 그런데 서로 좀 다르다.
교회라는 무대의 주연은 목사고 조연은 장로와 교인들이다.
그러나 세상이라고 하는 무대의 주연은 장로와 교인들이고 목사는 조연이다.
한 번의 주연과 한 번의 조연으로 목사와 장로, 목사와 교인은 서로 평등하다.

그런데 우리 한국 교회는 그 동안 교회라는 무대만을 무대라고 생각했다. 세상은 무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세상이라고 하는 보다 더 중요할 수 있는 극장과 무대를 없애 버리고 오로지 교회라고 하는 극장과 무대만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왜 목사만 주연을 하고 왜 장로는 밤낮 조연만해야 하냐?'를 놓고 실갱이하느라 정작 '선교와 하나님 나라'라는 연극은 제대로 공연되지 못한 면이 있다.

3.
높은 뜻 교회의 목사와 장로 이야기.

높은 뜻 교회의 목회 철학은 하나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인이신 교회'이다. 하나님이 주인이신 교회가 되기 위하여 사람은 목사든 장로든 교인이든 주인 노릇 못하게 하는 것이 제일 큰 목표였다. 목사는 목사로서 충성하지만 주인이 되지 않고, 장로는 장로로서 충성을 다하지만 교회의 주인이 되지 않고, 교인도 교인으로서 최선을 다하지만 자기 기득권을 취하려 하지 않은 교회가 목표였다.

나는 소위 개척에 성공(?)한 목사라고 할 수 있다. 개척한지 6-7년 만에 주일 출석이 5,000명에 가까운 교회가 되었으니까. 때문에 높은 뜻 교회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슬아슬했지만 결과적으로 높은 뜻 교회의 주인이 아닌 그저 반가운 손님 정도로 은퇴하고 깨끗이 물러날 수 있었다.

2001
10 7일부터 시무를 시작하여 6년이 지난 2006 10월 재신임 투표를 받고 일 년 안식년을 가졌다. 놀고 쉬기 위해서가 아니라 목회에 구멍(?)을 내고 바람을 빼기 위해서였다. 김동호 목사가 없어도 되는 그런 교회를 하기 위해서였다.

신임을 받은 6년 간은 교회의 대표로서, 담임목사로서, 위임받은 선장으로서의 리더쉽을 발휘하였지만, 재신임, 안식년과 같은 장치를 통해 교인들의 견제를 자초하였고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전임목사제도를 실시하여 담임목사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권력을 분산시키려 하였었다. 그리고 실제로 2009 1월을 기점으로는 아에 교회를 넷으로 분립하고 전임목사들에게 교회를 맡기고 나는 목회의 일선에서 물러났었다.

은퇴 후에는 원로제도를 없이함으로 높은 뜻의 가나안으로 입성하지 않고 높은 뜻 느보산으로 올라가 높은 뜻 교회에 대한 일체의 영향력에서부터 단절하였다.

높은 뜻 교회 장로는 6년 단임제이다.
장로는 직업이 아니기 때문에 정년제를 둔다는게 옳지 않다 생각하였다.
그냥 6년 만 교회에 봉사하고 자신의 소명인 직업에 충실하시라는 뜻에서 그렇게 하였다.
6년을 시무하고 시무를 끝내는 장로님들이 나오게 되었다. '무어라 불러야 하나?' 고민을 많이 하였다. 은퇴장로라 할까? 사역 장로라 할까? 장로님들이 기막힌 안을 들고 오셨다.

시무장로와 장로.

시무하는 장로에게만 시무장로라는 호칭을 쓰고
시무를 끝낸 장로에게는 그냥 장로라는 호칭만 쓰자는게 장로님들의 제안이셨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하셨다.
시무를 끝내시고는 실제로 교회의 당회원으로서의 모든 역할에서 물러나시고 손을 떼셨다.
은퇴식은 해드리려고 했었다. 그러나 장로님들이 사양하셨다. 그냥 마지막 예배 시간에 박수 한 번 쳐 주시고 기도 한 번 해달라 하셨다. 죄송했지만, 좀 섭섭했지만 그렇게 하였다. 전통이 되었다.

나도 은퇴식 없이 그렇게 은퇴하였다.

높은 뜻 교회에서는 목사든 장로든 주어진 기간과 주어진 역할에는 충성한다. 그러나 은퇴하면 끝이다. 그러면 다음 목사와 다음 장로가 또 주어진 기간과 역할에 충성하면 된다. 그리고 때가 되면 깨끗이 물러나면 된다.

2009
1월 높은 뜻 숭의교회에서 분립한 높은 뜻 정의교회가 2018 1월 첫 주일 또 분립을 하였다. 3천 명 출석교인 들 중 2천 명 정도가 높은 뜻 정의교회에 남고, 약 천 명 정도가 담임목사였던 오대식 목사와 함께 덕소로 나갔다. 높은 뜻 정의교회에는 새로운 목사가 청빙 되었다. 새로운 담임 목사가 청빙 되었는데 결정 될 때까지 오대식 목사도 몰랐고 물론 당연히 나도 몰랐다. 결정된 후에 와서 인사를 해서 인사는 받았다.

높은 뜻 교회의 전통은 충성한 후 뒷 끝을 남기지 않고 떠남이다. 마치 모세가 충성을 다 한 후 느보산으로 올라가듯. 목사만 그러는게 아니라 장로도 그런다. 그래서 결국 사람은 주인노릇 하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주인이 되시고 높힘을 받으시는 건강한 교회로 이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출처 : 삶과 신앙
글쓴이 : 스티그마 원글보기
메모 :  높은 뜻 교회의 목사와 장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