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11일, 남양주시 별내에 있는 범하 이돈명(凡下 李敦明) 선생 묘소에 다녀왔다. 올겨울 들어 가장 추웠던 그 날이 바로 이돈명 변호사의 서거 7주기 날이었다. ‘인권변론 한 시대’를 이끌었던 이돈명 변호사와 나와는 남이 모르는 사연이 하나 있다.
1986년 5월 3일의 인천사태로 많은 사람이 수배되어 쫓기고 있었다. 그때 이부영이 내게 찾아와 은신처를 부탁했다. 서둘러 마련한 것이 고영구 변호사의 집이었다. 고 변호사는 거리에 나가 직접 민주화 투쟁을 대놓고 못 하는 것이야 부끄럽지만 그만 일이야 왜 못하겠냐면서 선선히 받아주었다. 이따금 밖에서 만나면 이부영의 신수가 훤했다. 이돈명 변호사가 감옥에 간 사연 그렇게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이부영이 나를 찾아와, 나중에 자신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자신이 있던 곳을 고영구 변호사댁이 아닌 다른 곳으로 할 수 없겠느냐고 심각하게 물어왔다. 고영구 변호사는 팔십이 넘은 노모를 모시고 있는데다 그 부인이 신경성 위경련을 앓고 있어, 만약 자신으로 하여 고영구 변호사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기면 온 집안이 풍비박산될 것이 뻔해 두렵다는 것이었다.
그 얼마 뒤 이돈명 변호사를 만났을 때 나는 이부영과 관련된 전후 사정을 말씀드리고, “선생님 댁에 있었던 것으로 할 수 있을까요”하고 여쭈었더니, 선생은 대수롭지 않게 “그렇게 하지 뭐” 하시는 것이었다.
그해 늦가을이었다. 이부영이 나를 찾아왔다가 체포되었다. 이부영은 그동안 이돈명 변호사댁 2층에서 기거했고, 잡힐 때 가지고 있던 얼마간의 돈은 나 김정남으로부터 제공받은 것이라고 진술하여, 이돈명 변호사는 범인은닉 혐의로 연행되고, 나는 공개수배되는 몸이 되었다. 고령과 명망으로 구속은 면할 수 있지 않을까 했던 이돈명 변호사가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나는 이돈명 변호사 댁에서 그날 TV 뉴스로 들었다. 그날 밤, 경찰이 온 집안을 포위하고 수색했다. 나를 잡으러 왔을 것이 분명한 그들을 나는 안방 화장실에 숨어 가까스로 따돌렸다.
다음날이던가 나는 남아있는 인권 변호 3인방인 조준희, 홍성우, 황인철과 고영구 변호사를 만나 대책을 협의했다. 고영구 변호사는 자신이 스스로 나가 모든 것을 밝히고 들어가겠노라 했고, 다른 변호사들은 그렇게 한다고 해서 이미 범인은닉 혐의를 시인하고 구속된 이돈명 변호사를 그들이 순순히 풀어줄 리 없다면서, 두 사람이 구속되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 구속되는 것이 낫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때 우리 모두는 울고 있었다. 결국 이돈명 변호사는 감옥에서, 고영구 변호사는 그것이 죄송스러워 불기 없는 냉방에서 그해 겨울을 났다.
이돈명 변호사는 재판에서 자신이 이부영을 숨겨준 행위는 양심에 비추어 결코 부끄럽지 않다고 진술했다. 8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항소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가톨릭 신자로서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것을 놓고는 무척 괴로워했다. 1987년 5월, 출감한 뒤에는 6월 항쟁의 중심으로 뛰어들었다. 뒷날 고영구 변호사가 국정원장에 지명되었을 때, 한나라당 의원들은 그가 이부영을 숨겨준 것을 집요하게 트집 잡았다. 전병용의 최후진술 이부영이 고영구 변호사댁으로 은신처를 옮기기 전에는 여러 곳을 전전했는데, 그 가운데는 연희동 전병용의 집도 있었다. 그것이 발각돼 전병용은 나보다 먼저 범인은닉 혐의로 쫓기고 있었다. 전병용은 “교도관의 인권 없이 재소자의 인권 없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교도관의 처우개선 운동을 벌이다 해직된 뒤 자신의 집을 민주인사들에게 개방해 돕고 있었다. 나는 한때 그와 함께 도피생활을 하기도 했다.
1987년 3월 중순, 나는 미국에 이민 가있던 6·3사태 연세대 주역 이영철이 와서 그와 함께 남부터미널 인근의 유원호텔에서 밤을 새우고 그 이튿날 전병용에게 전화로 안부를 물었다. 전병용은 안 그래도 꼭 전해야 할 것이 있다면서 득달같이 달려와 내게 전한 것이 “우촌(友村) 보게”로 시작하는, 감옥에서 보낸 이부영의 편지였다. 나에게 그 편지를 보낸 하루인가 이틀 뒤인 3월 17일, 전병용은 체포되었다. 6월 항쟁이 승리로 끝날 무렵, 전병용은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그의 최후진술은 지금도 전설로 남아 많은 사람에게 울림을 주고 있다.
“어쩌면 지금쯤 나는 어느 교도소의 교도관으로서 재소자들을 감시하고 감독하는 평범한 공무원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죄수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도대체 죄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자의 낙인이 찍혀 징역살이를 하는 수많은 노동자, 지식인, 민주인사들을 만나면서 나는 부패한 독재권력의 하수인으로 남기를 거부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의 억압과 천대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죄인이 되곤 하는 저 억울한 민중의 편에 굳게 서야 한다는 결심을 서서히 굳히게 되었습니다. … 나는 내가 한 일에 대해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부영이 또다시 나를 찾아온다면 언제든지 반갑게 맞이할 것입니다. 불의와 맞서 싸우는 사람들에게 우리 집의 대문은 항상 활짝 열려있습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이 땅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서 어떤 일이라도 기꺼이 수행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