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의 ‘문고리 3인방' 중 한 명인 안봉근 전 청와대비서관이 2017년 10월31일 긴급체포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으로 소환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지난달 25일 오전, 서울중앙지법 417호 형사대법정에서 열린 박근혜 전 대통령 재판에선 ‘최순실의 간식시간’이 화두로 떠올랐다.
“증인은 ‘주말에 대통령께 보고하러 갔다가 최순실씨를 봤고, 최씨랑 같이 과일을 먹은 적 있다’고 검찰에서 진술한 적 있죠?”(강철구 변호사·박근혜 전 대통령 국선변호인)
“네.”(이재만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보고를 마친 뒤 일요일에 최씨와 같이 식사한 적이 있나요?”
“같이 식사한 기억은 없습니다.”
“왜 식사를 안 했나요? 보고가 늦어지고 최씨가 같이 있으면 식사를 했을 것 같은데요.”
이날 법정을 달군 주제는 최순실씨의 주말 청와대 방문. 이 전 비서관이 박근혜 전 대통령 재임 시절 매주 일요일 오후 3시쯤 청와대 대통령 관저를 찾아 업무보고를 했는데, 이때 최씨가 내실을 드나드는 걸 봤다는 증언을 내놓은 게 발단이었다. 이 전 비서관이 “최씨랑 과일을 같이 먹은 적도 있고, 최씨가 정치 기사에 관심이 있어서 정치 얘기 하는 걸 듣기도 했다”고 말하자, 강 변호사는 “과일은 먹었는데 왜 식사는 안 했냐”고 캐물었다. 이 전 비서관은 잠시 헛웃음을 토해내더니 “보고를 일찍 마치면 그냥 내려갔고, 보고가 늦어지면 관저에서 밥을 먹었을 뿐이다. 변호사님 질문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고 답했다.
하지만 강 변호사는 멈추지 않았다.
“대통령이 최씨와 식사하는 걸 본 적 있나요?”(강 변호사)
“제 기억엔 없습니다.”(이 전 비서관)
“식사하지 않은 이유가 뭔지 알고 있습니까?”
“저한테 질문하실 내용은 아닌 것 같습니다.”
“관저는 보안이 되는 장소인데, 관저 내에서 대통령과 최씨가….”
이때 보다 못한 서울중앙지법 형사22부의 재판장 김세윤 부장판사가 교통정리에 나섰다.
“변호인, 식사한 걸 본 기억이 없다고 증인이 명백히 얘기했습니다. 이 부분은 생략해도 될 것 같습니다.”(김 부장판사)
‘문고리 권력’ 위에 최순실 최씨와의 식사가 도대체 뭐기에 강 변호사는 사활을 걸까. 박 전 대통령의 공소장을 살펴보면, 강 변호사의 궁금증이 아주 근거 없진 않다. 최씨가 박 전 대통령 최측근인 비서관들과 교류하고 겸상까지 할 정도로 관저를 편하게 드나들었다면, 이는 최씨와 박 전 대통령이 그만큼 가깝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뇌물과 직권남용 등 11개 혐의에서 최씨와 공범으로 엮인 박 전 대통령으로선 혐의를 조금이라도 다투기 위해선 최씨와 공모했다는 ‘대전제’부터 뒤흔들 필요가 있다. 이 때문에 지난달 16~25일 박 전 대통령 재판 증인으로 나온 정호성·이재만·안봉근 전 비서관은 최씨의 관저 방문 날짜와 시간, 출입 방식과 동선, 식사 여부에 대한 검찰과 변호인의 질문 공세를 받았다. 특히 의뢰인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 국선변호인들은 재임 기간 내내 박 전 대통령을 밀착 수행한 세 비서관에게 물을 게 많았다. 이 전 비서관보다 사흘 앞서 박 전 대통령 재판에서 증언한 안봉근 전 청와대 제2부속비서관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증인이 보기에 최씨가 관저에 출입한 횟수가 어느 정도 됩니까?”(검사)
“제가 세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몇번이라고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횟수는 좀 많았던 것 같습니다.”(안 전 비서관)
“증인은 이재용(삼성전자 부회장) 사건에서 ‘평일보다 주말에 방문이 많았다’고 증언했어요. 실제 주말에 최씨를 관저에서 자주 목격했던 건 맞습니까?”
“네.”
“증인이 정호성·이재만 비서관과 대통령에게 보고드릴 때도 최씨가 같이 있었습니까?”
“처음부터 쭉 같이 있었던 건 아니고요. 보고드리는 장소를 왔다 갔다 한 걸로 기억합니다.”
“보고를 마치고 나올 때 최씨가 같이 나오지 않았던 거죠. 증인이 최씨가 먼저 나가는 걸 본 적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증인이 관저에서 머문 시간보다 최씨가 머문 시간이 더 많았단 건가요?”
“저희보다는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세 전직 비서관들이 대통령의 일정과 동선 및 업무 내용을 보고하는 동안 최씨가 아무런 통제도 받지 않고 관저를 들락날락했고, 한번 들어오면 비서관들보다 더 오래 머물렀다고 입 모아 말했다. 민간인인 최씨가 업무보고 자리에 동석하다시피 했단 얘기에 검사도 판사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대통령이나 비서관들이 최씨에게 ‘우리끼리 대통령께 일정을 말씀드리고 보고를 드려야 하니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진 않았습니까?”(검사)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안 전 비서관)
“대통령도 최씨에게 나가라고 한 적 없어요?”
“듣지 못했습니다.”
“증인이 대통령한테 보고하는 자리에 최씨가 함께 있던 경우가 있었다는 거죠?”(조국인 판사)
“네.”(안 전 비서관)
“그게 부적절하다고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부적절하다기보다는, 최씨가 뭘 잠깐 챙기러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로서는 보고에 집중하다 보니 특별히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잠시 동안 법정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최씨는 무슨 권한으로 대통령 관저를 제집처럼 수시로 드나들 수 있었을까. 국정농단 의혹이 제기된 직후인 2016년 12월 국회 청문회에서 이영석 당시 청와대 경호실 차장은 “최순실은 보안손님”이라며 “(청와대) 부속실의 요청이 있으면 보안손님이 되는데, 부속실에서는 (경호실에 보안손님의) 신원을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누군지 알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안 전 비서관은 지난달 25일 법정에서 ‘보안손님’의 존재를 부인했다. 그는 “제가 있을 때 보안손님이란 용어를 얘기한 사람은 없다”며 “(관저 출입 시) 검문검색을 받지 않는지 항상 체크하는 게 아니라서 (최씨의 검색 여부도) 보지 못했다”고 했다.
다만 세 전직 비서관이 최씨의 존재를 오래전부터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호성은 최씨에 대해 ‘오랫동안 뒤에서 도운 사람이고 여자라서 돕는 사람’이란 취지로 얘기했습니다. 증인이 보기엔 어떤가요?”(강철구 변호사)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안 전 비서관)
“증인이 보기에 최씨는 대통령에게 어떤 존재였나요?”(강 변호사)
“의상을 주로 담당을 해서 도와드렸던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이 전 비서관)
최씨에게 박 전 대통령의 연설문이나 일정표를 보내준 정 전 비서관도 최씨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깍듯하게 대했다. 그는 검찰에서 “최씨가 대통령님이 하시는 국정 전반에 대한 말씀 자료를 수정할 능력은 없었다”면서도 “(박 전 대통령의) 속마음을 잘 알고 있는 분이기 때문에 의견을 구하는 차원에서 최씨 도움을 받은 것”이라고 인정했다. ‘보안손님’, ‘의상 도우미’, ‘속마음을 아는 분’ 등 최씨를 설명하는 말은 다양하지만, 적어도 최씨가 박 전 대통령의 일상은 물론 국정에까지 속속들이 개입할 정도로 가까운 관계로 비선 권력을 갖고 있었던 것은 비교적 분명해 보인다.
“대통령님께서는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고생하더라도 정말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하자’고요. 흑흑. 대통령님께서는 정말 열심히 정책도 만들고, 국가와 미래를 위해 열심히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이재만 전 비서관)
지난달 25일 재판은 이 전 비서관이 갑작스레 눈물을 쏟으면서 황급히 마무리됐다. 20여년간 박 전 대통령을 보좌한 이 전 비서관의 ‘충성심’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박 전 대통령은 공과 사가 분명하신 분이기 때문에 최씨가 대통령에게 사적인 부탁을 할 정도로 친분관계가 긴밀했다고 보긴 어렵다”는 생각만큼은 스스로 내놓은 증언과도 배치되는 측면이 있다.
이재만·안봉근이 입을 여는 이유‘국정농단’ 재판을 지켜보던 이들에겐 세 전직 비서관이 잇달아 박 전 대통령 재판에 증인으로 선다는 소식 자체가 화젯거리였다. 일찌감치 공무상 비밀누설 혐의로 구속기소된 정 전 비서관과 달리, 안봉근·이재만 전 비서관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법기관에서 ‘모시기 힘든 분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2016년 말 ‘국정농단’ 국회 청문회 때 불출석하며 ‘맹탕 청문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지난해 초 헌법재판소 탄핵심판 때도 증인으로 채택되고도 번번이 잠적해 심리 지연에 한몫했다. 이들은 지난해 7월 국회 불출석 혐의로 재판에 넘겨지긴 했지만, 첫 공판에서 혐의를 모두 인정한 바람에 언론의 카메라 세례를 받으며 수차례 법정에 출석하는 일도 피했다.
1년간 좀처럼 외부에 노출되지 않던 두 전직 비서관은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에 발목이 잡혔다. 이들은 박 전 대통령과 공모해 국정원으로부터 35억원 특활비를 상납받은 혐의(국고손실·뇌물수수, 이 전 비서관은 33억원) 등으로 구속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피고인 신분으로 형사 법정에 서게 되자, ‘국정농단’ 의혹을 밝힐 결정적 순간에 침묵하던 두 전직 비서관의 입이 열렸다. 박 전 대통령 당선일로부터 꼭 5년 되는 날이던 지난해 12월19일 열린 첫 공판에서 두 전 비서관은 나란히 ‘윗선’인 박 전 대통령을 책임자로 지목했다.
이재만 전 청와대 비서관이 2016년 11월14일 오전 서울 서초구 중앙지검으로 들어서면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피고인은 대통령 지시에 따라 국정원에서 온 청와대 지원자금을 수용하고 보관했을 뿐입니다. 국정원 자금이 어떤 경위로 지원됐는지, 출처가 국정원장 특별사업비였는지는 알지 못했습니다.”(이 전 비서관 변호인 정성엽 변호사)
“처음에 대통령님께서 (국정원에서) 봉투가 오면 받으라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봉투 안에 있는 내용물이 무엇인지는 제가 알지 못했습니다.”(이 전 비서관)
“특활비가 국정원장이 청와대에 지급하는 뇌물이란 걸 몰랐습니다. 뇌물수수의 종범이나 전달자에 불과할 뿐, 공범엔 해당하지 않습니다.(안 전 비서관 변호인 김주식 변호사)
자신이 모든 부담을 떠안지 않기 위해 대통령에게 일정 부분 책임을 미루는 건 일견 합리적인 변론전략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고리 권력’으로 불릴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가진 비서관들이 단순히 “대통령의 지시에 따랐다”고 항변한다고 해서 형사책임을 면제받을 수 있을까? 이제껏 국정농단 사건에 대해 사법부가 내려온 판단을 보면 그다지 쉽지 않아 보인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그를 보좌하는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피고인 김기춘은 헌법을 수호해야 할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대통령, 그리고 그를 보좌하는 참모진의 수장인 비서실장으로서 헌법과 법률이 부여한 막대한 권한을 남용했다. 나머지 피고인들 역시 수석비서관, 비서관, 장관이라는 정부의 핵심적 위치에 있는 고위공직자로서 그들이 부여받은 직무권한을 남용해 대통령과 비서실장이 지시한 위헌적이고 위법한 행위를 그대로 수행했다.”
지난달 23일 서울고법 형사3부(재판장 조영철)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1심과 달리 박 전 대통령이 지원 배제 행위에 공모했다고 인정했다. 그렇다고 해서 참모진의 책임이 가벼워진 것은 아니었다. ‘좌파 배제, 우파 지원’이란 국정 기조를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하던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형은 징역 4년으로 1심보다 1년 더 늘어났고, 1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현소은 기자
son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