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지시 내용도 인정안해…모르쇠 버티는 자 손 들어줘
2016년 9월 22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안종범 정책조정수석(가운데)이 박근혜 대통령의 모두 발언을 듣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법조계에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항소심 재판부가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업무수첩 내용 대부분을 증거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두고도 ‘무리한 판단’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안 전 수석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말을 그대로 받아 적었다”고 인정한 바 있는 이 업무수첩은 다른 ‘국정농단’ 재판에서 박 전 대통령의 지시를 뒷받침할 증거로 수차례 인정된 바 있다.
재판부가 문제 삼은 대목은 수첩에 적힌 내용의 ‘진실성’(신빙성)이다. 박 전 대통령이나 이 부회장에게 수첩에 적힌 대화 내용이 사실인지 확인할 수 없다면, 이를 듣고 받아 적었다는 안 전 수석의 기록은 대화나 지시가 있었다는 점을 뒷받침할 증거로 받아들일 수 없단 취지다.
하지만 이는 앞서 안 전 수석의 업무수첩은 물론, 비슷한 종류의 업무수첩을 유죄 증거로 활용한 다수의 ‘국정농단’ 재판부와도 다른 판단이다. ‘삼성 뇌물’ 수수자인 최순실씨와 박 전 대통령 재판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22부(재판장 김세윤)는 지난해 12월 장시호씨 등 선고공판에서 이 수첩을 “안 전 수석이 대통령으로부터 들은 말을 기계적으로 적은 것”이라고 인정했다. 또 수첩에 언급된 돈과 실제 후원액수가 일치하고, 박 전 대통령이 이 부회장과 2015~2016년 면담을 한 당일 수첩에 빙상, 승마 관련 지시가 있다는 점을 근거로 박 전 대통령이 이 부회장과의 단독면담에서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에 대한 후원을 요청했다고 봤다.
이밖에 지난해 11월 서울고법 형사10부(재판장 이재영)도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항소심에서 김성민 전 국민연금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 위원장 교체에 대한 문 전 장관 진술과 안 전 수석 업무수첩 내용이 일치한다고 보고, 박 전 대통령이 삼성 합병 찬성 지시를 내렸다고 판단했다. 또 박 전 대통령과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의 발언을 기록한 박준우 전 청와대 정무수석의 업무수첩 역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재판에서 김 전 실장 등의 유죄 판단 근거로 활용됐다.
법조계에선 이번 재판부가 별다른 이유도 없이 수첩의 증거능력을 일괄 배제하면서 생길 수 있는 역효과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형사부의 한 부장판사는 “뇌물공여자와 수수자가 부정청탁을 주고받은 대화 내용에 대해 함구하거나 부인하는 이상, 그 대화 내용을 뒷받침할 어떤 증거도 받아들일 수 없단 논리로, 자백 수준의 증거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짚었다. 또다른 판사는 “진술자가 법정에서 증언할 수 없는 예외적 상황이나 업무상 필요로 작성된 문서는 통상 증거로 인정하는데, 재판부가 지나치게 엄격히 본 것 같다”고 했다. 현소은 기자 soni@hani.co.kr