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추가조사위원회가 22일 그간 조사 결과를 공개한 걸 보면 법원이 이렇게까지 타락했나 싶을 정도로 충격을 금할 수 없다. 대법원장의 사법행정 방침에 비판적인 판사들을 사찰한 것도 그렇거니와 특정 사건을 놓고 청와대와 뒷거래하다시피 한 정황을 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 판사들의 컴퓨터를 조사해 달라는 전국법관대표회의 요구를 극구 거부한 이유도 이제야 알 만하다.
조사위가 행정처 심의관이 사용하던 컴퓨터에서 확보한 ‘원세훈 전 국정원장 판결 선고 관련 각계 동향’ 문건에는 행정처와 청와대 사이에 오간 뒷거래 정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2심 선고 다음날인 2015년 2월9일치 문건엔 청와대가 선고 전 ‘무죄’를 기대하며 ‘법무비서관실을 통해 행정처에 전망을 문의’했고 선고 뒤엔 ‘우병우 민정수석이 큰 불만을 표시하며 재고의 여지가 있는 경우 상고심 절차를 신속하게 전원합의체에 회부해줄 것을 희망’했다고 돼 있다. ‘향후 대응 방향’으로 ‘상고심 판단이 남아 있어…대법원이 이니셔티브를 쥘 수도 있다’며 ‘상고법원과 관련한 중요 고비를 넘길 수 있도록 추진’할 것을 제안했다. ‘재판부 의중을 파악’해 알려주는 것도 문제지만 사건을 이용해 상고법원을 관철해보자는 건 판결을 미끼로 한 뒷거래나 마찬가지다.
더 심각한 것은 실제로 추진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법원…길들이도록(상고법원)’이라고 적힌 김영한 전 민정수석 업무일지처럼 청와대도 상고법원으로 거래하려 했던 것 같다. 대법원이 원세훈 사건을 이례적으로 전원합의체에 넘겨 주요 댓글의 증거능력을 부인하는 만장일치 판결까지 내렸으니 의심은 더 커진다.
행정처는 대법원장에 비판적이란 이유로 국제인권법연구회를 겨냥해 ‘중복가입 해소 조처’나 예산 삭감 방안을 논의하고, 판사들의 온라인 모임에 침투해 정보를 수집하고 무마책도 꾸몄다. 사법행정위원회 구성 과정에선 판사들의 ‘진보·보수’ 성향을 분석한 자료까지 제공했으니 분명한 사찰·탄압이 아닐 수 없다.
재판의 독립, 판사의 독립을 위해 애써야 할 행정처가 거꾸로 ‘사법부의 국정원’처럼 사찰과 뒷거래를 시도했다면 정확한 진상 규명과 법적·행정적 책임 소재를 가리기 위해 새로운 차원의 수사와 조사가 불가피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