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광주에 강연하러 갔던 길에 송정역 근처 시장에 들렀다. 그때 동행해줬던 고마운 지인이 한 골목길에서 “이곳은 직업여성들이 살던 곳”이라고 소개해 주었다. 그 말을 들으며 “저도 직업여성인데요”라고 답했다. 순간 우리는 세월따라 흐르는 언어 변화를 느끼며 같이 웃었다. 실제로 ‘직업여성’은 “주로 유흥업에 종사하는 여성을 완곡하게 이르는 말”이라고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여전히 설명하고 있다.
한파를 뚫고 직업여성들이 당한 직장 내 성폭행 고발이 사회 전 분야로 퍼져나가고 있다. 민망하고 버거워도 SNS를 타고 퍼져나가는 #미투 파장은 성 평등 사회로 가는 청신호이다. 부당하게 당한 피해를 고발해도 그에 대한 적법한 조사와 처벌을 못해온 관습적 병폐도 드러나는 중이다. 가해자는 잘 나가고 피해자는 박해받고 서지현 검사의 성추행 폭로 사건은 이런 관습적 병폐의 정황을 보여준다. 그는 검찰 내부망에 올린 글에서, 자신의 고백을 ‘극단적인 과격한(?) 방법’이라고 설정한 뒤, 관점 변화과정을 설명해 나간다. “거대한 권력을 거머쥐고, 어떠한 짓도 서슴지 않는 그들, 정권이 바뀌어도 항상 코어 1%의 흔들리지 않는 위치를 차지하고(…) 힘없고 빽없는 일개 검사의 절규 따윈 비웃으며 무시하는 그들”이라고 검사 집단의 정체성을 묘사한다. 안태근 검찰국장의 성추행 사실을 알려도 주위사람들이 말리며 했던 말도 인용된다. “지금 떠들었다가는 그들은 너를 더더욱 무능하고 문제 있고 이상한 검사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입 다물고 그냥 근무해라.”
특권층 내부 비리를 폭로하며 화제를 모았던 범죄스릴러 〈내부자들〉(2015, 우민호)의 한 대목을 보는 것만 같다. “돈 없고 빽 없으면 나가 뒈지세요. 참 좋은 나라야, 대한민국”이라고 했던 우장훈 검사(조승우)의 대사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봉건적 위계질서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현실을 자양분으로 삼는 허구적 상상력의 메커니즘이 새삼 확인되는 순간이다.
묵묵히 일하며 체념하기도 했던 그는 가해자는 잘 나가고, 피해자는 박해받는 8년의 아픔을 토로한다. 자신의 순진무구함을 뉘우치며. #미투운동에 자극받아 또 다른 피해 방지를 위해 공론의 장에 들어서는 용기를 낸 것이다. 정의를 집행해야 하는 검사조직의 부정의한 작동방식이 실화로 들통 나버린 셈이다. 위기에 처한 검찰은 “성추행사건 진상규명 및 피해회복조사단”을 출범시켰고, 법무부는 “성희롱·성범죄 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검찰 전반에 걸친 성희롱·성폭력 문제를 최초로 직권조사하기로 의결하면서, 남성위주 조직 문화적 특성을 지적하고 있다.
남녀유별이 남녀차별로 해석되고 피해자 여성을 꽃뱀에 비유하는 낡은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21세기 성평등 관계망으로 변화해가는 파장이 예감된다. 그런 희망을 안고, 1984년 미국 최초의 직장 내 성폭력 승소사건인 '젠슨 대 에벨레스 광산'을 영화로 담아낸 〈노스 컨츄리〉(2005, 니키 카로)를 다시 보며, 피해자이거나 피해자와 연대하는 분들께 강추하고 싶다. 〈노스 컨츄리〉, 미국 최초 직장 내 성폭력 승소사건 조시(샤를리즈 테론)는 폭력남편과 이혼한 후, 두 아이를 데리고 고향인 미네소타 북부로 돌아온다.(미네소타주는 알래스카주를 제외한 미국 본토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주이기에 영화 제목을 또 다른 ‘가부장 나라’로서 ‘노스 컨츄리’라 붙인 듯하다) 아이들 생계도 책임진 조시는 광산에 취업한다. 전통적으로 남성 직장이었던 광산이 철강에 치여 쇠락해 가는 중인데다 여성까지 들어와 일자리를 빼앗긴다고 생각한 남성들은 여성을 동료로 대하지 못한다.
탄광벽에 난무하는 여성폄하적 음담패설 낙서와 농담도 그들에겐 일상적 스트레스 해소책처럼 작동한다. 그런 농담도 소화해내는 ‘유머감각’을 가져야 한다, 라고 조시에게 훈계를 주기도 한다.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 뭐….”하며 서로 봐주는 ‘그들만의 세상’이다. 그 와중에 갱도에서 강간당한 조시는 사장과 노조에 성폭력을 고발하고 해결책을 호소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얼굴에 철판 깔고 견뎌야지 저항하면 쫓겨난다, 라고 충고하는 여성 동료는 성추행을 당해도 침묵을 선택한다.
그러나 침묵을 깬 조시는 불량한 꽃뱀이란 풍문에 시달리며 충격 받은 아이와의 갈등으로 2차, 3차 피해를 당한다. 그런 고통을 디딤돌 삼아 더욱 용감해진 조시는 도시에서 실패를 겪고 귀향한 변호사 빌(우디 해럴슨)과 함께 직장 내 성차별 집단 소송을 처음으로 제기하게 된다. 그 용기에 자극받은 소수 동료들, 특히 루게릭병을 앓는 글로리 (프란시스 맥도맨드)가 온몸으로 증언하는 법정 장면은 연대의 힘을 보여준다. 그 승리의 기록은 #미투 파장처럼 국경을 넘어 성 평등 사회로 가는 방향을 제시해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