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뉴스분석 왜?
서지현 검사에게 띄우는 공개편지
서지현 검사에게 띄우는 공개편지
미국에서 시작된 미투(#MeToo) 운동에 앞서 2016년부터 존재했던 #문단내성폭력, #예술계내성폭력 등의 역사가 이어져 #검찰내성폭력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래픽 출처: @all_womankind
▶지난 29일 서지현 창원지검 통영지청 검사가 검찰 내부통신망에 글을 올려 검찰 고위 요직을 지낸 인사의 성추행 사실을 알렸다. 고위 남성 검사의 성범죄는 반복돼 왔으나 그 고리는 끊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성범죄 피해 사실을 공론화하면 돌아오는 건 근거 없는 인식공격성 마타도어(흑색선전). 서 검사도 예외 없이 겪고 있다. 한 언론사 여성 기자가 힘을 보태고 싶다며 서 검사에게 띄우는 공개편지를 보내왔다. 그는 스스로를 고위직 남성 검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던 ‘피해자’라고 밝혔다.
서지현 검사님께
차마 ‘안녕하세요’라는 문장으로 안부를 묻지 못하겠습니다. 대신할 말이 지금은 떠오르지 않네요. 그 어떤 무엇보다 서 검사님의 몸과 마음의 건강이 굳건하게 버텨주길 바라는 마음이 가장 앞섭니다.
저는 한 언론사에서 일하는 여성 기자입니다. 고위직 남성 검사의 성추행 사실을 알린 서 검사님의 글이 담긴 기사를 1월29일 아침에 보고난 뒤 분노가 일어 심장이 크게 뛰는 것을 느꼈습니다. 눈물이 날 듯했지만 울지 않았습니다. 대신 주먹을 꽉 쥐었습니다. `문이 열렸구나’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29일 하루 종일 머릿속에 너무 여러 생각이 떠올라 어지러웠습니다. 지난 기억과 분노가 덮쳐오는 한편, 에스엔에스(SNS) 등을 통해 전해오는 여러 여성들의 서 검사님을 향한 응원과 공감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습니다. 그러던 중 그날 저녁 서 검사님의 방송 인터뷰를 봤습니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8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성범죄 피해자들이 자신의 탓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하셨죠. 어지러웠던 머릿속이 정리되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할 수 있는 걸 해야겠다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뿐입니다. 저의 경험을 털어놓는 것. 그렇게나마 서 검사님의 앞에 놓인 날들이 지난 8년보다는 덜 외롭길 바랄 뿐입니다.
어떤 ‘전형성’을 발견했기 때문이지요
저는 고위직 남성 검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피해자입니다. ‘피해자’. 스스로를 이 단어로 표현하길 주저하지 않는 데도 한참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제가 겪은 일들과 그간의 경과는 언론에서 크게 다뤄졌습니다. 4년1개월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법조계 출입 기자로 검찰 취재를 담당했던 저는 2013년 12월26일 송년회 자리에서 이진한 전 검사(당시 서울중앙지검 2차장검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했습니다. ‘여기자 성추행 사건’으로 알려진 내용입니다.
앞 문장을 쓰고 크게 심호흡을 몇 번을 하고 서성거리다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습니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괜찮지 않네요. 아직까지도 당시 이진한 전 검사의 행동을 묘사하는 게 힘듭니다. 저는 서 검사님께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제 이야기를 스스로 쓰는 것이 괜찮을 줄 알았습니다. 4년 전의 일을 묘사하는 것쯤은 큰일이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괜찮지 않은 상태에서 글을 쓰는 게 자꾸 망설여지는 가운데 떠오르는 건 서 검사님이 피해 사실을 글로 정리하면서 느꼈을 괴로움입니다. 서 검사님이 고위직 남성 검사의 성추행 사실을 알리고 또 일상적으로 남성 검사들이 저지르는 언어적 성폭력을 고발하기 위해 글을 쓰시는 중의 괴로움은 가늠이 되지 않네요. 그 괴로움과 외로움의 깊이를 떠올려보고야 ‘서 검사님과 함께 문을 열어야 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마음을 겨우 다잡았습니다.
서 검사님이 입은 피해에 대한 내용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고위 남성 검사 성추행에 어떤 ‘전형성’을 발견했기 때문이지요. 성추행을 저지르고도 남의 눈길을 개의치 않는 ‘대담함’(?)과 성범죄 가해 남성이라도 별일 없으리라는 ‘믿음’을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우연이겠지만 안태근 전 검사와 이진한 전 검사의 행위는 놀랍도록 비슷했습니다. 단둘이 있었던 자리가 아닌, 공개된 자리에서 너무도 대담하게 성추행을 저질렀지요. 게다가 세부적인 행동마저 유사해 소름이 끼칠 정도였습니다.(이 부분은 굳이 쓰지 않으려 합니다. 서 검사님에게나 저에게나 사건 장면을 떠올리게 되는 묘사는 크게 중요한 게 아닐 테니까요.) 이들의 대담함은 자신이 가진 힘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 이들에게서 나오는 것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내가 여성의 몸을 이 정도는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힘이 있지!’라는 생각에서 오는 대담함 말이죠. ‘에이, 뭐 별일 있겠어?’라는 성범죄 가해자들의 믿음도 같은 뿌리에서 나오는 것이겠지요.
저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더군요
저는 다행스럽게도 회사 동료들의 지지를 얻어 피해를 입은 바로 다음날 문제 제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내부고발자인 서 검사님과 검찰 밖 언론계에 몸담은 제 경험을 감히 ‘비슷하다’고 말할 수 없다 여기는 지점입니다. 동료 검사들마저도 “어차피 저들을 이길 수 없다. 입 다물고 근무해라”고 말하는 환경에서 느꼈을 암담함의 깊이는 어땠을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공론화 뒤 여성계, 언론계에서 지지의사를 담은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지지는 분명히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검찰청 감찰본부는 각계의 엄중 조사 및 징계 촉구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사안이 경미하다며 이진한 전 검사에게 ‘감찰본부장 경고’ 처분이라며 2014년 1월 약한 수준의 징계를 결정했습니다.
화가 나기보다 맥이 풀렸습니다. 도대체 검찰은 젠더 감수성과 성희롱 예방에 있어서 어떤 수준의 조직이길래 ‘별일 아니라는 식’인 거지? 도대체 검찰이라는 조직은 성범죄에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는 거지? 여러 날을 잠들지 못했습니다. 그 뒤로 저는 2월 서울중앙지검에 이진한 전 검사가 강제추행을 한 사실과 강한 처벌 의사를 밝히며 고소장을 제출했습니다.
‘고소까지 할 일인가?’라는 자문을 수없이 했습니다. 그러나 남성 검사들이 기자를 비롯한 여성에게 얼마나 일상적으로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저지르는지를 알게 되고서 멈출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진한 전 검사의 성추행 사실이 알려지자 여성 기자 2명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모두 이진한 전 검사로부터 언어적 성희롱을 당한 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너무 힘든 일인데 이렇게 나서줘서 고마워요.” 다른 피해 여성 중 한 명이 저에게 건넨 말입니다.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가장 많이 울었던 때였습니다. 멈추지 않고 싸워야겠다고 마음먹은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이진한 전 검사에 대한 저의 강력한 처벌 의사는 고위급 남성 검사를 건드리는 것을 부담스러워한 검찰 앞에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성추행이 있은 지 2년이 다 되어가는 2015년 11월, 이진한 전 검사를 고소한 사건을 배당받았던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는 무혐의 처분을 내렸습니다.
이렇게 저의 이진한 전 검사 성추행 사건 공론화와 고소는 끝났습니다. 아니, 끝인 줄 알았습니다. 네, 저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더군요. 이진한 전 검사의 성추행 사실을 알린 뒤 자책하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내 잘못은 하나도 없다’ 새기고 또 새겼습니다. 그러나 그런 다짐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 여러번 찾아왔습니다. 여러 통로를 통해 말도 안 되는 마타도어(흑색선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타도어는 역시나 서지현 검사님의 검찰 내 성추행과 성폭력 공론화 뒤에도 어김없이 등장하더군요. 서 검사님을 향한 마타도어의 내용을 보니 고위급 남성 검사들의 성추행이 전형성을 띠었듯, 성범죄 가해자를 감싸고 피해자를 음해하는 마타도어도 ‘따로 관용구가 있는 것 아닐까?’ 할 정도로 비슷한 논리 구조를 갖고 있었습니다.
서 검사님이 활짝 젖힌 문이 닫히지 않게
여럿이 함께 발을 걸 겁니다
닫힐라치면 발뿐만 아니라 온몸을
밀어넣어서라도 막아야겠죠
집요하게, 끝까지 말이죠
여럿이 함께 발을 걸 겁니다
닫힐라치면 발뿐만 아니라 온몸을
밀어넣어서라도 막아야겠죠
집요하게, 끝까지 말이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심 가져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서 검사님의 요청에 대한 답이 될까요?
관심 가져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서 검사님의 요청에 대한 답이 될까요?
성범죄 피해 사실과는 아무런 관련 없는 사안을 끌고와 피해자의 인성 또는 실력을 알량한 세 치 혀로 쉽게 평가하는 이들이 그득하더군요. 저는 이진한 전 검사 성추행 사건 공론화 뒤 “그 기자가 일하던 신문사랑 이진한 검사가 사이가 안 좋았다지. 그래서 그걸로 이 검사 발목을 잡으려던 거 아닌가 싶어” “기자가 기사로 실력을 보여야지, 검사 한 명 잡는 걸로 실력을 보여주려고 하다니…” 등등의 말들이 검사들 사이에 아무렇지 않게 오간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이○○ 기자에게 상황이 별로 안 좋게 굴러간다. 기자들도 검사들 마타도어에 동조하기도 한다고 하고….” 동료 기자로부터 일부 남성 기자들의 동향도 전해 들었죠. 당시 아무런 이야기를 보태지 않았습니다. 대응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가 분명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퍼트리며 이진한 전 검사를 감쌌던 검사들과 그 이야기를 듣고도 침묵하거나 동조했던 기자들이 양심의 가책을 조금이라도 느끼길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서지현 검사님을 향해 근거 없는 흑색선전을 퍼트려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키고, 검찰 조직의 문제를 없는 일로 만드려는 시도를 하는 검사들은 제발 부끄러움을 느끼길 바랄 뿐입니다. 검찰 조직은 조직 내 성범죄 처분 및 처벌에 있어 상당히 수준이 낮은 조직인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응원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길 바랍니다
1일 오전 이 글을 쓰고 있는 중 서 검사님이 대리인을 통해 내신 입장문을 읽었습니다.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이야기했을 때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합니다. 폭력 피해자에 대한 편견 깨기, 성폭력 범죄에 대한 편견 깨기부터 시작되면 좋겠습니다.” 담담한 문장으로 쓰인 서 검사님의 입장문이 저는 왜 이렇게 절박한 느낌일까요? 서 검사님이 터널에서 나와 실제 이름을 내걸고 공론화해 많은 지지와 응원을 받게 됐지만, 그와 동시에 온갖 음해에도 노출됐다는 데 생각이 미쳐서일까요? 서 검사님께 가닿는 비방의 목소리를 다 막을 수 없지만, 성범죄가 만연하고 일상적인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서 검사님을 응원하고 있는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길 바랍니다.
서 검사님이 올리신 이프로스의 글 끝의 해시태그를 보고 살짝 반가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검찰내성폭력’을 보고서요. 미국에서 시작된 미투(#MeToo) 운동에 앞서 2016년부터 존재했던 #문단내성폭력, #예술계내성폭력 등의 역사가 이어져 #검찰내성폭력까지 이어지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죠.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었을 ‘#○○내성폭력’ 운동의 주체들에게는 또 다른 연대의 주체가 등장해 조금이라도 더 힘을 내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또 서 검사님이 외롭지 않게 싸울 수 있는 든든한 뒷배가 되기를 바라봅니다.
서지현 검사님, 검사님의 고위 남성 검사의 성범죄 사실 공론화로 ‘문이 열렸다’는 표현을 앞서 썼습니다. 지난해 말 미국 할리우드의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의 성폭력 사실이 여성 배우들의 용기있는 고발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그 일이 있은 뒤 메릴 스트립이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죠. “지금은 정말 가슴이 뛰는 순간이에요. 이 문은 닫히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그 문에 발을 걸고 있으니까.” 서 검사님이 활짝 젖힌 문이 닫히지 않게 여럿이 함께 발을 걸 겁니다. 닫힐라치면 발뿐만 아니라 온몸을 밀어넣어서라도 막아야겠죠. 집요하게, 끝까지 말이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심 가져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서 검사님의 요청에 대한 답이 될까요?
저는 많은 노력을 한 뒤 지금은 여러모로 건강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성추행 사건이 있었던 뒤로 내내 몸과 마음의 상태가 좋았다고 말하기는 어렵고요. 무너진 몸과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 애써야 했던 시간이 참 길었습니다. 이제는 스스로 많이 ‘건강해졌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가 됐습니다. 그래서 염려되고, 다시 한 번 꼭 전하고 싶은 말은 부디, 꼭 몸과 마음이 건강하시길 바란다는 말입니다. 쉽지 않을 것이지만요. 여럿이 오래 힘을 내야 할 일이니 혼자 모든 짐을 지지 마시고 함께 나눠 들었으면 합니다. 언젠가 서지현 검사님을 직접 뵙게 될 날을 상상해 봅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는 떠오르지 않은 채, 상상만 했는데 눈물이 먼저 차오르네요. 뵙는 날 검찰의 성범죄 문제에 대한 태도와 조직문화가 지금보다 좋은 방향으로 바뀌어 있길 기대해봅니다. #MeToo #검찰내성폭력
한 언론사에서 일하는 여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