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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문화] 혐오가 갑질을 만날 때 / 김은형

성령충만땅에천국 2018. 1. 12. 17:32

[편집국에서] 혐오가 갑질을 만날 때 / 김은형

등록 :2018-01-10 18:03수정 :2018-01-10 20:36

 

김은형
문화스포츠 에디터

엊그제만 해도 가짜 페이스북 에피소드로 인종차별 논란의 도마 위에 올랐던 스타벅스에서는 심심치 않게 인종차별과 혐오표현 사건이 벌어진다. 지난달 중순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매장에서 미국 백인 여성이 한국말을 하던 한국계 학생들에게 “너네 말은 역겹다. 여기는 미국이니 영어만 써라”라고 행패를 부리는 게 동영상까지 공개되어 한국에서도 공분을 샀다.

이 동영상을 보면서 눈길이 갔던 건 혐오표현을 퍼붓던 사람이 아니라 그에게 “이들 학생은 원하는 언어로 말할 권리를 갖고 있다. 여기 있기 싫으면 매장에서 나가면 된다”며 나가달라고 요청한 직원의 대응이었다. 물론 문제의 인물은 계속 버티다가 경찰관이 온 다음에야 매장을 빠져나갔다. 문득 그 에피소드를 보면서 한국 매장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으면 어떻게 상황이 종결됐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남아 이주 노동자들이 스타벅스나 다른 커피숍에서 자기들 언어로 이야기할 때 나이 지긋한 한국인이 “너네 말은 역겹고 한국에서는 한국말 쓰라”고 땡깡을 놓았으면 직원이 나가달라고 했을까. 그 사람이 버티면 경찰까지 불렀을까. 그 외국인들이 자리를 옮기거나 알아서 커피숍에서 나가는 식으로 일이 마무리됐을 가능성이 먼저 떠오른다.

혐오표현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외면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현안이 되고 있다. 다인종 다문화 사회의 역사가 긴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헤이트스피치(혐오표현)가 사회문제가 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논쟁과 사회적 합의 과정을 오래 겪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혐오표현은 최근 몇년 새 폭발하는 양상이고 혐오의 갈래도 더 복잡한 형국이다. 얼마 전 출간된 혐오표현 연구서 <말이 칼이 될 때>에서도 지적했듯이 ‘맘충’이라는 말이 상징하는 아이엄마 비하는 혐오표현의 뿌리가 깊은 곳에서도 찾기 힘들다는 게 하나의 사례일 것이다.

혐오표현과 차별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지만 한국에서는 여기에 갑질문화가 한꺼풀 더 뒤섞여 있다는 게 또 다른 특징인 것 같다. 앞서 스타벅스 매장의 경우처럼 종업원이 잘못한 손님에게 나가달라고 요구하거나 제지할 힘이 우리 사회에서는 거의 없다. 백화점에서 이른바 ‘진상 손님’이 행패를 부리면 힘없는 직원이 무릎 꿇고 비는 풍경은 이제 드라마 속 주인공의 안타까운 처지의 클리셰가 되어버렸고 식당에서 아이가 소란을 피우거나 위험한 행동을 해도 직원이나 영세 사업자는 엄격하게 제지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이렇다 보니 일부 가게가 ‘노키즈존’이라는 극약처방을 내리자 ‘아이엄마=민폐’라는 식으로 여론이 순식간에 왜곡되면서 ‘맘충’이라는 혐오표현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모든 대화와 소통에서 갑을관계가 적용되니 그 서열 체계의 맨 아래 있는 사람들은 부당한 차별이나 혐오표현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가 없다. 얼마 전 어느 국립대학교 면접시험에서 교수가 내지른 “게을러서 뚱뚱한 거냐”, “홀어머니 아들들이 범죄율이 높다”는 등 모욕에 해당하는 명백한 혐오표현을 수험생들은 을의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갑질’로 삭이며 받아들여야 했을 것이다.

혐오표현을 규제하는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유럽의 여러 나라처럼 혐오표현금지법을 도입해 처벌할 수도 있고, 표현의 자유를 수정헌법 1조에 규정해 혐오표현도 원칙적으로 표현의 자유로 해석하지만 차별금지법 등을 통해 혐오표현과 소수자에 대한 공격을 막는 미국의 방식도 있다. 여기에 더해 가게 종업원이 손님의 부당한 요구를, 학생이 선생의 터무니없는 지시를, 말단 직원이 상사의 농담 같은 성희롱을 망설임 없이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최근 발생했던 기업 내 성폭력 사건처럼 부당함에 ‘감히’ 대응하는 을의 뒷감당이 본인 몫이 된다면 법과 처벌도 현실과는 멀기만 할 것이다.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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